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게임들
4화

장르의 다양화, 문화가 된 게임

1990년대 중·후반은 게임 장르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이 시기,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게임 장르들이 대거 출시되며 성공을 거뒀다. 성공작을 따라하는 아류작도 쏟아졌고, 기존 작품의 특징을 교묘하게 튼 작품이 원작보다 성공을 거두는 일도 생겼다. 아타리 쇼크로 휘청거리던 북미 게임 산업은 장르의 힘에 입혀 조금씩 일어섰다. 장르 폭발 시기의 게임은 그야말로 새로움 그 자체였다. 개발사들의 작은 선택은 큰 변화를 만들었다. 〈디아블로〉의 성공은 턴(turn) 시스템을 실시간으로 바꾼 것에서 비롯했다. 장르 르네상스의 시기, 게임은 문화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싸웠다. 게임은 사회적 화젯거리이자, 동시의 논란의 대상이었다. 더불어 게임은 점차 대중이 숨 쉬는 일상의 공간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장르의 부흥이 게임 대중화의 시기를 앞당겼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장르의 탄생은 동시에 새로운 게임 탄생의 진입 장벽이 되기도 했다. 남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게임 개발에는 더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됐다. 이제 게임 산업은 이전처럼 소수의 인원이 모여 만드는 작업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수십 명이 투입되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가까웠다. 게임이 문화가 되자 상업화에 대한 시도가 뒤따랐고, 이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그저 다른 성공 사례를 따라만 가는 아류작도 많았고, 그래픽과 영상만 보기 좋은 저질 게임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플랫폼의 홍수도 문제였다. 수많은 게임을 자신의 플랫폼에 담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하며 특징 없이 성능만 앞세운 게임기가 시장에 쏟아졌다. 엉성한 게임과 비싼 게임기의 만남은 게임 산업 전체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무수한 게임기가 20종도 안 되는 게임을 내고 3년도 채 버티지 못한 채 사라졌다. 게임을 잘 만들어야 성공한다는, 아타리 쇼크가 낳은 교훈이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음에도 말이다. 게임 장르의 부흥기는 문화로서의 게임을 알린 동시에 다양한 부작용을 낳았다. 문화로 정착한 게임은 이 시기의 부작용을 이겨 내고 나아 가야만 했다. 장르의 부흥기는 게임에게 한 가지 과제를 남겼다. 1990년대의 무수한 아케이드 게임이 고난의 시기를 지났던 것처럼, 2000년대 쏟아진 게임도 다양한 부작용을 넘어서 문화로서, 상품으로서 정착해야 했다.

 

전 세계를 강타한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2〉


1987년 출시된 ‘캡콤’의 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Street Fighter)〉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어려운 조작과 빠른 전개로 인해 플레이어는 무력하게 적들의 공격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캐릭터도 두 명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낯선 커맨드(command) 입력 방식도 유저들에게 혼란을 주는 요소였다.

이때만 해도 캡콤은 설립 4년 차인 신생 회사였다. 이들은 오랜 경험을 토대로 질주하는 세가나 남코와 경쟁하기 위해 특별한 기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여섯 개의 버튼과 여덟 가지의 공격 방향[1]이었다. 이는 시리즈의 특색이 돼 후속 시리즈로도 이어진다. 개발팀은 미국의 나쁘지 않은 성과를 바탕으로 플랫폼 이식에 도전했지만, 임원진은 이미 〈스트리트 파이터〉를 실패작으로 평가하며 니시야마 팀을 크게 질타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 화면 ⓒCAPCOM
임원진은 곧바로 손실을 메울 게임을 찾아 나섰다. 내부 인력 중 〈로스트월드(Lost Worlds)〉와 〈매드 기어(Mad Gear)〉로 소소한 성공을 맛본 니시타니 아키라에게 차기작 배턴은 넘어간다. 20세의 나이로 캡콤에 입사한 니시타니는 해외 출장 중 미국 게임 센터에서 〈더블 드래곤(Double Dragon)〉을 접하고, 이와 유사한 스타일의 게임을 개발하고자 마음먹었다. 기회를 잡은 니시타니는 ‘비뎀 업 게임(Beat’em Up Game)’인 〈파이널 파이트(Final Fight)〉을 선보인다. 〈파이널 파이트〉는 개발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비뎀 업 게임의 기본을 정립한 게임으로 평가받았다. 일반적으로 1만 대 이상을 판매하면 소위 말하는 ‘대박’이었던 시기에, 〈파이널 파이트〉는 무려 3만 대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임원진의 신임을 얻은 니시타니는 〈파이널 파이트〉의 개발이 완료된 직후 곧바로 〈스트리트 파이터2〉 개발에 돌입했다.

