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게임들
5화

유저를 사수하라, 플랫폼 대전

게임 산업의 성장에서 플랫폼이 가진 의미는 ‘혁신’이었다. 플랫폼이 등장함으로써 더 많은 장르가 만들어질 수 있었고, 각종 주변 기기도 발전하며 게임 산업 전체가 움직였다. 장르의 변화, 기기의 발전은 게임 산업 전체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다양한 플랫폼은 게임이 마니아를 넘어 대중의 곁으로 갈 수 있게끔 만들었다. 플랫폼이 있는 곳에 유저가 모였고, 아케이드 센터는 거실로 이동했다. 가정에서 즐길 수 있는 게임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과도 같았다. 초기의 가정용 게임기가 아케이드 게임을 이식받는 수준이었다면, 시간이 지나며 아케이드 게임을 능가하는 작품도 나타났다. 가정용 게임기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며 산업의 중심은 아케이드에서 가정용 게임기로 넘어갔다. 이제 거실에는 PC 와 함께 게임기가 놓였다. 이 시기부터 게임만으로도 먹고 사는 거대 기업들이 등장한다.

가정용 게임기는 게임 기업의 경쟁 구도를 본격화했다. 닌텐도와 세가,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는 라이벌이 되면서 게임과 플랫폼, 모두에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9세대까지 이어진 경쟁에서 많은 기업은 사업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닌텐도와 소니, 마이크로소프트는 지금까지 남아 유저들을 즐거운 경쟁 속으로 이끌고 있다. 플랫폼은 단순히 게임을 플레이하는 도구의 수준을 넘어선다. 하나의 플랫폼은 게임을 둘러싼 동질감과 유대감을 만들기도 하고, 덕분에 거대한 커뮤니티로 이어지기도 한다. 동질감으로 뭉친 커뮤니티는 기업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된다. 게임기가 아닌, VR과 스마트폰도 그렇다. 유저는 곧 플랫폼이고, 플랫폼은 곧 유저다. 이 원동력이 게임 산업 전체의 발전과 변화를 추동했다.

 

콘솔 경쟁에서 엇갈린 세가·소니·닌텐도의 운명


1992년 세가는 ‘메가 드라이브’의 미국 진출 성공을 발판 삼아 차세대 게임기 개발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트 BIT[1] 싸움이 경쟁의 키워드가 될 것으로 봤던 세가는 32비트 게임기를 빠르게 출시해 게임기 시장 내의 입지를 키우고자 했다. 그 중심은 세가의 여섯 번째 게임기인 ‘새턴’이었다. 새턴 개발의 핵심은 16비트 시대와의 작별이었다. 새턴 개발 프로젝트는 기존 게임기와의 호환성을 높이는 방향 대신 성능을 차별화하는 것에 집중했다. 롬 팩 대신 CD-ROM을 장착했고 히타치와 협력해 슈퍼H RISC CPU를 장착했다. NEC의 SDRAM과 도시바 플래시 메모리, 그리고 비디오 칩세트 VDP1도 추가됐다. 이렇게 완성된 프로토타입은 세가 미국 지사로 보내졌는데 이를 본 미국의 사업가 토머스 칼린스키(Thomas Kalinske)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는 2D 중심의 게임기 성능과 까다로운 개발 구조에 질색하며 플레이스테이션 개발에 참여한 3D 그래픽 전문 회사 ‘실리콘 그래픽스’와의 기술 제휴를 제안한다. 하지만 세가 본사는 지금도 충분하다는 견해와 함께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토머스는 재차 소니와의 협업도 제안했지만 같은 이유로 무산됐다. 이 결정은 세가의 운명을 뒤바꾼다.

세가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소니는 차근차근 플레이스테이션(PlayStation)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진행은 쉽지 않았다. 가전제품 산업에서 최고에 가까운 명성을 누리던 소니였기에 게임기 개발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게임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던 쿠타라기 켄은 임원들을 설득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가끔은 자존심을 건드는 형태로, 어떨 때는 철저한 비즈니스처럼 포장했다. 가정용 게임기에서 3D 그래픽은 구현하지 못할 것이라는 여론에 맞서 쿠타라기는 소니가 3D 그래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과를 끊임없이 강조했다. 임원들은 “절대 패배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고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를 승인한다.

