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7화

트럼프 이후,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만약 2020년 대선의 가장 큰 이슈가 ‘누가 러시아나 북한을 잃어버렸는가’가 아니라 ‘누가 지구 행성을 잃어버렸는가’라면 어떻게 될까?”
토머스 프리드먼의 2018년 8월 16일 《뉴욕타임스》 칼럼 중에서

 

트럼프는 절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인 유학 시절 들춰 본 버트람 그로스(Bertram Gross)의 《상냥한 파시즘(Friendly Fascism)》을 먼지 쌓인 서가에서 다시 꺼내 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로스는 이 오래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섬뜩하게 예언한다.

“다음번에 등장할 파시즘의 흐름은 사람들을 가축처럼 나르고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는 형태가 아닌, 친근한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1]

트럼프는 파시스트 DNA를 가지고 있다. 물론 트럼프를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건 과할 수도 있다. 권위주의 정부 정도가 적당한 규정일지도 모르겠다. 남미 권위주의 국가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스티븐 레비츠키(Stephen Levitski)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라는 논쟁적 저서에서 권위주의적 정치가가 탄생했다고 선언한다. 그의 리트머스 테스트는 폭력을 명확하게 부정하지 않는 자세, 정치적 경쟁자의 시민적 자유를 제한하는 자세, 선출된 정부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태도 등 세 가지이다. 우리는 캠페인 시절 유세장의 반대파에 대한 폭력을 자극하고, 선거 불복을 선언하고, 힐러리를 감옥에 집어넣자고 선동한 트럼프를 기억한다. 레비츠키의 기준으로 보면 최소한 트럼프는 100퍼센트 권위주의자다.

하지만 트럼프는 단지 권위주의자라는 규정으로는 5퍼센트 부족하다. 파시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와 논쟁이 존재한다. 나는 핵심 문제의식과 스타일에서 트럼프를 파시스트로 규정한다. 즉 트럼프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워지는 디스토피아와 미국 퇴조기의 불안감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적에 대한 폭력에 매혹을 느끼는 이들을 적극 동원한다는 의미에서 파시즘의 미학에 가깝다.