니시타니가 한 첫 번째 작업은 원작인 〈스트리트 파이터〉 분석이었다. 원작을 꼼꼼히 분석해 잘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확실히 나눴다. 니시타니는 〈스트리트 파이터〉에 강력한 보스가 등장한다면 게임의 재미를 올려줄 것이라 봤다. 게임의 큰 콘셉트는 플레이어가 여덟 명의 파이터 중 한 명을 선택해 결국 일곱 명 모두를 격파하는 내용으로 가닥이 잡혔다. 모든 캐릭터에는 이야기를 부여했다. 나이와 신체 사이즈, 국적과 같은 세밀한 부가 설명을 넣어 유저가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엔딩 역시 캐릭터마다 다르게 설정해 결말에서도 확실한 차이를 끌어 냈다. 격투 게임에도 개성 있는 캐릭터와 몰입할 수 있는 스토리 요소가 중요하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다.
〈파이널 파이트〉 게임 화면 ⓒCAPCOM
독특한 캐릭터의 외형에도 차별화 포인트가 드러났다. 니시타니는 웃긴 캐릭터가 개성 있는 캐릭터라고 믿었다. ‘브랑카’의 녹색 피부나 ‘달심’의 늘어나는 신체, ‘가일’의 비행기 형태의 헤어스타일이 대표적이다. ‘춘리’의 과감한 치파오 복장과 스패니시 닌자인 ‘발로그’, 가부키 화장을 한 ‘혼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독특한 요소들은 일반적인 캐릭터에서 볼 수 없는, 차별화 포인트였다. 평범한 디자인은 바로 기각됐다. 니시타니가 웃음을 터트린 콘셉트만 실제 캐릭터로 구현됐다. 황당하지만, 결국 전 세계 유저의 니즈를 적중시켰다.

다음 문제는 쓰기 어려운 공격 기술이었다. 기존의 공격 시스템은 유저가 공격 버튼을 누른 상태에서 커맨드를 입력하고 떼는 식이었는데, 니시타니는 이를 방향 조작을 먼저 한 후 공격 버튼을 누르는 형태로 변경했다. 또한 여섯 개 공격 버튼의 성능에 따라 차이를 두면서 조작에 대한 혼란을 줄였다. 일반 공격과 ‘필살기’로 불린 특수 공격을 연결한 방식도 이때 만들어졌다. 흥미롭게도 이 시스템의 시작은 버그였다. 한 개발자가 일반 공격 도중에 기술이 나가는 버그가 생겼다고 보고했는데 이를 본 니시타니가 “재미있을 것 같으니 그냥 두자”라고 했다. 이 기능이 모든 격투 게임의 필수 요소인 ‘캔슬’이 됐다.

다양한 시도와 우연의 결과물인 〈스트리트 파이터2〉는 1991년 2월 출시됐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슈팅과 액션에 집중돼 있던 아케이드 게임 시장의 판도를 격투 게임으로 바꿔 버렸고 기술 입력과 필살기, 캔슬 공격과 같은 요소는 이후의 격투 게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트리트 파이터2〉는 게임뿐 아니라 각종 미디어와 상품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영화와 각종 팬시, 트레이딩 카드, 만화, 애니메이션으로까지 그 영향력이 닿았다.

