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다음 미래, 혼합 현실

3월 31일, explained

혁신은 창조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애플은 타이밍을 잘 안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NOW THIS

애플이 새로운 제품을 내놓을 전망이다. 오디오 라인업을 제외하면 8년 만이다. 주인공은 혼합현실 헤드셋으로, 오는 6월 열릴 ‘세계개발자대회(WWDC) 2023’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이미 최고 경영진 100여 명에게 선보였고, 시연회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흥미진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번 제품이 또 다른 혁신일지, 아니면 아이폰 이후 독주하던 애플에 제동을 걸 뼈아픈 실패가 될지 의견이 갈린다.

WHY NOW

아이폰은 우리 삶을 바꿨다. 소통은 재정의 되었고, 관계를 만드는 방식, 일하는 방식, 즐기는 방식이 모두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애플이라는 회사의 로고를 곧잘 ‘혁신’의 이미지와 겹쳐본다. 만약 애플의 새로운 혼합현실 헤드셋이 성공을 거둔다면, 우리의 삶은 다시 바뀔 것이다. 또 다른 미래가 시작되는 것이다.

VR+AR=MR

VR과 AR은 익숙하다. MR은 아직 낯설다. MR(Mixed Reality, 혼합현실)은 간단히 말해 VR과 AR의 장점을 혼합한 기술이다. 즉, 현실에 가상을 덧입힌 AR(Augmented Reality, 증강현실)처럼 현실 세계와 충분히 소통하며 물리적 이동까지 가능하지만, 동시에 완전한 가상의 세계를 의미하는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과 같이 가상 세계 속 아이템과 상호작용 할 수도 있다. 2022년까지 빅테크 씬의 키워드는 메타버스와 VR이었다. 그러나 애플의 선택은 VR이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

이유는 애플의 팀 쿡 CEO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팀 쿡은 AR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심오한 기술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심지어 “미래에는 우리가 AR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밝혔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으로 미래를 시작했다면, 팀 쿡은 AR로 미래를 시작할 것이라는 얘기다. 반면, 메타버스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메타버스가 뭔지에 관해 설명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시각이 팀 쿡만의 것은 아니다.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도, 에번 스피걸 스냅챗 CEO도 메타버스의 정의가 모호하다는 입장이다.

파티가 끝난 후

그래서 메타버스는 일상이 되지 못한 채 유행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유행은 챗GPT 열풍이 불면서 끝났다. 가상 세계에서도 돈이 증명한다. 온라인 가상 부동산 시장이 주저앉은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돈이 마르고 직원이 해고당하는 중이다. 사명을 ‘메타’로 변경하면서까지 메타버스에 관해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던 마크 저커버그 CEO는 지난달 대규모 구조 조정 계획을 발표하면서 메타버스 부분을 대거 축소했다. 지난해 메타버스 준비팀을 꾸렸던 월트디즈니도 올해 감원 칼바람과 함께 해당 팀 전원을 잘라냈다. MS도 2017년 인수한 메타버스 플랫폼 알트스페이스 VR 서비스를 이달 초 종료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애플은 MR 헤드셋을 내놓는다.

엔데믹 시대의 가상 현실

애플의 속내는 무엇일까. 신제품의 이름에 답이 있다. 애플의 MR 헤드셋 제품의 이름은 ‘리얼리티 프로’가 될 전망이다. 가상이 아닌 현실의 경험을 확장하는 기기로서의 정체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합리적인 전략이다. 현실 공간을 누릴 수 없던 팬데믹 기간은 이제 끝났다. 사람들이 가상 세계에 침잠할 이유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특히 그 가상 공간으로 진입하기 위한 기기가 매우 비싸고 오래 착용하기엔 불편하며 어지럽다면 더욱 그렇다.