과거 자본주의 고도 금융이 낳은 대공황 시절에도 세계 경제에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엄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이를 미·영 중심의 시장 지배에 도전하는 것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이는 내적으로는 국가의 강압적 개입에 의한 전체주의적 총동원으로 구성된다. 자본주의의 위기 앞에서 미국도 국가 개입주의를 노골화했다. 파시즘과 뉴딜은 외관상으로는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광대한 시장을 보유한 미국은 국가 개입과 임금주도 성장을 통해 자유주의를 왼쪽으로 확장했다. 노동자층을 강화해 자본과 노동은 새로운 평형을 당분간 확보했다. 이는 금융 자본을 중심으로 한 미국 제국의 상승기였기에 가능한 돌파구였다. 이후 미국은 1970년대 중반까지는 무한한 번영과 실제 성장을 누렸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전반은 ‘수축 사회’로 돌입했다. 신자유주의 거품기 이후 자본과 노동의 평형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이는 자본의 자기 지속 가능한 기반을 파괴했다. 월러스타인이 지적한 것처럼 기후 변화와 복지 부담 등으로 기업과 국가의 부담 비용은 갈수록 상승해 간다. 반면에 경제 블록과 자본 간 경쟁 격화로 평형 구조는 무너져 버렸다. 트럼프의 USMCA는 오바마 시기의 과거 부자가 점잔 빼는 태도를 버리고 노골적으로 수축기의 과잉 경쟁을 돌파하려는 시도다. 학자들은 이를 점잖게 ‘경쟁적 자유화’ 전략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합리적 주고받기라는 신사적 외양을 버리고 미국의 패권을 이용하는 강압적 무역 적자 줄이기다. 부상하는 경쟁국과의 험악한 시장 경쟁과 나란히 트럼프는 국내적으로도 부상하는 인구층(히스패닉 등)과 험악한 제로섬 게임을 벌인다. 과거 2차 세계 대전 시절의 파시즘 부상과 맥락은 다르지만, 시대를 떠나 파시즘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디스토피아 시대에 대한 강압적 돌파라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정치 지형상으로 보면 트럼프의 재선 가능성은 점차 옅어지고 있다. 지난 중간 선거 결과를 보면 선거구 조정 등 구조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도 트럼프는 선거인단의 핵심 승부처인 펜실베이니아, 미시간, 위스콘신 등지에서 상원은 물론 주지사 선거도 패배했다. 교외의 여성층과 백인 대학 졸업 층에서 민주당은 공화당을 눌렀고 심지어 백인 고졸 층에서도 격차를 줄였다. 이는 곧 민주당이 단지 흑인, 여성, 히스패닉 등 소수자 연합으로만 승부하지 않고 더 확장된 기반에서 트럼프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걸 의미한다. 민주당의 저명한 전략가 텍세이라(Ruy Teixeira)는 이번 중간 선거에서 트럼프를 무너뜨릴 공식을 드디어 발견했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 존 주디스는 《민족주의의 부활》에서 솔직하게 자신과 텍세이라가 제안한 소수파 연합 전략의 실패를 자인하고 있다. 반면 오늘날 민주당 대선 후보들은 백인 노동자층에서의 기반 구축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간 오바마 시기의 경제 위기 탈출 정책 및 트럼프의 감세 정책 덕분에 잠시 호시절이었던 경제 상황도 점차 침체기로 가고 있어 민주당에 유리하다. 중국과의 난폭한 무역 전쟁이 만들어 낸 농산물 수출 감소 및 경제 침체 효과로 트럼프의 지지 기반 주들의 경제 상황은 특히 좋지 않다. 여기에다가 민주당 하원은 적절히 수위 조절만 한다면 온갖 조사와 소환으로 정력적인 트럼프의 에너지를 완전히 방전시킬 뿐 아니라 치명적 실수를 유도할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피 냄새를 맡은 공화당 정치인들이 예비 경선에서 현직 대통령에게 도전하는 사태가 벌어지거나 혹은 백악관 자명종 시계처럼 존재감 없이 걸려 있던 마이크 펜스(Mike Pence) 부통령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선거라는 게임에서 정치 지형만큼 중요한 변수는 바로 상대의 특성과 역량이다. 지금 민주당에서는 대선 승리의 가능성을 발견한 수십 명의 정치가들이 대통령 욕심을 내고 있다. 그렇지만 트럼프 수준의 헤비급 스타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들 대선 후보들 사이에는 민주 사회주의에서 신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이념적 차이가 너무 커서 예비 경선 링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는 상처투성이 후보를 상대로 본선 링에서 유리하게 싸울 수 있다. 오늘날 민주당은 트럼프를 상대할 강력한 에너지 레벨과 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반트럼프 유권자를 공통의 지반으로 묶어 낼 후보가 아직은 선명히 드러나지 않아 불안해하고 있다.

더구나 ‘개자식’ 트럼프는 결코 점잖게 황혼기에 접어들 인물이 전혀 아니다. 작가 에이미 초직(Amy Chozick)은 2018년 10월 1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성공적인 미드 시리즈는 결코 1회로 끝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트럼프 스토리가 넷플릭스의 어떤 미드 시리즈보다 흥미진진한 건 사실이다. 그의 극우 심복이자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 신봉자인 배넌은 역대 대선 역사상 가장 일찍부터 시즌2 상영을 위한 재선 캠페인을 지휘해 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우파의 칼 마르크스라고 생각하는지 빈번한 유럽 여행을 통해 극우 인터내셔널 결성을 준비하고 있다. ‘전 세계 우파들이여 단결하라!’는 말이다. 배넌의 노력은 최근 벨기에 브뤼셀에 설립한 ‘더 무브먼트(The Movement)’ 재단으로 가시화되었다.

배넌은 동시에 미국 내에서 차근차근 재선 캠페인의 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2016년 선거에서 배넌은 데이터 분석 업체인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를 통해 페이스북 이용자 정보를 불법 활용하는 음모를 꾸몄다. 지난 트럼프 캠페인은 미국 대선 역사상 가장 지저분한 캠페인으로 악명이 높다. 2020년 대선에서 배넌이 빅 데이터와 가짜 뉴스 테크닉을 사용해 어떤 식으로 한층 진화된 네거티브 캠페인을 진행할지 모른다. 리버럴들이 실리콘밸리를 활용해 데이터베이스 전쟁에서 어떻게 반격할지도 귀추가 주목된다. 미디어 전문가인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는 이 반격을 이번 미국 대선의 관전 포인트로 제시한다.