그런 〈스트리트 파이터2〉에도 부작용이 없지는 않았다. 〈스트리트 파이터2〉의 성공 이후 격투 게임은 곧 매출이라는 공식이 생겨 게임 매장 대부분을 격투 게임이 채우게 됐고, 아류작도 쏟아졌다. 〈스트리트 파이터2〉 자체에 대한 매너리즘 문제도 컸다. 니시타니는 이후에 〈슈퍼 스트리트 파이터2X〉 같은 캐릭터와 밸런스, 시스템을 개선한 버전을 꾸준히 출시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확장팩’ 또는 DLC(다운로드 콘텐츠・DownLoad Contents)에 가까웠다. 화제성은 충분했지만, 판매량은 그렇지 못했다. 여기에 경쟁작들이 속속 자리 잡기 시작하자 〈스트리트 파이터2〉의 인기는 조금씩 시들어갔다. 캡콤은 후속작 〈스트리트 파이터3〉 개발에 들어가지만, 개발 진척은 생각보다 더뎠다. 그사이 젊은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한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시리즈가 대선전을 거두며 캡콤의 불안함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지만 격투 게임 시장 전체가 침체였기에 〈스트리트 파이터2〉 급 이상의 게임 체인저가 절실했다. 이후 나온 블로킹 기술 등은 새로운 시도였지만, 유저의 열광적인 반응을 부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스트리트 파이터2〉가 남긴 전설은 사라지지 않았다. 2008년 출시된 〈스트리트 파이터4〉가 또 한 번 저력을 보여 줬고 콘솔을 중심으로 한 〈스트리트 파이터5〉가 e스포츠 시장에서 활약을 이어 나가며 지금까지도 많은 유저의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 캡콤은 2023년 〈스트리트 파이터6〉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악마를 죽이다, 〈디아블로〉


1990년대만 해도 RPG는 여러 상호작용과 전략적인 전투, 복잡하고 방대한 세계관과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초창기 장르를 이끌었던 〈위저드리〉나 〈던전앤드래곤〉 작품의 영향 때문이었다. 액션 RPG로 불리는 장르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스타일에서 큰 차별성을 드러내진 않았다. 그러던 중 1996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서 하나의 게임을 선보인다. ‘핵 앤 슬래시(Hack and Slash)’ RPG 〈디아블로(DIABLO)〉였다. 〈디아블로〉의 등장으로 RPG 게임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개발 초기의 〈디아블로〉는 이전의 평범한 RPG 게임과 다를 바 없었다. 그때 〈디아블로〉가 한 선택은 고정관념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렇게 전 세계를 호령한 진짜 악마가 태어났다.

1995년, 게임사 ‘콘도르(Condor)’는 턴 방식의 로그라이크 게임[2]을 개발하고 있었다. 콘도르는 자금난 해소를 위해 투자와 퍼블리싱을 맡아줄 회사를 찾고 있었다. 그중 〈저스티스 리그 태스크포스 (Justice League Task Force)〉라는 격투 게임을 이식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미팅하게 된다. 블리자드는 콘도르의 게임이 성공적으로 개발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이때 〈워크래프트2(WarcraftⅡ)〉를 개발했던 개발자 중 한 명이 콘도르가 개발 중인 게임에 대해 의견을 전했다. 실시간 전략 게임처럼 턴으로 움직이는 방식에서 벗어나 빠르게 이동하며 싸우는 RPG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콘도르의 대표였던 데이비드 브레빅David Brevik이 펄쩍 뛰었다. 정통 RPG에서 벗어난 노선이 시장에서 통할 리가 없을 것으로 봤다. 그때 당시만 해도 RPG는 전략적인 선택과 높은 자유도가 특징이었다. 턴이 중요한 로그라이크 게임은 더 그랬다. 하지만 블리자드 개발자는 물러서지 않고 〈워크래프트2〉의 성공과 내부에서 개발하고 있던 〈스타크래프트(Starcraft)〉를 예시로 들며 빠른 전개에서도 충분히 RPG의 재미를 낼 수 있다고 강변했다.
〈디아블로〉 게임 화면 ⓒBLIZZARD ENTERTAINMENT
말이 통하지 않자 데이비드는 “눈으로 직접 보여 줄게!”라며 개발자들을 불러 모아 3시간 만에 코드를 고쳐 가져왔다. 하지만 결과는 데이비드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플레이어는 빠르게 접근하는 적들의 공격을 받아 내야 했고, 함정과 장애물로 가득한 공간은 더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블리자드 개발자들까지 몰려와 게임을 해보고는 호평을 쏟아 냈다. 데이비드는 내부 개발자를 모아 이 버전의 게임이 콘도르의 미래가 될 것이라 이야기했고, 어떻게든 자금난을 극복해 게임을 출시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블리자드의 생각도 같았다. 블리자드의 임원진들은 콘도르가 개발 중인 게임 〈디아블로〉를 직접 퍼블리싱 하는 것을 넘어 회사를 인수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게임 출시 9개월이 남은 시점, 블리자드는 콘도르를 품게 된다. 회사 전체가 〈디아블로〉 개발에 매달렸고, 마침내 1996년의 마지막 날, 〈디아블로〉가 출시됐다.