소니가 가장 먼저 꺼낸 카드는 CPU 개발을 위한 ‘LSI로직스’와의 계약이었다. 1993년 당시의 계약서에는 140억 엔이라는 금액이 적혔고, 생산 예정인 칩 수량은 무려 100만 대였다. 실패 시에는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의 큰 계약이었기 때문에 플레이스테이션은 회사에서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프로젝트가 됐다. 쿠타라기가 다음으로 선택한 카드는 서드 파티 모집이었다. 게임기가 나오기 전 충분한 게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유명한 개발사는 거의 모두 직접 만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어떤 기업은 소니가 게임기 사업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충고하기도 했고 한 업체는 “300만 대를 팔면 그때 다시 오라”는 막말을 던지기도 했다. 냉소적인 반응이었지만 개발사가 그런 반응을 보일 이유는 많았다. 3D 그래픽은 그때만 해도 구현하기 어려운 고급 기술이었고, 개발 인력도 하늘의 별 따기처럼 구하기 어려웠다. 판매된 적도 없는 게임기를 위해 3D 게임을 개발한다는 건 개발사 입장에서도 난이도가 매우 높은 모험과 같았다. 하필 그 어려운 걸 게임기 개발에 처음 도전하는 소니가 한다고 하니 믿음이 안 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래도 몇 군데는 쿠타라기의 제안에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대표적인 곳이 남코였다. 세가와 아케이드 게임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던 남코는 플레이스테이션의 성능과 가성비에 만족감을 드러내며 제안을 수락한다. 소니가 향후 남코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펼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코는 3D 그래픽이 게임의 미래라고 생각해 개발 인력을 확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3년 8월 ‘오락 기기 박람회’에서 충격적인 격투 게임 〈버추어 파이터〉가 처음 공개됐다.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캐릭터들이 벌이는 사실적인 격투는 관계자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그전까지 소니를 무시하던 개발사들이 생각을 바꿔 적극적으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프로젝트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도 이 이후였다. 쿠타라기는 곧바로 플레이스테이션 시연회를 준비한다. 1993년 10월 소니 본사 대강당에서 지원된 시연회는 프로토타입 게임기 네 대로 진행됐는데 현장에는 소니 직원들 외에도 여러 개발자가 참석했다. 시연이 시작되고 화면에는 3D 그래픽으로 구현된 커다란 ‘티라노사우루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공룡의 모습에 현장은 찬물을 끼얹진 듯 조용했다. 영상을 본 개발자들은 너무 놀라 소리조차 낼 수 없을 정도였다.

소니의 시연회를 본 세가 역시 급히 3D 게임기 개발에 착수한다. 결과적으로 3D 게임기 경쟁의 포문은 세가가 연다. 1994년 11월 22일 일본에 출시된 ‘세가 새턴’은 론칭 게임 〈버추어 파이터〉와 함께 빠르게 매진됐다. 한 달도 안 돼 50만 대가 팔렸고, 200만 대까지도 순탄하게 이어졌다. 후속 게임까지 연달아 출시되자 승기는 세가 쪽으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시장에서 앞서 나가자 SNK 같은 서드 파티들이 새턴으로 게임을 출시하겠다고 예고했다. 특히 자사의 게임기 외에는 절대로 이식하지 않던 SNK가 〈아랑전설3〉과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5〉를 새턴으로 이식하겠다는 발표는 그해 최고의 소식에 오를 정도였다.

세가가 승리에 취해 있을 때 소니는 더욱 치밀하게 플레이스테이션 출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1994년까지 계약을 맺은 서드 파티는 200여 개였는데 소니는 이들이 원활하게 게임을 개발할 수 있도록 라이브러리와 기술을 지원했다. 개발 킷으로 불리는 장비도 150만 엔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제공했는데 이는 빡빡한 개발 환경과 비싼 개발 킷과 같은 악조건을 가진 세가 새턴과 비교되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1994년 12월 3일,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일본에 출시됐다. 초기 물량은 10만 대였다. 그날 쿠타라기는 일찍 서브컬처의 성지, ‘아키하바라’로 이동해 판매 상황을 직접 확인했다. 미디어의 소극적인 반응과 다소 약했던 론칭 라인업이 불안 요소였지만 현장 반응은 예상외로 뜨거웠다. 이미 게임 잡지나 PC 통신을 비롯한 커뮤니티에 퍼진 입소문 덕에 많은 유저가 새벽부터 매장 앞에서 줄을 서서 플레이스테이션을 구매했다. 준비된 물량이 모두 소진되는 데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그제야 소니 임원진도, 쿠타라기도 모두 안심하고 퇴근할 수 있었다.

1996년, 또 하나의 경쟁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닌텐도 64’였다. 〈슈퍼마리오 64〉를 내세운 닌텐도는 플레이스테이션과 함께 3D 게임 시장을 호령했다. 소니는 같은 해 3D 그래픽으로 개발된 캡콤의 공포 게임 〈바이오하자드(Biohazard)〉와 남코의 〈철권2〉를 선보였는데 두 게임 모두 대박을 터뜨리며 주목받는다. 콘솔 경쟁이 본격화하자 이때부터 소니와 세가는 가격 인하와 게임 끼워 주기와 같은 여러 방법을 동원한 치킨 게임에 들어간다. 소니와 세가 모두 미국 진출에 성공한 상황이었기에 안팎으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일본에서는 여전히 세가가 강세였지만 미국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조금씩 앞서갔다. 세가는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고, 소니는 고삐를 당겨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경쟁이 반환점을 돈 시점이었다.
플레이스테이션 외형 사진. 당시 게임기들은 흰색이나 회색을 많이 선택했다. 검은색 게임기는 망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Sony
이때 소니와 닌텐도, ‘스퀘어(現 스퀘어에닉스)’ 사이에서 논란이 될 사건이 벌어진다. 기대작 〈파이널 판타지7〉의 이적 사건이었다. 스퀘어는 이 게임을 닌텐도64로 개발, 출시하기로 닌텐도와 협의를 마친 상황이었으나 롬 팩의 시스템 문제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었다. 이때 소니가 닌텐도 투자 변제와 라이선스 비용 상향 조정, 스퀘어 유통망 독점 사용 같은 카드를 들고 와 게임을 가로챘다. 스퀘어는 닌텐도에 원한을 사게 됐고 소니 역시 닌텐도 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게다가 스퀘어의 이적은 많은 서드 파티의 닌텐도 이탈을 부추겼고 닌텐도64로 개발 중이던 게임이 중단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가뜩이나 라인업이 부족했던 닌텐도64는 차세대 게임기 경쟁에서 중도 탈락했다. 이제 싸움은 세가와 소니 전면전으로 넘어갔다.