블린킨은 존 매케인(John McCain) 상원의원의 비유를 인용하며 완전히 암흑이 되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2년의 어둠보다 더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다.[2] 아마 이 위기에는 트럼프발 북풍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북풍은 만약 김정은 위원장이 전향적으로 선회한다면 스펙터클한 평화 캠페인일 가능성이 높다. 대선 직전 김정은의 워싱턴 방문과 ICBM 반출 퍼포먼스 같은 것 말이다. 속이 뻔히 보이는 연출이지만 그래도 대중들의 엄청난 관심을 끌 만하다. 한반도의 시민 입장에서 싸구려 드라마인들 평화 체제 입구만 시작된다면 무슨 상관인가? 물론 트럼프 이후 이 스펙터클이 결정적 평화 체제로 단단히 다져지는가는 별개의 사안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동이나 남미 등에서 북풍이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의 호전파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이란이나 혹은 터키, 그리고 베네수엘라가 발화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간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남미 이슈는 플로리다 등 결정적 승부처에서 보수적 히스패닉 유권자들을 되찾을 유혹적인 카드로 부상하고 있다. 존 볼턴과 엘리엇 에이브럼스(Elliott Abrams) 등 네오콘들은 지금 베네수엘라의 헌정 위기 상황에 설레하면서 정권 교체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리얼리티 쇼 역사상 최고의 연출자인 트럼프가 이 발화점들을 대상으로 과연 어떤 극적인 반전의 드라마를 준비하고 있을지 궁금하고 또 걱정스럽다. 아니 어쩌면 기획자인 트럼프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귀결될 수도 있다. 트럼프 시리즈의 마지막 회 결론이 벌써부터 무척 궁금해진다.

 

2020년 대선의 화두는 그린 뉴딜이다


트럼프 진영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임으로 끝난다면 다행이다. 그렇다고 트럼프 시대 이후 리버럴이 당선되면 국제 자유주의 질서가 다시 생명력을 가지고 부활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전도사인 존 아이켄베리(John Ikenberry)는 그렇게 믿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에너지를 소진한 리버럴 체제의 미래를 낙관하고 이를 수선하려는 아이켄베리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스(Ernst Haas)나 월트와 같은 현실주의자들이 예상하는 혼돈의 시대가 더 현실적이다.

원래 자유주의란 자유란 가치를 통해 개인의 존엄과 동등성을 보장하려는 근대의 탁월한 발명품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자유주의의 번성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라는 세 주춧돌 위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공화주의란 자의적 지배를 방지하고 공동체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법적 지배, 견제와 균형 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체제를 말한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이 공화주의와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덕분에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근대 자유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그리고 근대 최대의 혁신적인 발명품 중 하나인 법인 자본주의의 혁신적 동력과 결합하여 삶의 질이 개선되고 번영에 대한 기대감에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더구나 사회주의라는 경쟁 체제의 등장은 서구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 긴장감과 견제력을 부여했다. 자유주의 사상가인 카츠넬슨(Ira Katznelson)은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적 평등의 감수성을 결합해야만 역동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간파했다. 사실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 국가들은 카츠넬슨의 화두를 모범적으로 구현하며 효과적으로 사회주의 진영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냉전에서 서구 자유주의의 승리는 카츠넬슨의 조언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풍부한 수원지 대신에 오만하게 자유로운 시장의 권리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약자들의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한 투쟁과 자본 간 경쟁의 격화에 자본주의 체제는 더 많은 시장의 자의적 지배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로 반격했다. 비록 자본은 효과적으로 지구적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지만 점차 벌어지는 힘의 격차는 재생산 기반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문명의 자기 파괴는 지구 환경의 돌이킬 수 없는 악화라는 가장 큰 부산물을 낳았다. 1970년대 로마 클럽이나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등 앞서가는 정치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말부터 생태적 환경과 적대적인 신자유주의의 번성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다. 수십 년간 극지 환경을 연구한 피터 와담스(Peter Wadhams)라는 과학자는 이제 핵전쟁은 기후 변화 사태와 관련해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기까지 한다. 생태신학의 거두인 존 캅(John Cobb)이나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 루퍼트 리드(Rupert Read)는 이제 문명의 불가역적인 붕괴를 기정사실로 하고 오히려 현실적으로 재난 이후를 준비하자고 주장한다. 오늘날 이 파국론적 주장에 공감하는 과학자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이와 달리 자이한과 같은 낙관주의 전략가는 지구적 디스토피아 속에서도 자체적 에너지 조달이 가능한 미국은 홀로 퇴각해서 번성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장담한다. 하지만 자이한의 분석에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기후 변화의 예상을 벗어나는 급격한 전개 가능성이 안이하게 다뤄진다. 오히려 사학자 우다드(Colin Woodard)는 북미 대륙의 지역적 문화 변천을 다룬 최근 신간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로 전염병이나 테러리스트의 도시 폭파로 이해관계와 문화적 동질성에 따라 미국이 분열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3] 미국 대륙과 중국의 내부 분열 등 전 지구가 블록 이하의 상태로 갈라지는 양상은 트럼프 이후 중장기적으로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물론 이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가상이다. 자유주의는 언제나 탄력적으로 현실 위기를 돌파해 왔다. 과연 자유주의는 과거 자본주의 대공황의 위기를 뉴딜과 마셜 플랜으로 돌파했듯이 이번에도 자본주의와 지구의 위기를 그린 뉴딜과 우주 진출로 돌파할 수 있을까? 이미 선도적인 다국적 기업은 RE100[4]처럼 신재생 에너지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과거 뉴딜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바로 정치다. 기후 변화와 양극화는 그린 뉴딜(Green New Deal) 같은 예외 상황에 준하는 비상의 급진 정치를 요구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이를 실천할 정치 자본과 힘이 없다. 미국과 유럽은 우파 포퓰리즘에 발목이 잡혀 있다. 지구적 질서로 나아가기는커녕 기존 블록 유지에도 급급하다.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숨을 헐떡이며 노쇠하고 있다. 서구의 쇠퇴를 집필한 슈펭글러의 오래된 예견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자유주의 질서의 쇠락과 이행기다.

