수리권 운동은 이같은 포괄적 논의와 함께 커졌다. 이를 주도하는 대표적인 단체는 미국의 수리 협회(The Repair Association)와 아이픽스잇(iFixit)이다. 수리 협회는 1500만 가입자를 보유하고 있다. 아이픽스잇은 각종 기기의 수리 매뉴얼을 공개하고 있다. 두 단체와 미국 소비자 공익연구 단체인 US PIRG, 미국 소비자 전문지인 컨슈머리포트 등은 매년 CES에서 최악의 제품을 선정하는 ‘워스트 인 쇼 어워드(Worst in show awards)’를 벌이기도 한다. 소비자 선택권에 악영향을 주거나 환경을 해칠 수 있는 제품, 품질이 나쁜 제품, 목적을 알 수 없는 제품 등을 선정한다.
EFFECT 1_ 수리, 법
세계는 수리권 법제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1년 7월 미국 공정거래위원회(FTC)의 권고로 기업이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를 제한하지 못하게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뉴욕처럼 다른 주들도 수리권 관련 주법 입법을 논의 중이다. 콜로라도도 작년 수리권 법을
통과시켰지만 전동 휠체어 수리에만 적용되는 한계가
있다. 뉴욕의 법안 역시 오는 7월 1일 이후 생산된 제품에만 법이 적용되는 한계가
있다. 가장 진보적인 건 유럽연합(EU)이다. 2022년 3월 EU 집행위원회는 2009년 발표된 ‘에코디자인 지침’을 개정하는 새 규정을
발표해 제품 설계 단계부터 수리 가능성, 내구성, 재활용성 등을 고려하게 했다. 프랑스는 2021년 1월부터 ‘수리 가능성 지수’ 표기를
의무화했다. 이 지표는 분해 용이성, 부품 공급, 매뉴얼 제공 등의 다섯 가지 지표로 이뤄진다. 이에 더해 5년 이내 전자 제품 수리율을 60퍼센트 달성하고 2024년까지 제품 수명 측정을 위한 내구성 지수를 통합적으로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에서는 지난 대선에서 당시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선 공약으로 등장했다.
EFFECT 2_ 순환 경제
수리할 권리는 완벽한 ‘내돈 내산’에 대한 요구이자 순환 경제의 핵심이다. 미국 공익 연구단체 US PIRG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매년 스마트폰 100억 개가 생산되고, 5억 9000만 톤의 전자 제품이 버려진다. UN이 발간한 〈
2020 세계 전자 폐기물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에만 전 세계적으로 5360만 톤의 폐기물이 발생했지만 제대로 수집되고 재활용된 폐기물은 17.4퍼센트에 불과하다. 2019년 기준으로 5년 새 21퍼센트 급증한 수치다. 아이폰 12의 탄소 배출량의 83퍼센트가 공정 단계에서 발생하는데 유럽환경국(European Environmental Bureau)에 따르면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의 수명을 1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매년 210만 톤의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INSIGHT_ 센테니얼 라이트
전구를 향한 피버스 카르텔의 음모는 전구에서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120년이 넘게 켜져 있는 전구가 있다. 캘리포니아주 리버모어의
센테니얼 라이트(Centennial Light)다. 1901년 불이 켜진 이후 2013년 전원 장치를 이유로 단 한 번 꺼진 것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켜진 채로 유지되고 있다. 숱하게 생겨나고 사라지는 기업들은 이제껏 성장 일변도 전략을 취해왔지만 기후 위기와 저성장은 소비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제 오래 살아남는 기업이 강한 시대다. 좋고, 오래 쓸 수 있으며, 고쳐 쓸 수 있는 제품이 사랑받는다.
- 기업의 노력 ; 60년간 백열전구만 만들어 온 일광전구의 권순만 디자인 팀장은 인터뷰집 《일광전구: 빛을 만들다》에서 리브랜딩의 콘셉트가 ‘롱 라이프 브랜드’였다고 회고한다. 이들의 사명은 “We Make Light”다. 제품이 아닌 제품이 주는 가치에 집중할 때 소비자의 진정한 선택권이 보장된다.
- 소비자의 노력 ; 한편 《리페어 컬쳐》의 저자 볼프강 헤클(Wolfgang Heckl)은 그의 저서에서 수리권 운동을 지지하면서도 이를 비단 기업의 책임으로만 그리지 않고 소비자가 직접 제품을 수리·수선하려는 의지를 강조한다. 순환 경제의 1차 책임은 제조 단계의 기업에 있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건 소비자의 두 손이다.
FORESIGHT_ 자율 규제
바이든의 행정 명령 이후 애플은 자가 수리 키트를 도입했고 자가 수리를 지원하는 공식 웹사이트를
오픈했다. 삼성전자도 자사 전자 제품에 대한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존 디어도 백기를 들었다. 이 전쟁은 끝난 걸까? 수리권 논쟁은 자율 규제의 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업들의 이러한 반응은 법제화를 방지하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 존 디어와 AFBF와의 MOU에는 미국 전역의 농부와 사설 기술자가 소프트웨어·진단 도구·교육 등에 접근할 수 있게 지원하고 구매자가 자가·사설 수리를 진행한 이후에도 자사 소프트웨어 구매를 막지 않는 등 차별 행위를 금지하겠다는 내용이 주로 보도된다. 그러나 존 디어는 2018년 당시 캘리포니아 농장국과 유사한 MOU를 맺었을 때도 실행까지 4년을 끌어온 바 있다. 게다가 MOU에는 “AFBF가 연방·주의 수리권 법안을 도입, 홍보 또는 지원하지 않도록 동의한다”는 문구와 동시에 연방·주에서 자가수리권 법안이 발효되면 두 단체의 계약이 철회된단 문구도 담겼다. 제품의 수명은 아직 기업이 쥐고 있다. 눈치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