한편 세가 내부의 문제는 점차 심화했다. 가장 큰 문제는 높은 가격이었다. 치킨 게임으로 흘러가던 경쟁에서 제품 원가가 낮았던 플레이스테이션에 비해 세가 새턴의 비용은 매우 비쌌는데 판매를 할 때마다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소극적인 마케팅으로 연결됐다. 게임 판매에서 나오는 라이선스 비용으로 게임기 홍보가 감당되지 않는 수준까지 흘러간 것이다. 세가는 비용 투자 대신 아이디어로 경쟁하려 했다. 그때 나온 것이 마스코트인 ‘세가타 산시로’다. 1997년 말 광고에서 처음 등장한 세가타 산시로는 〈가면라이더〉의 혼고 타케시로 유명한 배우 후지오카 히로시를 기용, “세가 새턴 해라!”라는 문구로 화제를 모은다. 엽기적이고 파격적인 광고는 유저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고 세가 새턴의 판매량도 덩달아 오른다. 여기에 〈사쿠라대전〉과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를 대거 선보이며 마니아층을 유입시킨다.

하지만 1997년, 스퀘어가 플레이스테이션을 통해 출시한 〈파이널 판타지7〉의 존재감은 세가와 소니의 경쟁을 맥없이 끝내 버릴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래픽부터 이야기와 음악, 게임성까지 모든 부분에서 역대 최고급 완성도를 보인 이 게임의 등장은 세가 새턴을 궁지로 몰아세우며 차세대 게임기 경쟁에서 소니의 완승을 이끌었다. 여기에 미국 내 세가 새턴의 처절한 판매량까지 더해지자 세가는 더 버티지 못하고 패배를 인정한다. 최종적으로 세가 새턴은 전 세계 926만 대를 팔았다. 일본 내에서 574만 대라는 나쁘지 않은 성적표가 있었지만 전 세계 시장에서는 완패했다. 메가 드라이브가 일본에서 패배했지만 해외 시장에서 2700만 대 이상 팔린 것을 고려하면 뼈아픈 결과다.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1997년 500만 대를 가볍게 넘겼고 2004년까지 1억 대 넘게 판매됐다. 게임 업계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파이널 판타지 7〉 게임 화면 ⓒSquare Enix
플레이스테이션의 아성은 대단했다. 전 세계 시장을 석권하며 사실상 일인자로 군림했고 막강한 서드 파티를 바탕으로 유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경쟁자들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소니는 자신들이 거둔 첫 번째 승리가 운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2를 무조건 성공시켜야 했다. 그 사이 세가는 ‘드림캐스트’를 선보인다. 압도적인 성능과 인터넷 연결을 활용한 온라인 기능, 그리고 〈버추어 파이터3〉와 같은 대작 라인업은 유저들의 선택을 끌어 낸다. 소니는 긴장했다. 세가는 여전히 저력 있는 개발사였고 가정용 게임기의 오랜 강자였다. 세가 새턴의 실패를 뒤집겠다는 임원진의 노력으로 탄생한 드림캐스트가 쉽게 무너질 것 같진 않았다.

다급해진 소니는 차세대 게임기 개발 정보를 미디어를 통해 흘린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조금씩 발전하던 시기에 이 수단은 제대로 먹혀 들었다. 특히 DVD 매체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DVD 영상물을 재생할 수 있다는 지점은 좋은 홍보 포인트였다. 시간을 번 소니는 본격적인 게임기 양산 준비에 들어간다. 초반에는 도시바(TOSHIBA)의 차세대 칩세트의 납품이 쉽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플레이스테이션2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에 시설 확대까지 감행했다. 이미 출시 전부터 화제를 모으고 있었기에 초기 물량은 200만 대로 책정했고 해외 진출을 위한 추가 생산도 빠르게 들어갔다.

2000년 3월 4일 새벽부터 일본 아키하바라에는 플레이스테이션2 구매를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섰다. 론칭 게임의 수는 다소 부족했지만, 유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장에 잡힌 물량 100만 대가 소진되는 데 한 달도 채 안 걸렸다. 하지만 게임 가뭄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이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건 론칭 게임의 뛰어난 수준 때문이었다. 격투 게임 〈철권 태그 토너먼트(Tekken Tag Tournament)〉와 〈데드 오어 얼라이브2(Dead or Alive2)〉, RPG 게임인 〈드래곤 퀘스트7〉, 〈파이널 판타지9〉, 〈테일즈 오브 이터니아〉, 전략 게임 〈슈퍼로봇 대전 알파〉와 같은 인기 시리즈의 최신작이 오랜 기간 사랑받으며 게임 보릿고개 같았던 초반 일 년을 무사히 넘기게 된다.
 
