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펜던트 랜드

1월 27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스코틀랜드의 퀴어 인권은 어쩌다 영국과의 자존심 대결로 번졌나.

  • 스코틀랜드 정부가 트랜스젠더 전환 절차를 간소화한다고 밝혔다.
  • 영국의 수낙 총리는 반대를 표했고 이는 스코틀랜드의 주권 싸움으로 번졌다.
  • 경제가 안정될 때 독립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다시 힘을 얻을 것이다.

INCIDENT_ 개혁
스코틀랜드에선 2005년부터 성별 재정의(gender recognition)가 가능했지만[1] 그 절차가 비싸고, 번거롭고, 관료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에 지난해 12월 22일, 스코틀랜드 정부는 새로운 성별을 인정하는 절차를 간소화했다.
  • 소견서 ; 기존엔 성별 위화감[2]에 대한 의사 소견을 받아야 했다. 이 과정을 생략한다. 
  • 최소 연령 ; 성별 정정의 최소 연령을 현 18세에서 16세로 낮춘다.
  • 의무 생활 기간 ; 성별 정정 후 일정 기간 동안 성별을 바꾸지 못한다. 이 기간을 2년에서 3개월(16, 17세는 6개월)로 줄인다.

CONFLICT1_ 영국
  • 그런데 발목을 잡은 게 있다. 영국이다.[3] 리시 수낙 영국 총리는 위 개정안에 제동을 걸며 최종 통과를 막기 위해 핵 옵션(nuclear option)도 쓸 수 있다고 밝혔다.
  • 성별 정정의 절차를 간소화하며 “평등을 기리는 역사적인 날”이라 칭송하던 스코틀랜드 정부는 당황스러움을 표했으며 니콜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 정부 수반은 이를 두고 “강력히 반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현지시간 1월 17일, 영국의 알리스터 잭 스코틀랜드 담당 장관은 스코틀랜드법 35조[4]에 근거해 해당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명목은 “스코틀랜드 내 개정안이 영국의 평등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ANALYSIS1_ 트랜스포빅
영국의 거부권은 문서상으로 존재해 왔으나 실제 입장을 표명한 것은 스코틀랜드 의회 설립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영국은 왜 스코틀랜드의 성별 정정법에 제동을 걸까? 트랜스 커뮤니티 배척은 영국 정부가 보수 여론을 형성해 온 굵직한 이슈다. 보리스 존슨 전 총리와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로 대표되는 영국 내 보수계 인사는 근 몇 년간 영국 내 안티트랜스(anti-trans) 문화 전쟁을 이끌고 있다. 거부권을 발표한 알리스터 잭 장관은 “우리는 여성과 아이들의 안전에 우려를 표현다”고 밝혔다. 현 리시 수낙 총리 또한 스코틀랜드 개정안을 두고 “깨어 있는 넌센스(woke nonsense)”라 혹평하며 워크이즘[5]희화화했다.
ANALYSIS2_ 불황
자국 내 혼란과 맞물린 정치적 도구로도 작용한다. 영국의 경제 위기와 의료 위기에 대한 비판을 마주한 리시 수낙 총리는 스코틀랜드와의 갈등을 소재로 국민적 관심을 분산시키고자 한다.
  • 경제 위기 ; 지난해 8월 영국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9.9퍼센트 상승세를 보였다. 취임 초기부터 파격적인 감세안을 발표한 리즈 트러스 총리는 보수당 내 신임을 잃으며 취임 45일 만에 사임했고 국민은 여전히 고물가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 의료 위기 ; 의료 체계 또한 붕괴하고 있다. 브렉시트 이후 수많은 의사들이 영국을 떠났으나 코로나19와 겨울철 독감으로 환자는 급증했다. 여론 조사 기관 사반타 콤레스의 의료 실태 조사 결과 영국 국민 네 명 중 한 명은 동네 의원 예약이 불가해 온라인에서 약을 사먹고, 매주 300~500명의 환자가 응급 처치를 받지 못해 사망하고 있다.

NUMBER_ 16
국민의 관심을 외부로 분산하려는 영국의 전략은 작동할까?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현 영국 사회가 마주한 문제 중 ‘트랜스젠더 이슈’의 중요도는 16개 항목 중 16위였다. 이들 관심사의 상위를 차지한 것은 생활비, 헬스케어,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소위 먹고사는 문제였다. 스코틀랜드 국민당에게 성별 정정법 개정안은 인권 향상의 댓돌이자 독립 국가 건설이 걸린 자존심이지만 정작 다수의 영국 국민에겐 생활과 동떨어진 이슈로 비친다.
BACKGROUND_ 주민 투표
그렇다면 스코틀랜드는 왜 이번 개정안 추진에 사활을 걸까?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최근 갈등은 지난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2년 11월, 스코틀랜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묻는 국민 투표를 계획했으나 이는 수포로 돌아갔다. 영국 대법원 측이 “스코틀랜드 정부는 영국 정부의 동의 없이 국민 투표를 진행할 수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KEYPLAYER_ 국민당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은 스코틀랜드인들의 오랜 염원이었으며 그 중심엔 국민당(SNP)이 있었다. 정당 지지율 1위(4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국민당은 독립 국가 건설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며 지지층을 결집해 왔다. 현재 투쟁의 중심에 선 니콜라 스터전 국민당 대표는 2014년 자치 정부 수반에 취임했고 지금껏 스코틀랜드 내 독립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이번 성별 정정법에 대해 영국은 여성 인권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개입하고 있고, 이에 대한 스코틀랜드 국민당의 대응은 독립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제를 위한 싸움이다.
CONFLICT2_ 스코틀랜드

그러나 해당 개정안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스코틀랜드 내부 여론이다. 주어진 성별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성별로서 살아갈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존재하지만 그 절차를 간소화하는 데엔 다수 여론이 부정적이다.

