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키트를 고르는 밀레니얼 가족

4월 24일, explained

식구에게 식사는 의례였다. 의례가 바뀌었다는 건, 가족 문화 전체가 변했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밀키트는 Z세대 1인 가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프레시지가 공개한 ‘2022 밀키트 시장 트렌드’에 의하면, 밀키트를 가장 많이 구매하는 연령대는 35~44세로, 밀레니얼 세대의 끝자락에 놓인 이들이었다. 선호하는 메뉴도 확실했다. 프레시지의 판매량 상위 10개 제품 중 6개 제품이 찌개와 전골, 탕과 같은, 2인 이상이 즐기는 한식 메뉴였다. 밀레니얼 세대 가족이 밀키트를 더 많이 찾고 있다.

WHY NOW

복잡한 레시피를 찾아볼 필요도, 따로 재료를 씻거나 손질할 필요도 없다. 밀키트만 있다면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육수에 준비된 재료를 넣어 끓이기만 하면 보기 좋은 밥상이 차려진다. 식사는 식구(食口)에게 일종의 의례였다. ‘밥상머리 교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밥상 위는 지금 시대의 가족이 형성하고 있는 관계의 모습과 그들의 생활상을 드러낸다. 식사라는 의례에 들이닥친 변화는 부모 세대로 합류하기 시작한 밀레니얼 가족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식사의 재료, 시간과 사람

과거에는 식사라는 이름의 가족 의례를 담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가정주부, 주로는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들이다. 현대 가족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국의 맞벌이 부부는 582만 3000가구로, 10년 전에 비해 58만 가구 늘었다. 2인 이상으로 구성된 가구 중, 맞벌이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46.3퍼센트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시간과 사람의 문제는 돈의 문제와도 멀지 않다. 비싼 밥상은 가족을 일터로 내몰았다.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론에도 변화가 생겼다. 현대의 가족 관계는 식사와 같은 상시적이고 소모적인 의례가 아닌, 여행과 같은 특별한 사건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대상이다.

완벽한 밥상

시간과 돈, 사람이라는 현실적인 장벽에도 불구하고 식사는 가족의 흔적 기관처럼 남았다. 잘 차려진 밥상은 ‘화목한 가족’을 생각하면 으레 떠오르는 풍경을 만들기에 적절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밀키트가 만든 화목한 밥상은 밀레니얼 세대의 열망과도 맞닿는다. 밀레니얼 세대는 본인이 구성한 가족이 ‘완벽한 모습’이길 바란다. 미국의 육아 사이트 ‘베이비센터(BabyCenter)’가 조사한 결과, 18세에서 44세 사이의 어머니 2700명 중 무려 80퍼센트가 “완벽한 엄마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할 정도다.

밀레니얼과 완벽주의

미국심리학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는 완벽주의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 기준이 자기 주도적으로 형성됐다기보다는, 사회적인 압력이 만든 인위적 결괏값일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타인의 기대에 따라 자신의 기준을 높게 잡는 사회적 완벽주의의 경우 1989년에 비해 33퍼센트 증가했다. 지금 밀레니얼 세대가 지향하는 완벽함은 사회적 통념과 분리할 수 없다. 이는 화목한 가족의 기준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저널리스트 다니엘 드레이링거(Danielle Dreilinger)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들은 자녀를 양육하는 최선의 방법을 말하는 메시지의 폭격을 받았다.” 밀레니얼 세대는 포용적이며 열린 가족을 지향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완벽한 가족의 형태를 갖추기 위해 무수한 규칙을 세워야 한다.