플레이스테이션2 외형 ⓒSony
그렇게 맞이한 2001년, 캡콤에서 출시한 〈귀무자〉가 역대 최고급 판매량을 기록하자 플레이스테이션2 판매량도 덩달아 상승한다. 〈귀무자〉는 실제 배우가 등장해 큰 화제를 모았다. 전작보다 높아진 난도의 개발 환경 때문에 개발이 지연됐던 게임들도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그란 투리스모3(Gran Turismo 3)〉를 비롯한 명작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판매량은 수직 상승했고 2002년 7월 일본에서만 1000만 대가, 같은 해 9월에는 전 세계 4000만 대가 판매된다. 지금까지 어떤 게임기도 하지 못한 업적을 이제 막 두 번 게임기를 내놓은 소니가 이룬 것이다. 압도적인 성과 앞에 세가는 게임기 사업 철수를 선언, 완패를 인정했다.

세가의 철수 이후, 곧바로 두 개의 게임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와 닌텐도의 게임큐브다. 소니는 미국 시장에서 엑스박스와 경쟁을 펼쳐야 했고, 일본에서는 게임큐브와 맞서야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압도적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미국 서드 파티와 함께 블록버스터급의 대형 게임을 쏟아냈고, 게임큐브는 앙숙이었던 스퀘어와 화해하며 일본 유저 맞춤형 게임을 대거 내놨다. 하지만 이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아성은 후발 주자들이 넘어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경쟁자를 3년도 안 돼 물리친 소니는 전 세계 시장을 호령하며 게임기 산업 왕좌에 오른다. 플레이스테이션2는 2012년 기준으로 약 1억 5768만 대의 판매를 기록했다. 휴대용 게임기까지 포함하면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따라온 닌텐도DS가 있지만 이를 현재까지 이긴 게임기는 없다. 동작 인식을 내세운 닌텐도의 게임기 ‘위Wii’도 1억 대 넘게 판매됐지만, 플레이스테이션2를 이기진 못했다.

엄청난 업적을 세운 플레이스테이션2는 우리나라에서 더욱 특별하다. 소니가 직접 지사를 내고 유통한 첫 번째 게임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시장에 맞춰 현지화가 이루어진 다양한 라인업이 함께 출시돼 큰 화제를 모았다. 소니가 시작한 게임기 직접 유통은 다른 게임기들로도 이어졌다. 이는 우리나라의 게임기 열풍을 주도했고, 게임을 잘 모르는 일반인도 관심을 가질 정도의 많은 뉴스를 쏟아 냈다. 플레이스테이션2는 2004년, 출시 2년 만에 100만 대 판매를 넘어선다. 하지만 흥행은 아쉽게도 3년 정도 짧은 시간 내 막을 내렸다. 피시방 문화의 확산과 고성능 PC의 가격 인하로 인해 상당수의 게임 유저가 온라인 게임에 빠져든 탓이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흥행은 게임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장면이다. 소니의 압도적 성과는 여러 경쟁사를 자극했고, 이는 게임 시장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미국 시장 재탈환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고, 닌텐도는 소니가 놓친 휴대용 게임기 시장을 공략한다. 틈새시장을 노린 고화질의 PC 게임과 온라인 기반의 게임들도 출현하며 게임 시장은 무한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다시 미드웨이로, 엑스박스


아타리 쇼크로 무너진 미국 게임 산업은 1990년대 중반, 제법 회복세를 맞는다. 그럼에도 전 세계 게임 시장은 닌텐도와 세가, 소니의 활약에 이끌려 가는 추세였다. 미국은 자신들을 대표할 게임기 하나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쳐야 하는 상황에 가까웠다. 이 시기, 마이크로소프트는 PC 운영 체제인 윈도우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다음 목표는 윈도우를 기반에 둔 거실용 종합 엔터테인먼트 허브 장치였다. 게임기보다는 PC처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기기에 게임이 추가되는 형태였다. 개념상 현재의 스마트폰과 비슷한 형태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야망은 거실 문화를 완전히 뒤바꾸는 것에 있었다. 1999년 3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는 게임기로 전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소니 그룹의 신형 기기 발표회를 접하게 된다. 이때 공개된 기기가 바로 플레이스테이션2다. 게임 외에도 멀티미디어 기능과 주변 기기를 이용한 온라인 기능까지, 어떻게 보면 마이크로소프트가 꿈꾸던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기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소니가 내던진 한 마디가 빌 게이츠의 심기를 건드렸다.

“컴퓨터를 새롭게 정의한 플레이스테이션2는 PC의 가장 큰 경쟁자가 될 것이다”