개발진들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게임에 대한 반응을 기다렸다. 〈디아블로〉는 출시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250만 장의 판매량을 올렸다. 물론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정통 RPG 유저들은 RPG의 여러 장점을 버리고 오직 마우스로 적을 공격하는 내용만 있다며 〈디아블로〉를 비판했다. 블리자드는 “우리는 RPG를 만든 게 아니라 〈디아블로〉를 개발한 것”이라고 답했다. 블리자드가 주목한 건 기존의 관념에 가둘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재미였다.

실시간 전환 방식 이외에도 〈디아블로〉의 성공의 중심에는 네 가지 키워드가 있었다. 콘도르게임즈의 개성 넘치는 일러스트, 공포감을 살린 그래픽, 적절한 사운드 효과는 하나의 작품처럼 상호작용했다. 특히 기존 RPG가 주지 못했던 공포감이 〈디아블로〉에는 존재했다. 또 다른 성공 키워드는 단순한 구성이었다. 대부분의 RPG가 거대한 세계관을 이해하고 복잡한 이야기와 인물의 관계를 풀며 목표를 이뤄야 했던 반면 〈디아블로〉의 구성은 단순했다. 유저는 영웅을 선택하고 던전에 입장해 적들을 물리쳐 최종 보스를 사냥하기만 하면 됐다. 임무는 한 가지 선택지일 뿐, 대부분의 플레이는 사냥과 아이템 파밍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맵이 매번 다르게 주어지거나 아이템과 적의 위치가 무작위로 주어지는 것도 게임이 장기간 흥행할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무작위적인 요소는 위치뿐 아니라 무기, 장비에 주어지는 능력치에도 적용됐다. 덕분에 다양한 플레이가 가능해졌고, 유저들은 자연스럽게 〈디아블로〉를 반복적으로 플레이하게 됐다. 마지막 키워드는 ‘배틀넷’을 이용한 멀티플레이 방식이었다. 기존 온라인 플레이는 유저와 유저가 IP 주소를 입력해 접속하는 식이었다. 배틀넷은 이런 불편을 블리자드 서버가 도와주는 식으로 해결했다. 무료 기능이었던 배틀넷 덕분에 유저들은 대전 신청, 거래, 친구 찾기를 더욱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디아블로〉의 새로운 시도는 이후의 RPG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로그라이크 장르를 조금 더 쉽게 즐길 수 있게 한 ‘로그라이트(Rogue-lite)’ 장르의 등장도 〈디아블로〉의 여파 중 하나다. 〈디아블로〉 시리즈는 2000년 출시한 〈디아블로2〉로 또 한 번 도약한다. 4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데 성공하면서 액션 RPG를 대표하는 게임으로 자리매김해 명성을 이어나갔다. 〈디아블로3〉은 여러 번의 연기 끝에 2012년 출시됐고 현재까지 여러 플랫폼으로 이식돼 수명을 이어나가고 있다. 시리즈 최초의 MMORPG 형태가 될 〈디아블로4〉는 2023년 6월 6일 출시를 예정하고 있다.

 

〈뿌요뿌요〉가 국민 게임이 된 이유


일본에서 〈테트리스〉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게임사 세가는 아케이드용으로 만든 〈테트리스〉를 1988년 일본에 들여온다. 슈팅 게임과 달리 〈테트리스〉는 아케이드 센터에서 남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범용적인 게임이었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다. 닌텐도가 1989년 선보인 게임보이용 〈테트리스〉는 출시 2년도 안 돼 424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덕분에 많은 개발사가 〈테트리스〉 스타일의 일명 ‘낙하물 퍼즐’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좋지 못한 평가와 함께 사라졌다. 〈테트리스〉가 가진 고유의 재미를 능가할 정도의 매력적인 형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일본에서 〈테트리스〉의 인기를 집어삼킨 게임이 등장한다. ‘컴파일’에서 만든 귀여운 모습의 퍼즐 게임, 〈뿌요뿌요(ぷよぷよ)〉가 그것이다.