오히려 중국이라는 새 전체주의 체제가 집행력이란 측면에서만 본다면 독재적 방식으로 기후 변화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더 가지고 있다. 시진핑은 손쉽게 중국 헌법에 생태 문명을 끼워 넣었다. 동시에 권력 연장 제도를 손쉽게 배치했다. 미국 같으면 둘 다 상상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시진핑 같은 권위주의적 리더는 빈번한 선거가 있는 서구와 달리 생태 문명으로의 장기적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선진국 추격형 경제인 개발주의 방식으로 민심을 얻고자 하는 유혹도 받는다. 권위주의적 통제 체제에 의존하는 중국 공산당이 지구의 미래와 자신 정권의 미래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자명하다. 지구가 심각한 위기를 맞은 시점에 중국과 러시아 등의 사회주의권의 자본주의가 고도화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좌파 석학인 아리기(Giovanni Arrighi)가 꿈꾼 비자본주의 발전 모델인 중국 사회주의 드림도 그리 유토피아적 미래는 아니다.

지금은 자유주의자들의 시대가 아니라 레닌과 슈미트가 부활하는 시대다. 이들은 뉴턴의 결정론적인 근대보다는 불확실성을 포괄하는 시스템 이론과 양자 역학의 시대인 오늘에 더 잘 어울린다. 만약 레닌과 슈미트가 살아 있다면 그들은 서로 포옹하며 서로를 진정한 적이라 존경하면서 조커처럼 움직였을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국제적 규칙과 질서, 합의는 극단적 양극화와 인류 멸절의 생태 대위기 앞에서 너무 순진하고 맥 빠진 이야기이다. 트럼프가 권위주의적 충동을 보이고 시진핑이 우상화를 시도하는 건 이들이 보기에 너무도 당연하다. 미국식 리버럴들이 숭상하는 듀 프로세스는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누가 먼저 보트에 탈 것인가를 놓고 롤즈의 정의론을 논쟁하는 것과 같다. 슈미트의 후계자 트럼프와 레닌의 후계자 시진핑은 서로를 보완한다. 그들은 서로 제대로 된 적을 만났기에 피가 끓을 것이다.