빌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충분한 가능성을 지녔다고 판단했다. PC의 5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접할 수 있는 플레이스테이션2가 전 세계 시장에 보급되면 전통적인 PC 시장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마이크로소프트 내부에서는 ‘다이렉트X(DirectX)’ 개발팀과 신입 엔지니어들이 모여 하나의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일명 ‘다이렉트 박스’로 불린 프로토타입 게임기였다. 이들은 예산을 배정받기 위해 직접 만든 프로토타입을 들고 가 퍼블리싱 사업 담당자에게 보여 줬다. 나쁘지 않은 방향이었으나 게임만 가능하다는 지점 때문에 문턱을 넘지 못했다. 마이크로소프트 내부에는 이미 종합 엔터테인먼트 허브 장치를 개발 중인 팀이 있었다. 휴대용 기기 운영 체제를 선보이며 시장에서 호평을 받던 윈도우CE 팀도 그 분야를 노리고 있었다. 팀 사이에 경쟁이 붙자 퍼블리싱 팀은 최종 결정을 빌에게 맡긴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Steve Ballmer) 앞으로 온 세 팀은 각각 자신들의 제품에 대한 시연과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게임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임원진의 판단에 따라 ‘다이렉트 박스’가 최종 선정됐다. 프로젝트 이름은 ‘미드웨이(Midway)’였다. 태평양 전쟁 중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았던 전투인 미드웨이 해전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프로젝트 미드웨이는 똘똘한 엔지니어들의 개발력과 상상력이 결합해 빠르게 발전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개발팀은 처음부터 게임기에 윈도우를 넣을 수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PC에 맞춰진 운영 체제는 게임을 구동하기엔 너무 무겁고 복잡했다.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빌을 비롯한 임원진에 거짓말을 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빌은 엄청나게 분노했다. 개발팀 전체를 불러 자신과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를 모독했다고 소리치며 날뛰었다. 개발팀 중 한 명이 윈도우를 게임기에 넣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했지만 격노한 빌은 심한 말로 응수했다. 회의실에는 빌의 분노만 울려 퍼질 뿐,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프로젝트 미드웨이는 내전으로 막을 내릴 판이었다. 그때 한 임원이 작게 한마디를 했다.

“그럼 소니는 어쩌죠?”

날뛰던 빌도 한숨을 쉬던 스티브도, 그리고 내내 욕만 듣고 있던 개발팀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소니가 플레이스테이션2로 거실을 차지하고 이 기기가 컴퓨터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재차 말이 이어지자 빌은 뛰던 걸 멈추고 의자에 앉았다. 빌은 스티브를 향해 “그러게 소니를 어쩌지…”라고 읊조렸다. 스티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다이렉트 박스가 없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소니를 넘어설 수 없었다. 냉정함을 되찾은 빌은 아까의 일에 대해 사과한 후 프로젝트 미드웨이를 진행을 수락했다. 스티브는 개발팀에게 프로젝트 전권을 넘기고 원하는 모든 걸 지원해 주겠다고 덧붙인다. 일명 ‘밸런타인데이 학살(St. Valentine`s Day Massacre)’[2]로 불린 이 마라톤 회의는 마이크로소프트 내부에서도 매우 특이한 경우로 기록되고 있다.

다시 정상화된 프로젝트 미드웨이는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개발을 이어 나간다. 넉넉한 예산과 충분한 팀원이 더해지자 개발은 속도를 냈고 1년을 조금 넘기는 시점에 프로토타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름은 엑스박스(Xbox)로 결정됐다. 플레이스테이션2가 출시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3월 10일, 게임 개발자 컨퍼런스 GDC에 참석한 빌은 대중에게 처음 엑스박스를 공개한다. 모든 관심이 엑스박스로 쏠렸다. 다음 스텝은 영업 팀의 일이었다. 영업 팀은 소니의 성공 사례를 고려해 서드 파티 확보에 나섰다. 많은 인력이 다수의 게임사를 만나 엑스박스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필요하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인수도 서슴지 않았다.

이때 인수된 대표적인 업체가 〈헤일로〉를 개발한 ‘번지 스튜디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를 개발한 ‘앙상블스튜디오’ 등이다. 일본 쪽 서드 파티 참여도 적지 않았다. 세가를 비롯해 ‘테크모(現 코에이테크모)’, 캡콤, 남코가 엑스박스로 인기 게임을 이식하고, 엑스박스 독점 게임 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넉넉한 자금 지원이 만들어 낸 풍경이었다. 준비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빌은 2001년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 전자제품 박람회(CES·The International Consumer Electronics Show)에서 엑스박스 출시일과 독점 게임 〈헤일로: 전쟁의 서막〉과 〈데드 오어 얼라이브3〉를 시연형태로 공개했다.

그리고 2001년 11월 15일, 마침내 프로젝트 미드웨이 엑스박스가 미국에 출시된다. 아타리 쇼크 이후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게임기 경쟁의 시작이었다. 론칭 게임 〈헤일로: 전쟁의 서막〉은 순식간에 미국 거실을 점령하며 무려 500만 장이 팔린다. 타 게임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그래픽 처리 능력을 바탕으로 편의성을 높인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을 직접 저장해 불러내는 내장 HDD가 주는 매력은 거부할 수 없었다. 엑스박스는 미국 시장을 빠르게 평정했다. 하지만 미드웨이라는 명칭이 아까울 정도로 일본 시장에선 참패했다. 플레이스테이션2의 아성도 높았지만 기기 자체가 가진 투박함이 문제였다. 커다란 컨트롤러는 아시아 사람들이 쓰기엔 너무 컸고, 본체 역시 비대했다. 내부 DVD 로더에는 디스크가 긁히는 문제가 있었으나, 이에 대한 대처도 미흡했다. 일본에서 최종 판매량은 50만 대였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엑스박스의 성패는 결국 대개 ‘실패작’으로 논해진다. 제품을 선보인 이후 마이크로소프트는 매해 적자를 기록했으며, 일본을 비롯해 여러 아시아 시장에서 기록한 참패도 실패작 이미지에 한몫했다.
엑스박스 외형 ⓒMicrosoft
그렇다고 엑스박스의 성과를 무시할 순 없다. 서양을 대표하는 게임기의 탄생만으로도 엑스박스는 많은 개발자의 관심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 중심으로 흘러가던 콘솔 게임 시장의 주도권을 빼앗을 수 있었다. 개발 환경이 PC를 베이스로 했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1000여 개의 게임이 나올 수 있었다. 또한 온라인 멀티플레이가 중심이 되는 서비스는 PC의 전유물에 가까웠던 인터넷 기능을 활용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주목받았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는 후속 기기 ‘엑스박스360’을 출시한다. 엑스박스360은 기존 기기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게임 패드에 최적화된 인터페이스와 엑스박스로 출시된 게임을 모두 지원하는 하위 호환 기능, 쾌적한 멀티플레이, 동작 인식과 같은 주변 기기로의 확장성까지 더해져 많은 사랑을 받는다. 누적 판매량은 8600만 대 이상으로 전작을 뛰어넘었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차세대 게임 경쟁에서도 한발 앞서나갔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전작의 실패 요인을 극복하기 위해 경쟁 게임기보다 빠르게 제품을 출시하겠다는 목표를 잡는다. 덕분에 엑스박스360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3과 닌텐도 위보다 빠르게 출시될 수 있었고, 내부 확장성을 위한 펌웨어 형태로 개발돼 월등한 소프트웨어 성능을 자랑했다. 패치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해 운영 체제의 안정성과 확장성 모두를 챙긴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는 운영 체제 덕분에 엑스박스 360는 긴 수명과 높은 판매량을 유지할 수 있었다.

