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는 끝났다

2월 2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보일러를 마음대로 켜면 안 되는 시대가 왔다. 혁신이 필요하다.

  • 난방비 고지서, 1월은 예고편이다. 2월이 진짜 폭탄이다.
  • 예견된 대란을 정부는 방치했다. 대책은 임시방편이다.
  • 에너지 패러다임이 뒤집혔다. 새로운 시대에는 정책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BACKGROUND_ 민심의 대명절

정치권 입장에서 ‘민족의 대명절’은 ‘민심의 대명절’이다. 가족이 만나 잘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정치 풍향계의 방향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검찰 소환조사 출석 여부, 국민의힘 당권 주자들의 행보, 중대선거구제 개편 논의 등 굵직한 정치적 이슈는 모두 민심의 대명절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배치되었으며, 결정되었다. 그러나 설 밥상에 차려진 반찬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민심은 1월 난방비 고지서에 들썩였다. 다시, ‘먹고사니즘’의 시대다.
CONFLICT_ 지각

일부 지역에서는 2월 난방비 고지서가 이미 발부됐다. 진짜 폭탄은 2월 고지서라는 반응이 나온다.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몰아닥친 지난해 12월 중순부터 올해 1월 중순까지의 사용량이 반영된 고지서다. 설 연휴 이후 불어닥쳤던 북극 한파를 생각하면, 3월 고지서도 벌써 무섭다. 정부는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다. 모든 기초수급자와 차상위계층에 올겨울 난방비로 59만 2천 원을 지원한다. 각각 170만, 32만여 가구에 달한다. 앞서 취약 계층 에너지 바우처 지원 및 요금 할인 폭 확대 등을 발표한 바 있고, 중산층에 대한 난방비 지원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늦었다. 민심의 대명절 이전에 대책이 나왔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정부의 대책은 여름에 나왔어야 했다.
NUMBER_ 2배

난방비 대란은 뻔히 예상된 ‘회색 코뿔소’였다. 지난해 네 차례에 걸쳐 가스 요금을 올린 것은 다름 아닌 정부다. 단계적으로 올렸다고는 하지만 요금 인상을 실질적으로 체감하게 되는 것은 당연히 겨울철이다. 서민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한꺼번에 올랐다고 느끼게 된다. 단순히 난방 단가로 계산해도 35퍼센트 내외의 인상 폭이다. 올겨울 한파 탓에 난방 수요도 늘었다. 결국, 아파트를 기준으로 난방비는 작년 12월 대비 두 배로 뛰었다. 이 결과는 진작에 시뮬레이션 가능했다. 요금 인상률도, 추위가 어느 정도일지도 정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올겨울 난방비 고지서에 관한 경고를 하지 않았다. 아껴야 한다고, 미리 방한용품을 갖추고 집에서 열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보수해야 한다고 안내하지 않았다. 혹독한 겨울을 거듭 경고했던 유럽 각국의 정부들과는 대조적이다.
MONEY_ 1800억 원

그렇다면 정부는 난방과 관련해서 지난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올해 에너지바우처 예산을 지난해 대비 20퍼센트 줄였다. 역행이다. 설 이후 정부가 발표한 난방비 지원 예산은 총 1800억 원, 이 중 1000억 원은 예비비에서 충당한다.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예비비 사용이 의결되었다. 민심이 들썩이자 죄였던 곳간을 다시 푼 것이다. 물론 곳간을 마음껏 풀어도 될 상황이어서 푼 것은 아니다. 지난해 국세 수입은 정부 예상치보다 7천억 원 덜 걷혔다. 4년 만에 세수 ‘펑크’가 난 것이다. 그래도 필요하다면 써야 하는 것이 세금이다. 그리고 적재적소에 잘 써야 한다. 그러나 에너지 취약계층을 정확히 파악하는 첫 단추부터 예산이 없어 시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하반기에 관련 법이 개정되었지만 올 연말에나 국회에서 관련 예산 논의가 시작될 예정이다. 야당은 정유사가 고유가 상황에서 거둔 초과 수익에 세금을 부과하는 ‘횡재세’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정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인 데다, ‘정유사가 적자 상황에 빠지면 세금으로 보전해 줄 것이냐’는 식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INSIGHT_ 새로운 시대