그렇지만 트럼프의 등장으로 리버럴 체제의 고상한 거짓말을 드러내고 모순을 악화시키는 것에 무조건 환호하는 일각의 경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과거에도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에서 비슷한 논쟁이 있었다. 러시아의 궁핍화가 차르(tsar) 체제에 대한 분노를 키울 것이라며 환영하는 트로츠키에 대해 레닌은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비록 그럴 가능성이 높더라도 민중이 고통을 겪을 궁핍화를 환영하기보다는 어렵지만 개선된 체제를 환영하고 변혁적인 체제로 전환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레닌의 말이 와 닿는다. 마찬가지로 비록 서서히 삶아지는 개구리와 같은 신세라도 우리는 파시즘에 반대하고 오바마 체제와의 비판적 연대 속에 더 인간다운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리버럴 레프트인 워런(Elizabeth Warren)과 레프트인 오카시오 코르테즈 진영이 중도주의자들을 견인해 국내적으로 새로운 그린 뉴딜 연합을 만들어 내야 한다. 코르테즈 진영이 명심해야 할 점은 지금의 지구적 위기는 편협한 진보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세대와 이념을 넓게 묶어 낼 광대한 진보주의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포괄하기에 민주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너무 좁고 낡았다.

국제적으로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단순한 적대화의 욕망과 싸우면서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그린 지구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미국과 중국은 서로 간의 불신과 주도권 싸움 속에서 자신들과 지구를 훼손하는 부정적인 미래를 함께 만들어 왔다. 미국은 중국의 상승 욕구에만 눈을 돌릴 뿐 이들의 위기감 및 생태 문명에 대한 고민은 과소평가한다. 반면에 중국은 지구 시민 사회의 보편주의를 담지 못한 자신들의 편협함이 타자들에게 어떤 위기감을 조성하는지를 과소평가해 왔다. 하지만 이 두 외눈박이 제국들은 갈수록 위험해지는 신냉전 경향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패권은커녕 영원한 취약감에 시달리는 건 물론이고 함께 공멸할 위험성마저 현존한다. 가공할 AI 기술의 발전과 우주 전쟁의 가능성, 그리고 기후 변화의 파국 앞에서 인간, 국가 간 패권 다툼이란 사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점에서 미·중 제국들이 갈등하는 현실 속 한반도 평화는 단지 남북 평화 공존만의 이슈가 아니다. 아시아와 전 지구적 시스템 변화를 향한 하나의 작은 레버리지가 될 수 있다. 시스템 과학은 작은 레버리지도 얼마든지 시스템 전체의 변화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키고 있다.

정치권은 결코 스스로 대담한 변화를 이루지 못한다. 과거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대담하고 급진적인 뉴딜도 사실은 시민 사회가 만들어 낸 아래로부터의 작품이다. 지금은 신화화되었지만 사실은 루스벨트도 대담한 사회 투자 국가를 실험했다가 곧 보수적인 균형 예산 노선으로 돌아가는 등 부단히 비틀거렸다. 오늘날에도 제도권 정치 바깥 시민들의 각성과 강력한 운동은 사활의 문제다. 트럼프 시대와 그 이후를 대처하는 시민 사회는 그린 뉴딜과 그린 지구 체제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이를 현실 정치의 흐름으로 지혜롭게 전환시켜야 한다.

시인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미국 혁명을 칭찬하면서 “분노로 인해 천사들이 일어섰다”고 썼다. 반면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은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천사들이 추락하고 있다’는 자막으로 시작한다.[5] 이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그토록 칭찬한 미국 혁명은 빛이 바랬고 미국은 새로운 촛불 혁명을 요구받고 있다. 끝도 없이 추락해 가는 천사가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과 미래 지향적 운동이 필요하다.
[1]
박세회, 〈트럼프의 당선을 예견한 마이클 무어 감독이 또 무서운 말을 남겼다〉, 《허프포스트 코리아》, 2016. 11. 10. 재인용.
[2]
Antony J. Blinken, 〈No People. No Process. No Policy.〉, 《The New York Times》, 2019. 1. 29.
[3]
Colin Woodard, 《American Nations: A History of the Eleven Rival Regional Cultures of North America》, 2011, p. 317.
[4]
Renewable Energy 100퍼센트의 약어로 기업들의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재생 에너지를 통해 100퍼센트 공급받는 것을 목표로 삼는 글로벌 캠페인이다. 2014년 시작돼 2018년 현재 구글, 애플, 삼성전자 등 글로벌 대기업 154곳이 가입했다.
[5]
로빈 우드(이순진譯), 《(할리우드 영화읽기: 성의 정치학)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 시각과 언어,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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