 

휴대용 게임기 몰락의 역사


닌텐도가 본격적인 거치형 게임기를 선보이기 전 내놓은 기기 ‘게임&워치(GAME & WATCH)’는 1980년 일본에 출시됐다. 당시 5800엔으로 나온 이 제품은 닌텐도를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절대 강자로 만들었다. 게임기에는 한 개의 게임이 내장돼 있었고, 정해진 동작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단순함이 특징이었다. 저렴한 가격 덕분에 누구나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었고, 중독성 있는 명작들이 나와 꾸준한 인기를 유지했다. 총 65종의 게임이 출시됐고, 전 세계 4340만 대가 팔렸다. 닌텐도는 당시 게임&워치의 성공으로 모든 부채를 털어내고 40억 엔의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1982년에는 662억 엔의 매출을 올려 다양한 신규 사업의 발판을 마련했다. 게임&워치는 닌텐도의 재정 상황뿐 아니라 게임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요소가 바로 ‘십자 버튼’ 도입이다. 게임&워치용 〈동키콩〉에서 처음 반영된 이 기능은 엄지 하나로 네 방향을 조작할 수 있도록 해 이후 나온 수많은 게임기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이를 능가하는 수준의 휴대용 게임기는 닌텐도의 ‘게임보이(GAME BOY)’ 이전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가정용 게임기가 겨우 발전하던 시기였고 작은 크기의 게임기를 개발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임기를 들고 돌아다니며 어디서든 게임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익숙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1989년, 카트리지 방식의 게임보이가 출시된 이후에는 이와 유사한 스타일의 휴대용 게임기들이 나와 본격적인 경쟁을 펼쳤다. 게임 산업의 문제아 아타리도 ‘아타리 링스(ATARI LYNX)’라는 제품을 1989년 9월 출시했고 닌텐도의 영원한 라이벌인 세가는 1990년 10월 ‘게임 기어(GAME GEAR)’를 내놨다. NEC도 같은 해 PC 엔진의 휴대용 버전인 ‘PC 엔진 GT’를 선보였다.
게임보이 외형 ⓒNintendo
이 시기는 슈퍼 패미컴, 메가 드라이브 등의 가정용 게임기가 전 세계 거실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던 시기였다. 휴대용 게임기 시장의 경쟁은 크지 않았다. 아케이드 게임, PC 게임, 가정용 게임기와 달리 휴대용 게임기의 점유율은 통계에 안 잡힐 정도로 매우 낮았다. 자연스레 이 시장을 위해 경쟁하려는 업체도 적었다. 전체 유저 수가 적었기 때문에 게임기가 조금만 불안정해도 곧바로 무너졌다. 세가의 게임 기어는 게임보이의 단점인 흑백 화면을 컬러로 바꿔 내놓았다가 참패했다. AA 배터리를 무려 여섯 개나 필요로 했지만 겨우 세 시간에서 네 시간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아타리 링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배터리를 순식간에 방전시켜버리는 무지막지한 백라이트와 LCD 기능 때문에 휴대용이라는 장점은 유명무실해졌다. 성능은 좋았지만, 가격도 게임보이보다 두 배 이상 비쌌고 양손에 꽉 차게 들어오는 크기는 휴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타리 링스는 후속작인 아타리 링스2까지 포함해 300만 대의 판매를 기록하는 것에 그쳤다. PC 엔진을 그대로 휴대용 기기로 이식한 PC 엔진 GT와 LT 모두 참패했다. 일본에서만 출시된 이 게임기는 PC 엔진 게임을 휴대용 게임기에서 그대로 즐길 수 있었지만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구동 시간, 휴대용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무게, 그리고 4만 4900엔이라는 엄청난 가격으로 논란이 됐다. 이 가격이면 게임보이 네 대를 살 수 있었다.