컴파일은 당시 〈마도물어〉라는 RPG 시리즈로 알려진 개발사였다. 그곳에서 디렉터로 일하던 쓰카모토 마사노부와 디자이너 모리타 켄고는 잡지에 나온 유저가 제안한 게임에 힌트를 얻어 여러 색상의 도미노가 내려와 순차적으로 쌓이는 〈도미노스〉 게임을 개발 중이었다. 하지만 직원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때 〈마도물어〉의 개발진이 〈도미노스〉의 내용과 디자인을 바꿔 보너스 게임을 만들어 보는 것을 제안한다.

디자인의 주요 부분은 〈마도물어〉의 캐릭터를 활용했고, ‘뿌요’ 캐릭터는 게임의 핵심이 되는 패로 고안됐다. 뿌요 캐릭터는 게임에 등장하는 슬라임 계열의 몬스터로, 귀여운 모습 덕분에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퍼즐 게임의 재미 요소도 개선됐다. 한 줄을 완성하는 〈테트리스〉와 반대되는 상황을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프로그래머 키요베의 말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시스템이었다. 〈테트리스〉가 가로 한 줄을 채우는 식이었다면 〈뿌요뿌요〉는 네 개의 뿌요가 좌우상하 어디든 연결되면 사라지도록 했다. 규칙은 간단했지만 〈테트리스〉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가 탄생했다. 내부에서는 이해하기 조금 어렵지만, 재미만큼은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더해 상대방과 대전하듯 전개되는 스타일과 방해 요소가 추가됐다.

그렇게 완성된 퍼즐게임 〈뿌요뿌요〉는 1991년 10월 ‘MSX2’와 ‘패미컴 디스크 시스템’ 두 가지로 출시됐다. 개발자들의 예상과 달리 게임에 대한 유저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게임을 플레이한 유저의 대부분은 쌓이는 뿌요를 제거하지 못하고 게임 오버됐다. 상대방을 공격하는 재미도, 퍼즐을 쌓아 제거하는 쾌감도 없었다. 연습 모드도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부정적인 평가 속에서 〈뿌요뿌요〉를 눈여겨본 하나의 개발사가 있었다. 바로 아케이드 센터의 제왕이었던 세가였다. 세가는 컴파일 측에 이 게임을 활용해 아케이드 게임을 만들겠다며 라이선스를 요청했고 컴파일은 그에 응했다. 그리고 1992년 10월, 세가가 직접 만든 〈뿌요뿌요〉 아케이드 버전이 출시됐다. 세가는 뿌요의 색상 개수를 여섯 개에서 다섯 개로 줄이고, 연결돼 터지는 연쇄 기능을 추가했다.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1992년은 〈스트리트 파이터2〉의 인기로 아케이드 시장 내 대전 열풍이 일던 시기였다. 대전 시스템과 낙하물 퍼즐이 결합한 〈뿌요뿌요〉의 인기도 함께 치솟았다.

