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은행이 파산했다.

2023년 3월 14일, explained

금리가 올라도 은행이 망할 수 있다. 채권 때문이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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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억 달러가 넘는 자산을 보유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금융 당국은 현지 시간 3월 10일 유동성 부족과 지급 불능을 이유로 SVB를 폐쇄했다. 미국에서 은행으로는 두 번째로 파산 규모가 크다. 미국 정부가 12일 예금자 보호 계획을 발표했지만, 시장의 충격은 여전하다. 제2의 SVB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WHY NOW

이번 사태가 미국과 세계 금융의 위기 도미노로 이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스타트업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특정 은행의 특수 사례라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위기의 근원을 살펴보면 미국도 한국도 안심할 수 없다. 바로 채권 투자 손실이다. 금융권 대부분이 이미 채권 문제를 안고 있다. SVB처럼 실현된 손실인지, 실현되지 않은 손실인지 차이만 있을 뿐이다. SVB 파산 과정을 들여다보고 채권 문제를 짚어 본다.

실리콘밸리의 주거래 은행

SVB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1983년 설립됐다. 미국 내 16위 규모의 은행이지만, 이름부터 그렇듯 실리콘밸리에선 예금액 3위 안에 드는 주거래 은행으로 통했다. 주요 고객은 스타트업이었다. 외부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은 SVB에 예금을 맡겼고, 아직 수익을 내지 못하는 스타트업은 SVB에서 대출을 받았다. 에어비앤비와 도어대시도 고객이었다. 그런 은행이 투자 손실을 발표한 지 48시간 만에 문을 닫았다.

No paycheck

지난 주말 실리콘밸리는 공황 상태였다. 일요일 오후 미국 정부가 예금 전액 보증을 발표하기 전까지 줄도산 우려가 이어졌다. 원래는 예금 보험 한도인 25만 달러까지만 보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 스트리밍 기업 로쿠(Roku)는 SVB에 맡긴 예금이 4억 8700만 달러다. 회사가 보유한 전체 현금의 4분의 1이다. 직원들도 걱정이 컸다. 회사가 현금을 SVB에만 넣어 뒀고 정부의 긴급 조치가 없었다면 당장 다음 급여부터 밀릴 수 있었다.

과도한 유동성

40년 역사의 은행이 어떻게 48시간 만에 무너졌을까. 문제의 시작도 끝도 유동성이었다. 코로나19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2020~2021년 4조 달러를 시장에 풀었다. 투자 시장은 활기가 넘쳤고, 기술 기업 주가는 고점을 찍었다. 스타트업이 유치한 투자금이 계좌에 쌓이면서 SVB 예금 규모는 2019년 말 617억 달러에서 2021년 말 1890억 달러로 세 배 증가한다. 굴리는 돈은 세 배 늘었는데, 대출 수요는 그만큼 따라오지 않았다. 투자를 넉넉히 받은 스타트업이 대출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SVB는 예금 절반을 미국 국채와 모기지 채권 등 증권에 투자한다.

말라붙은 유동성

2022년이 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미국이 양적 완화를 종료하고 돈줄을 죄기 시작한다. 물가 상승을 막기 위해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금리를 급격하고 꾸준하게 올린다. 금리가 1년 만에 제로에서 4.5~4.75퍼센트까지 오른다. 금리가 오르자 기술 회사 주가에 거품이 빠지고 투자 시장도 얼어붙는다. SVB의 주요 고객인 스타트업은 자금난을 겪는다. 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니 신규 예금은커녕 있던 예금을 빼게 된다. SVB는 고객이 맡긴 돈을 내주기 위해 초저금리 시대에 사들인 채권을 매각하기로 한다.