게임보이가 휴대용 게임기 경쟁에서 앞서 나가자 다음 세대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한 개발사들의 시도가 이어진다. 거치형 게임기에서 밀려 게임만 만들던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SNK’의 ‘네오지오 포켓(NeoGeo Pocket)’과 반다이의 ‘원더스완(WonderSwan)’은 게임보이에 대항하기 위해, 게임보이를 철저히 벤치마킹했다. 반다이가 내놓은 원더스완은 게임보이가 가진 특성에 맞춰 성능은 올리고 사용 시간은 최장으로 나오도록 만들었다. AA 배터리 한 개만 넣어도 무려 30시간 이상 사용할 수 있었다. 성능은 좋았으나 시점이 좋지 못했다. 이미 게임보이를 통해 컬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상황에서 흑백 화면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2000년 9월에야 원더스완 컬러가 출시된다. 이에 맞춰 〈파이널 판타지1·2〉를 이식해 제법 인기를 끈다. 두 개의 기기를 합쳐 일본 내수에서만 155만 대의 판매량을 올린다. 그러나 인기도 잠깐, 이 제품이 나온 지 석 달 후 닌텐도가 ‘게임보이 어드밴스(Game Boy Advance)’를 출시해 원더스완의 앞길을 막았다. 결국 닌텐도를 이겨 내지 못한 반다이는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한다.

닌텐도가 내놓은 게임보이 어드밴스는 게임보이 이후 대히트를 다시 기록한 기기였다. 슈퍼 패미컴의 성능보다 더 좋은 수준을 휴대용으로 즐길 수 있게 한 점이 컸다. 저렴한 개발 비용과 충분한 2D 그래픽 처리 능력은 많은 서드 파티의 선택을 끌어 냈고, 〈역전재판〉이나 〈디지몬 배틀 스피릿〉, 〈록맨 제로〉 시리즈, 〈메트로이드〉 시리즈, 〈슈퍼로봇대전〉 시리즈, 〈파워프로〉 시리즈와 같은 인기 게임을 대거 배출했다. 덕분에 대규모의 마니아층도 형성됐다. 게임보이 어드밴스 시리즈는 2010년 5월, 단종 이전까지 무려 8151만 대가 팔렸다.

휴대용 게임기의 최강자에 있던 닌텐도는 방심하지 않았다. 2002년부터 차세대 휴대용 게임기 개발에 큰 비용을 투자하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새롭게 취임한 이와타 사토루 사장이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첫 번째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듀얼 스크린과 감압식 터치 스크린이 탑재된 독특한 제품, 닌텐도 DS였다. 당시 소니도 휴대용 게임기 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쿠타라기 켄은 제조 공정 확대로 여유가 생긴 공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새로운 프로젝트는 플레이스테이션 출시 10주년을 겨냥한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PSP·PlayStation Portable)’ 개발이었다. 닌텐도DS는 2004년 11월 21일,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은 같은 해 12월 12일 출시됐다. 한 달 사이, 차세대를 장악한 휴대용 게임기가 나란히 등장했다.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는 이미 밀려난 닌텐도였지만, 휴대용 게임 시장에서의 닌텐도는 수십 년간 무수한 경쟁 상대를 퇴출한 챔피언과 같았다.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 외형 ⓒSony
닌텐도와 달리, 소니는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 처음 발을 들이는 처지였다. 그래서 서양에서 큰 성공을 거둔 자사 제품명을 마케팅 문구에 넣었다. 소니는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을 공개하며 ‘21세기의 워크맨(Walkman)’을 표방한 제품이라고 선전했다.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였지만, 당시 소니는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평정했기 때문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든든한 서드 파티의 명작 게임과 관련한 게임을 계속해 출시할 수 있으니, 이로써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성능과 사양 면에서는 소니가 압도했다.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의 성능은 플레이스테이션2를 휴대용으로 만든다는 차원에 집중했다. 3D 게임을 구동할 수 있었고, 음악과 영상 재생부터 웹 브라우저 이용과 같은, 멀티미디어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휴대기기에 특화된 광학 매체 UMD(Universal Media Disc)로 게임뿐 아니라 비디오 판매에도 나서는 등 획기적인 사업 전략을 보인다.