가족만큼, 당신의 성장도 중요해요

완벽한 가족을 이뤄야 한다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밀레니얼 세대는 완벽한 가정만큼, 성장을 지향하는 당당한 가장이 되길 바란다. 가지각색의 육아 스타트업은 바로 이 지점에 소구한다. 밀레니얼 부모를 위한 플랫폼 ‘패런트리’는 가족과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을 모아 보여 주는 한편, 밀레니얼 부모의 개인적인 삶과 성장도 중요하다는 모토를 강조한다. 패런트리에 따르면 “모든 양육자의 육아 경험은 하나의 커리어”다. 시장 조사 업체 ‘유로모니터 인터네셔널’에 따르면, 밀레니얼 부모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지만, 자기 자신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전 세계 밀레니얼 부모의 58퍼센트가 일상 업무에 들이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돈을 쓸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슈퍼맨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완벽한 나, 완벽한 가족을 모두 좇아야 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부모는 ‘슈퍼맨’이 돼야 한다는 압력에 놓인다. 연예인들의 육아 일상을 보여주는 KBS의 예능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스타의 허심탄회한 육아 생활을 볼 수 있다는 지점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한편으로는 상대적 박탈감을 부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대중문화평론가 황진미는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아이를 키우려면 이 정도는 갖추고 소비해야 한다’를 홍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리얼리티 예능이라는 수식어와는 달리,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화목한 가정’을 불가능한 꿈처럼 만들어 버린 셈이다.

멀어진 꿈, 가족

밀레니얼 세대는 완벽한 모양의 가족을 꿈꾸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성장을 중시한다. 밀키트는 그 둘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는 도구였다. 빠르고 쉽게 보기 좋은 밥상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다인 가구를 위한 밀키트와는 멀어 보이는, 밀레니얼 세대의 비혼 움직임도 같은 원인에서 비롯한다. ‘슈퍼맨’이 되지 못할 바에야, 내 삶을 포기할 바에야, 차라리 가족을 포기하겠다는 결론이다. 집값만이 손익 계산의 전부는 아니다. 나의 가족이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사회가 만든 완벽한 기준에 맞추지 못할 바에야, 다인 가구를 꾸리지 않는 것이 공공선이라는 인식도 파다하다. 인류의 출산이 무책임한 행위라는 철학인 ‘반출생주의’가 최근 인기를 끄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미국 최대의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의 ‘반출생주의 서브레딧(r/antinatalism)’은 18만 5000명의 회원을 자랑한다. 

한 줄기 빛,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오은영 레포트 – 결혼 지옥〉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가장은 오은영의 위로를 필요로 한다. 이들은 완벽주의와 새로운 세대적 욕망, 그리고 현실적 어려움의 삼각지대 속에 놓여 있다. 이 세 꼭짓점을 통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제도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놓칠 수밖에 없다. 이미 제도 내에서 배제되고 있는 1인 가구와 시대착오적인 저출생 정책이 이를 방증한다. 무조건적인 돌봄 확대는 밀레니얼 세대의 자아실현을 가능케 할지는 몰라도, 완벽한 가족과는 멀어진 정책이다. 전문가 오은영은 이들이 경험하는 괴리를 확실한 언어로 해결하는, 임시방편으로 등장한 사회적 현상에 가깝다.

IT MATTERS

모두 달성하기 어려운 수식어들 사이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부모는 선택해야 한다. 돌봄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잠시 멈출 것인지, 혹은 매 저녁 손맛이 깃든 밥상을 만드는 대신 재정적 안정성을 양보할 것인지. 현대의 가정은 이 선택의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로 분화한다. 누군가는 가족과 잠시 떨어져 살면서 주말의 여행으로 온기를 느끼고, 또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가족은 시대가 공유하는 의례를 만들었다면, 지금의 가족은, 마치 100여 종이 넘는 밀키트의 메뉴처럼, 수없이 다양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스테레오 타입의 소멸은 공통된 시대적 감각을 흐릿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정상 가족’이라는 범주가 희미해진 틈을 타, 정상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이다. 과거의 가족이 오랜 시간을 들여 차려진 ‘엄마의 손맛’을 공유하는 사이였다면, 지금의 가족은 함께 밀키트의 메뉴를 고민하는 사이다. 그렇다면, 식구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의 가족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각기의 방법으로 노력하는 모든 이들을 지칭한다.

작년 10월, 함께 사는 친구를 입양한 은서란 씨의 사례가 소소한 화제가 됐다. 은 씨는 “생활동반자법이 없는 우리나라에서 법적으로 가족이 되는 방법은 결혼, 출산, 입양밖에 없다”며 동거인 친구를 입양한 이유를 밝혔다. 친구를 입양한 낯선 사례와 밀키트를 고르는 밀레니얼 가족 사이는 그다지 멀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이 모두 사회가 만든 ‘정상 가족’이라는 통념에 대항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