금리 인상과 채권 가격 하락

채권은 쉽게 말해 빚 보증서다. 지금 돈을 빌려주면 일정 기간 뒤 원금에 이자를 붙여 갚겠다는 증서다. 이 증서를 만기 전에 사고팔 수 있다. SVB는 금리가 제로였을 때 미국 국채를 샀다. 그런데 최근 1년 사이 금리가 폭등하면서 2년 만기 미국 국채 금리도 1퍼센트대에서 5퍼센트로 뛰었다. 지금 시장에 수익률 5퍼센트짜리 국채가 있는데, 예전에 발행된 수익률 1퍼센트짜리 국채를 제값 주고 살 사람은 없다. 시세를 맞추려면 원금 손실을 보더라도 산 가격보다 낮게 내놔야 한다.

마지막 48시간

SVB는 별수 없이 손해를 보면서도 채권을 매각했다. 210억 달러어치를 팔았는데, 이 과정에서 18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채권을 처분하고도 자금이 모자랐던 SVB는 신주 발행 계획을 발표한다. 이게 3월 8일의 일이다. 이후 투자자들 사이에서 SVB가 망할 거라는 소문이 돈다. 투자자들은 투자 기업에 연락해 SVB 예금을 서둘러 빼내라고 조언했다. 뱅크런이 시작된다. 9일 하루에만 총 예금의 4분의 1인 420억 달러가 인출됐다. 손실 발표 48시간 만인 10일, 금융 당국은 은행 폐쇄를 결정한다.

제2의 SVB

일요일 아침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는 개입을 고려하지 않았다. 은행권 전반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은행의 문제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날 다른 은행이 또 폐쇄된다. 가상화폐 전문 은행인 시그니처은행이다. 지난주 청산한 실버게이트은행까지 일주일 사이 은행 세 곳이 문을 닫았다. 위기감이 확산하자 오후 들어 미국 정부는 태도를 바꾼다. 구제 금융으로 SVB를 회생시키진 않아도 예금자들의 예금은 보험 한도와 관계없이 전액 보증하기로 했다. 연준도 250억 달러 규모의 새 기금을 조성한다. 은행이 자금 압박을 겪을 때 SVB처럼 손해를 보며 증권을 매각하지 않도록 증권을 담보로 1년간 자금을 대출할 계획이다.

IT MATTERS

SVB 파산 사태가 금융권 전반의 위기로 확대하진 않을 전망이다. 주로 스타트업을 상대해 온 SVB라는 특정 은행의 문제이지, 부실 채권 판매가 촉발한 2008년 금융 위기와 같은 은행 시스템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부 장관의 말처럼 미국의 다른 은행은 고객층이 다양하고 유동성도 부족하지 않다. 게다가 미국 정부가 주말을 넘기지 않고 대책을 내놓으면서 시장의 공포 확산을 조기에 차단한 것으로 보인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금융권이 보유한 채권의 미실현 손실이다. 정부가 발행한 채권, 즉 국채는 안전하다. 미국 국채는 더 안전하다. 만기까지 들고 있을 때 그렇다. SVB처럼 현금이 급히 필요해 초저금리 시대에 매입한 채권을 고금리 시대에 팔아야 한다면 손실을 보지 않을 은행이 없다. 미국 은행이 보유한 증권의 미실현 손실은 2021년 말 80억 달러에서 2022년 말 6200억 달러로 80배 늘었다. 당장 팔지 않고 들고 있는 증권이라 손실이 실현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상황은 비슷하다. 채권은 만기 전에 매도할 목적으로 매입하는 ‘매도 가능 채권’, 만기까지 보유하려고 매입하는 ‘만기 보유 채권’으로 나뉜다. 지난해 국내 보험사들은 100조 원이 넘는 매도 가능 채권을 만기 보유 채권으로 장부상 재분류했다. 매도 가능 채권은 시가로, 만기 보유 채권은 원가로 재무제표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금리가 2퍼센트포인트 오르면 보험사의 채권 평가 손실이 72조 원 발생할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 기준 금리는 1년 사이 3퍼센트포인트 올랐다. 상황이 이런데, 연준은 오는 21~22일 크든 작든 금리를 더 올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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