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확장

2월 23일 - FORECAST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법원이 처음으로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했다. 가족의 확장을 기대할 수 있을까?

  • 동성 커플의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 판결문에 쓰인 ‘동성 결합’, ‘생활공동체’ 등의 단어는 그 자체로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의미한다.
  • 다양한 가족 형태를 위한 법은 2014년부터 논의됐다. 진전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NEWS_ 고등법원의 판결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판결문은 다소 복잡했다. 법원은 동성 부부 대신 ‘동성 결합 상대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번 판결이 동성혼에 대한 인정은 아니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그러면서 판결문 말미 이례적인 메시지를 덧붙였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 차별에도 확실하게 선을 그은 것이다. 동성혼도 차별도 안 된다는 법원의 설명,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BACKGROUND_ 1심

이번 판결의 시작은 소성욱 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이었다. 소 씨는 배우자 김용민 씨의 피부양자로 등록 신청을 했다. 건보공단으로부터 사실혼 관계일 경우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은 후였다. 이들은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지만 결혼식을 올린 사실혼 관계였다. 8개월 후 이들의 사연이 보도되자 소 씨의 피부양자 등록이 취소됐다. 건보공단은 혼인은 ‘남녀의 결합’이기 때문에 이들을 사실혼 관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밝히며, 소 씨에게 지역가입자 건강보험료를 부과했다. 2021년 2월 소 씨는 부당한 보험료 청구를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패소했다. 그리고 2023년 2월 고등법원이 1심의 결과를 뒤집었다.
DEFINITION_ 피부양자 제도

건보공단은 상고 의사를 밝힌 상태다. 우리나라는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실업·빈곤 등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는 국민을 보호한다. 건강보험은 4대 사회보장보험제도에 속한다. 건보공단은 불가피하게 보험료를 낼 수 없는 국민도 가족이라는 범위 안에서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특례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피부양자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피부양자 등록 대상은 배우자, 자녀, 부모, 30세 미만 65세 이상의 형제자매다. 건보공단은 추가로 업무지침을 통해 사실혼 배우자도 ‘배우자’로 인정해 왔다. 공백 없는 안전망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KEYPLAYER_ 서울고등법원

2022년 9월 기준, 사실혼 배우자의 피부양자 등록 건수는 3562건이다. 건보공단은 그중 2건을 ‘동성 부부는 사실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소했다. 고등법원은 이를 차별로 규정했다. 동거인이 동성이라는 점만 빼면 사실혼과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혼과 ‘동성 결합’ 모두 법률적 의미의 가족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정서적·경제적 생활공동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관계의 합법성 여부를 떠나 동성 배우자를 피부양자로 인정하는 것이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는 제도적 취지에 부합하다는 것이다.
EEFECT_ 나비 효과

주목할 것은 판결의 여파다. 항소심 판결이 대법원에서도 유지된다면 일차적으로 건보공단은 ‘동성 결합’을 사실혼으로 인정하지 않는 내부 지침을 수정해야 한다. 유사 규정이 많은 사회보장제 관계 기관과 의료계가 촉각을 세우고 있다.
  • 국민연금 ;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 가입자가 사망하면 나오는 유족연금에 대해 동성 배우자가 상속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 의료계 ; 코로나19 팬데믹에서 감염자의 동거 가족은 PCR 검사를 무료로 할 수 있었다. 동성 배우자는 그럴 수 없었다. 이 같은 혜택을 누릴 권리부터 연명치료중단 등의 의료결정권, 사망 시 시신을 인수할 권리까지 논의될 수 있다.

ANALYSIS_ 가족의 의미

가족은 최소단위의 사회안전망이자 보완 시스템이다. 북저널리즘 종이책 《1인 가구와 기술》은 “실직, 장기 입원 등의 이유로 가족 중 일부가 경제 활동을 할 수 없을 경우 다른 구성원이 일시적으로 이를 보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상속·재산분할·소득공제·의료보험 등 국가가 혼인 관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생기는 책임과 권리는 1000가지 이상이다. 가족은 불가피한 일이 생겼을 때 위기에 직접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가까운 안전망이다. 다시 말해,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안전에 공백이 생긴다는 뜻이다.
REFERENCE_ 비친족 가족

우리나라에서 법적 가족이 되는 방법은 세 가지, 혼인·출산·입양이다. 이 방법으로 얽히지 않은 생활공동체는 비친족 가구라 칭한다. 2021년 기준 비친족 가구는 47만 2660가구다. 1년 새 11.6퍼센트 증가한 수치로 통계청의 인구총조사를 실시한 이래 최고치다. 비친족 가구에 속하는 인원은 100만 명을 넘어섰다. ‘법적 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친족 가구 역시 소득세 인적공제, 주택대출, 건강보험, 각종 의료 혜택에서 소외되어 있다. 이러한 가족 제도에 한계를 느끼고 방법을 찾아 나선 사람도 있다. 브런치에 연재된 〈친구 입양기〉는 친구를 입양해 가족을 이룬 비혼 여성의 삶을 담았다.
STRATEGY_ 생활동반자법

2022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국회의장에게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동성 부부 등 남녀 혼인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인정하도록 한 것이다. 2023년 2월 21일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온 후, 정의당은 생활동반자법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민주당의 박홍근 원내대표도 13일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생활동반자법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라고 발언한 바 있다. 생활동반자법은 혼인·출산·입양이 아니어도 같이 생활하며 서로 돌보기로 약속한 관계에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제도다.
INSIGHT_ 차별금지법

사실 이러한 시도는 2014년부터 있었다. 초안이 마련됐으나 “동성혼 합법화법”이라는 보수 단체의 반대로 발의조차 되지 않았다. 20대 국회에 발의됐으나 제대로 된 논의도 이뤄지지 않은 채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0대 대선에 연대관계등록제라는 이름의 공약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통계청의 ‘2022년 사회조사’를 보면, 65.2퍼센트의 국민이 결혼하지 않아도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논의가 미온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기성세대의 관심에서 벗어난 의제기 때문이다. 이주민 변호사는 《왜 차별금지법인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다양성 부족은 의제의 편협함으로 이어진다. 중년 남성 정치인의 비율은 초선에서 다선으로, 그리고 거대 양당의 지도부로 올라갈수록 더 높아진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의제를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고, 차별금지법과 같이 기성세대가 아직은 폭넓게 공감하기 어려운 의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 규제 포획의 전제 조건은 소수의 관심, 다수의 무관심이다. 따라서 근본적인 해결책 역시 대중의 관심도를 높이는 것뿐이다.”
FORESIGHT_ 대중의 인식

과연 대중적 관심이 입법을 이끌 수 있을까? 2021년 전국금속노동조합은 모범단체협약안을 개정했다. ‘배우자’를 법률상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 및 동거인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명시했다. ‘가족’ 개념에도 법률상 혼인에서 벗어나 여러 가족 형태를 반영했다. 배우자의 성별과 관계없이 경조사휴가, 가족돌봄휴가 등 각종 복지제도를 누릴 수 있는 가이드라인은 금속노조 산하 사업장 461곳에 적용된다. 전문가들은 민간에서의 시도가 법과 제도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설명한다. 법은 항상 느리다. 그리고 변화는 늘 아래서부터 시작한다.

젠더 다양성에 대해 다각적으로 살펴보고 싶다면 〈LGBT 의료 시장이 열렸다〉와 《모두의 운동장》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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