더 큰 문제는 1800억 원으로 올겨울을 넘긴다 해도 추위와의 싸움이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흔히 가스 요금 인상의 원인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다고 전쟁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 세계화의 종말 ; 천연가스는 전 세계가 사용한다. 그러나 생산국은 19개국 정도에 불과하다. 이번 전쟁으로 유럽 대륙은 러시아로부터  파이프로 공급받던 물량(PNG)을 잃었다. 세계화의 종말과 함께 국제 질서의 재편이 가속화하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전쟁이 끝난다고 유럽으로 향하는 파이프의 밸브가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국 바다 건너 배로 운송할 수 있는 액화 천연가스(LNG) 시장에 거대한 수요가 추가된 꼴이다. 단기적 등락은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천연가스의 가격은 우상향 경향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 탄소 패권주의 ; 전쟁으로 유럽이 탈석탄 기조에서 유턴하고, 원전이 재조명받고 있다는 기사가 말 그대로 쏟아졌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숫자는 다르게 말한다. IEA(국제에너지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2022년 10월 기준 OECD 회원국의 전력을 가장 크게 책임지고 있는 것은 재생에너지다. 33퍼센트를 차지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LNG(30퍼센트)이며 원자력은 약 16퍼센트에 그쳤다. 이미 세계는 탄소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중이라는 얘기다. 즉, 재생에너지는 흐름이 아니라 현실이다. 물론 이 현실의 뒤편에는 정치적 고려도 있다. 석탄과 우라늄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큰 자원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재생에너지 중심의 발전 환경이 이미 도래했다면 LNG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바람이 제대로 불지 않거나 일조량이 적어지는 등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메꾸기에 가장 적합한 발전원이 LNG이기 때문이다. 석탄이나 석유 등에 비해 탄소 배출량이 적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발전 장비를 껐다 켜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매우 짧아 단기적 전력 수요에 바로 대응하기 쉽다.
난방비 대란은 올겨울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이제 가스를 예전처럼 풍족하게 사용할 수 없거나, 그래서는 안 되는 시대다. 우리가 받아 든 난방비 고지서는 20세기식 에너지 패러다임의 전복을 알리는 시발탄에 불과하다.
RECIPE 1_ 그린 리모델링

패러다임이 전복될 때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궁지로 몰리는 당사자는 언제나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다. 최근 열흘간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가 뉴스 화면을 끊임없이 장식했다. 물론, 아파트 거주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으니 일반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부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새로 지은 아파트는 보일러를 조금만 돌려도 따뜻하다. 반면 쪽방촌은 아무리 난방을 해도 춥다. 부의 양극화에서 파생되는 ‘단열 양극화’ 때문이다. 서울 지역 아파트의 경우 단열재 폭이 20cm를 유지하게 되어있지만, 쪽방촌의 경우 단열재 두께가 5~10cm에 불과하다. 추우니 난방비를 보조해 주는 것은 임시방편이다.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주거를 보조해 주는 것은 문제 해결이다. 노후 주택의 단열 보강이나 보수부터 지원해 줘야 에너지를 풍족하게 쓸 수 없어도 춥지 않은 겨울을 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가 난방비 대책을 여름부터 내놓았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RECIPE 2_ 열펌프

새로운 패러다임에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난방 방식에도 혁신이 필요하다. 유럽에서는 ‘열펌프’가 주목받고 있다. 에어컨이나 냉장고처럼 실내외기에서 냉매와 물이 열교환되며 열에너지를 만드는 원리로 작동된다. 국내에서 주로 사용하는 가스보일러 대비 난방 효율이 약 3배 뛰어나다. 에너지 위기를 맞아 지난해 유럽에서는 삼성과 LG 제품이 큰 성공을 거뒀다. 작년도 삼성전자의 유럽 시장 열펌프 매출은 전년 동기대비 2배 수준을 기록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매출이 30배 증가했다. 통 큰 보조금 정책도 한몫한다. 영국은 열펌프 한 대당 약 800만 원을 지원하고 미국도 지난해 약 90억 달러를 썼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단종이다. 700만 원이 훌쩍 넘는 초기설치비를 감당하며 열펌프를 설치해야 할 이유가, 우리에겐 지금까지 없었다. 그러나 탄소 저감을 위해, 달라진 에너지 권력 지형에서 살아남기 위해 귀뚜라미와 린나이 외에 다른 대안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때다.
REFERENCE_ 프라이부르크

도시 자체를 리모델링하는 방법도 있다. 독일의 프라이부르크가 대표적인 사례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을 선언한 프라이부르크시는 세계적인 친환경 도시로 꼽힌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신축 공공건물 및 시 소유 땅에 지어지는 모든 건물에 태양광 패널 설치를 의무화했다. 도로 또한 자동차보다 자전거에 맞춰 설계되었다. 태양 궤도를 따라 회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주택 ‘헬리오트로프’가 프라이부르크시의 상징이다.
FORESIGHT_ 혁신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화석연료의 러시아 의존을 탈피하기 위한 에너지전환 전략(REPowerEU)추진을 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 에너지가 곧 안보라는 시대 정신을 뒤늦게 깨달은 결과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의 기회이자 걸림돌로만 인식되고 있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또한 내용을 뜯어보면 글로벌 재생에너지 시장에서 패권을 거머쥐겠다는 야심 찬 계획표다. 에너지 정책을 정치적 이해득실의 도구로 삼기엔 시기가 너무 좋지 않다는 증거들이다. 우리는 왜 12월 고지서에는 놀라지 않고 1월 고지서에 놀랐을까? 지난해 11월은 평균기온이 역대 네 번째로 높았다. 그리고 12월은 역대 네 번째로 낮았다. 여름도, 겨울도 더욱 변덕스러워질 것이다. 그리고 기후재난은 불공평하다. 공평한 생존을 위해 정책에도 혁신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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