리얼리티 프로

대신 현실의 삶을 더 풍요롭게 누리고자 하는 동기는 충분히 차올랐다. 복잡한 기계를 수리할 때 세밀한 부품 위로 관련 정보가 시각적으로 제시된다거나, 의료 현장에서 방사선 치료와 수술을 보조하는 등의 기술이 이미 올해 CES에서 소개된 바 있다. 현실의 소통과 작업을 AR 기능이 보조하는 것이다. 물론 애플의 MR 헤드셋은 VR 모드도 지원한다. 가끔 가상 세계에서 실감 나는 게임을 즐기고 싶을 때도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무시하기 힘든 위험 요소가 있다. 구글의 AR 기기도, 메타의 VR 기기도 이미 시장에서 실패했다는 점이다.

like iPhone

다만, 애플의 혁신은 언제나 모방과 개선으로 완성되었다. 애플식 간결한 아름다움의 상징과도 같았던 아이팟은 독일의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의 ‘T3 포켓 라디오’와 거의 똑같다. 아이폰도 1980년대부터 개발되어 마니아층을 형성했던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를 개선한 제품이다. 차이는 진입장벽이다. 얼리어답터의 전유물이었던 PDA와 달리 아이폰은 처음 만져보는 사람도 금세 익숙해질 수 있었다. 즉, 소수의 경험에 그치지 않고 다수의 일상을 바꾸는 혁신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번에도 비슷한 경향이 감지된다. 일례로, 애플의 헤드셋은 손으로 쥐고 작동하는 컨트롤러 대신 10개의 카메라와 라이더 센서를 탑재해 핸드 트레킹 기능을 구현할 예정이다. 사용자의 맨손이 입력장치로 쓰인다는 얘기다. 아이폰처럼 말이다.

개발자의 힘

발표 시점이 오는 6월의 ‘세계개발자대회(WWDC) 2023’이라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MR 헤드셋의 성능이 좋아도 활용할 방법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개발자들이 리얼리티 프로에 관심을 두고, 사용 가능한 앱을 많이 개발할수록 기기의 매력이 올라간다. 앱 생태계를 빠르고 넓게 구축해야 사용자가 늘어난다는 얘기다. 그리고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앱을 개발할 동기도 커진다. 수익성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순환의 대표적인 레퍼런스도 역시, 아이폰의 앱스토어다. 그리고 이러한 선순환을 이루는 데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는 메타의 ‘메타 퀘스트 스토어’다.

IT MATTERS

‘세계 최초’는 애플의 방식이 아니다. 늘 한발 늦게 시장에 진입하지만 기술을 잘 활용하고, 이를 최적화해서 사용자들에게 최고의 경험을 제공하는 데에 집중한다. MP3부터 스마트폰, 무선 이어폰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였다. 이미 열린 시장을 면밀히 관찰하다가 확장의 시그널을 감지하는 순간 최고의 제품을 출시해 시장을 장악해 왔다. 그래서 애플이 MR 헤드셋을 내놓는 올해가, 침체 되어있는 AR과 VR 시장에 ‘별의 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도 나온다.

그러한 기대에는 근거가 있다. 바로 메타버스 열풍을 잠재우고 말라가는 투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는 챗GPT의 등장이 그것이다. MR 기술을 묘사할 때 주로 등장하는 영화가 〈마이너리티 리포트〉다. 주인공 역을 맡은 톰 크루즈가 허공에 컴퓨터 화면을 띄우고 특수 장갑을 낀 손으로 화면을 터치하던 그 장면이다. 그런데 챗GPT 기술이 MR에 융합된다면 다른 영화를 레퍼런스로 들어야 할 수도 있다.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가 AI 비서, ‘자비스’와 대화하며 각종 지시를 내리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사용자 경험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는 얘기다.

대개 혁신은 창조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인풋을 통한 개선과 올바른 판단이 혁신의 근원이다. 애플의 제품들이 그렇다. 그리고 리얼리티 프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세상에 나오기까지 7년을 기다린 제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뚜껑을 열어 확인할 일만 남았다. 팀 쿡의 판단대로 지금이 ‘별의 순간’인지, 우리의 삶에 또 다른 미래가 찾아오게 될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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