컴파일은 세가 버전의 〈뿌요뿌요〉를 철저히 연구했다 .놓쳤던 부분을 채우고, 새로운 기능을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2년의 준비 끝에 전설의 게임 〈뿌요뿌요2〉가 일본에 출시된다. 이 게임은 현재의 모든 〈뿌요뿌요〉 게임의 체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테트리스〉를 제치고 일본 국민 퍼즐 게임 반열에 올랐다. 기존 세가의 아케이드 버전이 공격 일변도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재미가 있었다면 〈뿌요뿌요2〉는 위기 상황에서도 역전을 노릴 기회를 제공해 다채로운 전략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했다. 거기에 연속 상쇄 시 역동적인 연출까지 더해져 중독적인 재미를 느끼게 했다.
〈뿌요뿌요〉 아케이드 게임 화면 ⓒSEGA
아케이드에는 〈스트리트 파이터2〉 못지않게 많은 기기가 배치됐고 일명 ‘뿌요 전문가’로 불리는 마니아까지 생겨 센터의 이름을 건 대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세가는 출시 전부터 컴파일과 상의해 메가 드라이브 이식 판을 준비했고, 덕분에 가장 먼저 가정용 버전을 선보일 수 있었다. 〈뿌요뿌요2〉는 당시 현존하던 거의 모든 기기로 이식됐고, 한국에는 자막, 음성 한글화까지 이루어진 윈도우 95 버전이 출시돼 큰 인기를 누렸다. 컴파일은 〈뿌요뿌요 2〉의 성공으로, 순식간에 일본 게임 산업을 대표하는 회사로 자리매김한다. 당시 컴파일의 대표 니이타니 마사미츠는 유저들을 위한 일본 전국 대회 ‘바요엔 투어’를 발표하고 직접 유저들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후속작 〈뿌요뿌요 썬〉의 등장 때문이었다. 〈뿌요뿌요 썬〉은 캐릭터의 개성을 강조한 이야기와 연출, 그리고 새로운 기능인 ‘썬’이 추가된 신작이었다. 애니메이션 수준의 그래픽 연출, 방대한 볼륨의 풀 더빙까지, 컴파일의 성공을 증명하는 듯한 호화로운 구성이었다. 그러나 썬 기능은 〈뿌요뿌요 2〉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던 대전 시스템의 재미를 떨어뜨렸다. 게다가 썬 기능은 랜덤 기능에 가까웠다. 유저가 혜택을 예측해서 활용하기 어려웠는데도 승패에 영향을 줬기 때문에 게임을 연구했던 마니아층까지 등을 돌렸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던 대회와 커뮤니티 활동이 약해지면서 순식간에 게임의 인기가 하락했다. 이미 이식작까지 모두 개발해 순차적 출시를 하던 컴파일은 판매량 부진을 겪게 됐다.
〈뿌요뿌요 썬〉 게임 화면 ⓒSEGA
물론 컴파일의 부진만 원인은 아니었다. 돈방석에 앉은 니이타니 대표는 뿌요 테마파크를 짓겠다는 황당한 계획을 낸다. 현실적인 대안이나 다른 방법을 제시할 직원도 부재했다. 컴파일은 1996년부터 1년 사이 무려 300명의 신입 사원을 채용했고, 본업인 게임 개발보다 사무용 소프트웨어 개발, 테마파크 준비 등에 더 많은 자금과 인력을 쏟아부었다. 1997년, 그간 개발 중이었던 〈와쿠와쿠 뿌요뿌요 던전 〉이 연말 성수기에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다른 게임들도 개발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결국, 컴파일은 파산을 막기 위해 1998년 화의 신청에 들어서고, 대규모 구조조정과 함께 자금 확보를 위해 지식 재산권을 매각했다. 컴파일은 〈뿌요뿌요〉만큼은 절대 넘기지 않으려 했으나, 후속작인 드림캐스트용 〈뿌요뿌욘〉까지 실패하자 자금이 완전히 동나버린다. 결국 대표를 제외한 인력 대부분이 회사를 떠났고, 2002년 컴파일은 〈뿌요뿌요〉의 저작권을 세가에 넘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후 〈뿌요뿌요〉는 세가를 통해 명맥을 이어나간다. 2003년 아케이드용으로 등장한 〈뿌요뿌요 피버〉를 시작으로 여러 시리즈가 다양한 플랫폼으로 출시됐다. 15주년과 20주년 기념작에서는 기존 〈뿌요뿌요〉 룰을 모두 탑재해 유저가 선택해 즐길 수 있게 했고, 다양한 이야기 구성과 캐릭터, 그리고 대전의 재미를 살린 연출을 더해 조금씩 인기를 되찾아갔다. 〈뿌요뿌요〉의 등장은 일본 퍼즐 게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 중 하나다. 〈뿌요뿌요〉 이후, 퍼즐 게임에는 규칙 못지않게 캐릭터를 중심에 둔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생각의 전환이 퍼즐 게임의 주인공을 캐릭터로 바꾼 것이다.
 

최후의 한 명을 위한 〈배틀그라운드 〉


1999년 출간된 한 편의 소설이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정부 프로그램 때문에 강제로 외딴 섬에 갇힌 중학교 학생 42명이 최종 한 명의 생존자를 남길 때까지 살육을 강요당하는 내용이었다. 친구 사이에 일어나는 무차별적인 살인과 정부의 연계라는 충격적인 전개는 순식간에 100만 부의 판매량으로 이어진다. 공포 소설의 장인인 스티븐 킹은 이 작품을 “끔찍하게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타카미 코순의 《배틀로얄(Battle Royale)》이 바로 그 작품이다.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곧바로 2000년 후카시쿠 킨지 감독이 영화화를 맡았고, 같은 해 타구치 마사유키가 작화한 만화판 연재가 시작됐다. 소설과 영화, 만화가 모두 큰 인기를 끌었고, 《배틀로얄》의 등장 이후 전 세계는 ‘배틀로얄’ 장르에 요동친다.