  • 정치권 ; 의회 투표에 참여한 유권자 중 3분의 2는 개정안에 반대했으며 해당 개정안을 추진한 국민당 내에서도 일부 의원의 반대에 부딪쳤다.
  • 여성 단체 ; 여성 인권 단체를 중심으로 MTF[6]의 증가에 따른 여성 권리 위축을 지적한다.[7] 유명 작가 조앤 K. 롤링이 이 의견에 힘을 실어 주며 해당 논의는 더욱 불거졌다.
  • 행정 ; 동일 성별-동일 임금의 원칙, 교도소 내 성별 분리 등 법에 명시된 여러 성별 관련 조항에 혼선을 빚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 남용 ; 개인이 임의로 쉽게 성별 정정을 하여 특정 성별로서의 권리를 취한 뒤, 다시 성별을 전환할 남용 가능성도 제기된다.

RISK_ 문화 전쟁

인권 이슈가 정쟁화될 때 사회적 혼란은 배가된다. 성별 정정법은 스터전과 수낙,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신경전을 넘어 퀴어 커뮤니티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으로 퍼지고 있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비의료화(demedicalisation)’다. 새로운 성별을 선택하는 것이 정신적 결함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밝히는 취지이지만 이에 대한 여론은 분분하며 또 다른 젠더 디스포리아를 형성하고 있다. 문화 전쟁의 볼모가 되는 것은 사회적 약자이며, 지난해 여름 미국 전역을 뜨겁게 달군 낙태금지법이 그 증거다.


INSIGHT_ 이데올로기
  • 국민당은 성별 정정법을 매개로 스코틀랜드 독립이라는 민족적 가치를 관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스코틀랜드 국민들에게 국가 주권은 시급한 의제일까? 스코틀랜드 내 정당 지지율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당은 다른 노선을 보인다. 지난 2020년 11월, 스코틀랜드 노동당 대표 아나스 사르와르는 최소 2026년까지 국민 투표에 반대한다고 밝히며 화제가 됐다. 사르와르는 “2014년식[8]의 구시대적인 논의로 회귀하진 않을 것”이라며 코로나19 이후 향후 5년간 일자리 창출과 교육 제도 혁신, 국가 보건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 국가 재건 사업에 주력하는 노동당의 포부는 국민당의 그것과 다르다.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 위기와 불확실성을 거치며 독립이라는 이데올로기는 힘을 잃었다. 강경책을 펼치는 영국의 자신감도, 영국과의 협치와 재건 사업에 집중하는 노동당의 결정도 여기서 기인한다. 고물가 시대를 사는 스코틀랜드 국민에게 수백 년간 품어 온 이념보다 중요한 것은 생계와 안정이며, 독립을 묻는 국민 투표가 성황리에 진행됐다 해도 2014년 투표와 마찬가지로 부결됐을 확률이 높다.


FORESIGHT_ 영연방의 해체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갈등은 수 세기에 걸쳐 왔지만 지난해 엘리베스 2세의 서거 이후 그 의미는 달라졌다. 엘리자베스 2세는 젊은 시절 스코틀랜드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메이 성에서 가족들과 오랜 시간을 보냈고 노후에 임종을 맞는 장소로 그곳을 택했다. 스코틀랜드는 여왕이 사랑했던 나라이자 영연방의 흔적이었으며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그로부터 민족적 결속력을 느꼈다. 그러나 여왕의 서거 이후 제국의 그림자는 옅어졌고 스코틀랜드 국민의 3분의 2는 여전히 유럽 연합 가입을 열망한다. 물가 안정과 함께 독립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다시 힘을 얻을 때,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은 지난했던 갈등의 역사를 뒤로 하고 현실이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 서거와 연영방의 관계가 궁금하다면 〈더 라스트 크라운〉을, 브렉시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궁금하다면〈브렉시트와 시한폭탄이 된 영국의 헌법〉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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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의견이 북저널리즘을 완성합니다.
[1]
생물학적 성 전환 수술을 거치지 않아도 본인의 성별을 재선택하는 것이 합법이다.
[2]
본인의 생물학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불일치하다고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3]
스코틀랜드는 지난 18세기 잉글랜드 왕국에 통합된 이후 자치권에 대한 목소리를 키워 왔으며 1999년 독자적인 의회와 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4]
스코틀랜드법(Scotland Act) 35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정부가 특정 법안을 통과시킬 경우, 영국 정부는 해당 안건이 법제화되기까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4주의 시간을 갖는다.
[5]
사회적 이슈에 민감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태도 혹은 운동.
[6]
Male to Female.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을 정정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7]
화장실, 탈의실 등 여성 전용 시설에서 MTF의 출현 등이 지적된다. 법안 간소화에 대한 논의라기보단 기존에 존재하던 MTF 반대 여론과 가깝다.
[8]
2014년은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에 대한 찬반을 묻는 1차 국민 투표를 진행한 해다. 당시 55퍼센트 과반의 반대로 스코틀랜드 독립이 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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