《배틀로얄》의 등장 이후 ‘데스 게임(Death Game)’ 장르가 본격적인 시류를 타고 나오기 시작했다. 2002년 방영된 애니메이션 〈가면라이더 류우키〉를 비롯해 2004년 첫 선을 보인 〈쏘우(Saw)〉 시리즈, 2008년 출간된 《헝거 게임(The Hunger Games)》과 인터넷 소설 《소드 아트 온라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정말 배틀로얄 장르를 전면에 두고 그를 전 세계에 알린 작품은 따로 있다. 바로 크래프톤에서 개발, 출시한 게임 〈배틀그라운드〉다. 외딴 섬에 착륙한 100명이 각자 무기와 탈 것을 마련하고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우는 내용의 이 게임은 전 세계 7000만 장 이상이 팔리며 역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게임’ 5위 안에 이름을 올렸다.

이 게임의 성공 비결은 타카미 코순의 《배틀로얄》과 흡사하다. 생존을 위해 무기와 방어구를 찾고 은신해 적들을 기습하거나 반대로 공격대를 구성해 다른 생존자들을 제압하는 식이다. 플레이어들은 어디에 언제든 착륙하고, 무엇이든 파밍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각종 현대식 무기를 조합하고 다른 플레이어를 제압할 수 있다. 압박하듯 줄어드는 필드 제한 요소는 자연스럽게 유저들을 경쟁에 내모는데, 이 역시도 시간에 따라 위치 이동을 강요하는 《배틀로얄》의 규칙과 비슷하다. 유저들은 정해진 시간 내 얼마나 죽이거나 생존하는지에 따라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아바타를 강화해 나갔다.
〈배틀그라운드〉 게임 화면. 크래프톤은 이 게임의 성공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개발사가 됐다. ⓒKRAFTON, Inc.
〈배틀그라운드〉는 ‘가장 빠르게 100만 장이 팔린 스팀 얼리 액세스 게임’을 비롯한 일곱 개의 기네스 기록을 가졌다. 그러나 이 게임의 강렬한 재미는 예상치 못한 문제로 연결된다. 〈배틀그라운드〉는 죽어도 살아나는 다른 슈터 게임과 달리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 편법이라도 써서 승리하고 싶은 마음이 다양한 사건 사고를 불렀다. 가장 심각했던 건 핵 프로그램 사용이었다. 1대 99의 생존 경쟁이 일으키는 압박감과 아슬아슬하게 1위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유저들은 핵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에임 핵(aim hack)을 비롯해 벽을 뚫고 총을 쏘는 식은 큰일도 아니었다. 넓은 섬을 걸어서 몇 분 만에 주파하거나 땅 아래로 들어가 위에 있는 적들을 쉽게 죽였다. 날아다니는 유저도 나왔고 모든 유저를 근접 공격으로만 죽이는 황당한 핵 프로그램도 나와 논란이 됐다. 문제는 핵을 프로게이머나 유명 스트리머까지 사용한 것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중국 일부 프로게이머는 공식 대회에서 핵을 사용해 제재를 받았으며, 대회에 참여한 BJ가 핵을 사용해 대회 시상이 취소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발생했다. 최후의 생존자가 되기 위해 벌이는 사투 속 긴장감과 치열한 공방, 그리고 마지막에 살아남아 ‘치킨’(최종 생존 시 나오는 문구인 “WINNER WINNER CHICKEN DINNER!”)을 받았을 때 몰려오는 안도감과 쾌감은 경쟁 게임은 물론 다른 어떤 게임과 비교할 수 없는 몰입감을 유저에게 안겼다.
[1]
당초 캡콤은 길게 누를수록 강한 공격이 나가는 ‘압력감’ 시스템을 구현하려 시도했다. 〈스트리트 파이터〉에서 손과 발, 두 개에 압력 감지 기능을 넣으려 했으나, 플레이하기 지나치게 어렵다는 판단에 여섯 개의 버튼으로 나뉘게 됐다.
[2]
로그라이크 게임은 한 번의 동작을 하나의 ‘턴’으로 계산하고 이에 따른 결과를 받는 장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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