닌텐도DS의 무기는 오직 게임이었다. 대신 이번에는 방향성이 조금 달랐다. 마니아들을 위한 게임보다는 대중에 특화된 게임들을 다수 꺼내 들었다. 〈닌텐독스(Nintendogs)〉와 〈매일매일 DS두뇌트레이닝(Brain Age: Train Your Brain in Minutes a Day!)〉은 쉬운 접근성과 간단한 게임 요소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닌텐도가 본격적으로 마니아가 아닌 대중을 공략한 시점도 이때부터다. 그렇게 시작된 닌텐도와 소니의 첫 맞대결은 닌텐도의 압승으로 끝났다. 닌텐도DS는 1억 5402만 대가 팔렸고, 플레이스테이션 포터블은 그 규모의 절반을 조금 넘는 8200만 대의 판매를 올렸다. 닌텐도DS는 PSP보다 그래픽과 처리 능력에서 뒤처졌지만,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을 강조했다. 차세대 휴대용 게임기 경쟁은 서로의 강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닌텐도는 더 나은 게임 플레이를 위한 3D 화면과 독특한 플레이를 유도하는 카메라, 그리고 한층 좋아진 터치 기능과 입력 체계를 바탕으로 〈마리오 카트7〉과 〈젤다의 전설 무쥬라의 가면 3D(The Legend of Zelda: Majora’s Mask 3D)〉, 〈몬스터 헌터4 (Monster Hunter4)〉와 같은 인기 시리즈를 내놨다. 소니의 후속 기기 ‘PS비타’는 멀티미디어 부분을 더욱 확대하고 게임 플레이에서도 뛰어난 수준의 3D 그래픽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카메라를 이용한 AR(Aaugmented Reality·증강 현실)과 전·후면 터치를 활용한 이색적인 조작 요소는 휴대용 게임기가 가진 조작의 한계를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인기 게임을 휴대용 게임기에 이식해 기존의 마니아층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경쟁에 나섰다.
닌텐도DS 외형. 2개의 화면을 이용한 게임성 때문에 확실하게 차별화가 됐던 휴대용 게임기. 국내에서도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Nintendo
하지만 승리는 이번에도 닌텐도에게 돌아갔다. 닌텐도 3DS는 2020년 기준으로 약 7587만 대가 팔렸는데 비타는 약 1600만 대로 추정하고 있다. 승부를 가른 수는 가격이었다. 3DS는 우리나라에서 16만 원에 팔렸지만, PS비타는 24만 8000원이었다. 여기에 필수 주변 기기인 메모리카드를 합쳐 구매하면 40~5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이 돈이면 당시 유명했던 가정용 게임기 두 대를 살 수 있었다. 자잘한 버그와 프리징 문제도 판매량에 영향을 줬다. 결국 소니는 PS비타를 끝으로 휴대용 게임기 시장에서 철수하게 된다. 닌텐도는 이후 거치형과 휴대용 게임기를 합친 ‘닌텐도 스위치(Nintendo Switch)’를 내놓으며 왕좌를 지키고 있다.

현재 휴대용 게임기 시장은 스마트폰으로 완전히 재편된 상황이다. 스마트폰의 대중화는 소니를 비롯한 여러 개발사가 휴대용 게임 시장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마트폰에서 무료로, 고화질의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구매를 해야만 즐길 수 있는 휴대용 게임기의 수요가 눈에 띄게 줄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휴대용 게임기가 주는 매력은 살아 있다. 닌텐도 스위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언제 어디서든 버튼이 주는 조작의 물성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휴대용 게임기가 안성맞춤이다. 지금의 휴대용 게임기는 스마트폰 외에도 클라우드 기반의 휴대용 게임기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클라우드 기반 게임들은 5G 통신망의 확대에 맞춰 점차 몸집을 불려가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휴대용 게임 전쟁이 예상된다.

 

돈과 게임의 역사 <리니지>와 한게임


게임은 언제 유료가 되었나?

1998년 엔씨소프트가 선보인 〈리니지〉는 온라인을 통해 전 세계 유저와 함께 게임을 즐기는 방식을 대중에게 각인시켰다. 새로운 혁신의 시작이었다. 〈리니지〉의 성공은 게임 내부 뿐 아니라 게임 산업 전반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했다. 2000년대 벤처 기업 붐과 함께 국내 게임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1세대 온라인 게임으로 불리는 〈리니지〉는 계급과 아이템에 기반을 둔 ‘PvP(Player versus Player)’ 방식이 핵심인 MMORPG다. 국내 순정 만화의 전성기를 이끈 신일숙 작가의 작품 세계관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리니지〉 시리즈는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한국의 피시방 문화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그 중심에는 김택진이 있었다. 김택진은 현대전자에서 국내 최초의 인터넷 서비스인 ‘아미넷’을 제작한 경험을 바탕으로 1997년 엔씨소프트를 창업했고, 〈바람의 나라〉를 개발한 송재경의 팀을 인수해 〈리니지〉를 출시한다. 〈리니지〉에서 수백 명의 플레이어는 이동하며 사냥할 수 있었고, 유저들끼리는 자유롭게 싸울 수 있었다. 이러한 PvP 시스템, 아이템 강화와 길드 결성, 공성전과 같은 방식은 기존의 싱글 기반 게임에서는 접할 수 없던 요소였다. 〈리니지〉는 빠르게 유저들의 관심을 모으며 단숨에 온라인 게임의 왕좌에 오른다.

〈리니지〉 성공의 중심에는 ‘PK(Player Kill)’로 불리던 PvP 시스템이 있었다. 초기 PK는 그저 경쟁을 유도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지만, 플레이어 사망 시 플레이어가 착용한 아이템이 떨어지는 등의 기능이 추가되자 예상치 못한 인기를 끌었다. 유저들은 기회만 되면 서로를 노렸다. 서로의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지점은 더더욱 유저의 호기심을 불렀다. 직접 공격을 주고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방의 능력치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레벨에 상관없이 모든 유저가 획득만 하면 고성능 무기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압도적인 우위가 아닌 이상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셈이다.
〈리니지〉 리마스터 게임 화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MMORPG의 등장이었다. ⓒNCSOFT
유저들은 다른 유저를 이기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이템 파밍에 몰두했다. 〈리니지〉의 서비스 초기에는 자동 사냥 프로그램이 성행했다. 자동 사냥 프로그램은 특정 행위를 반복하는 키 매핑 프로그램의 일종이다. 아이템을 강화하기 위해 〈리니지〉의 몇몇 유저들은 몬스터가 재등장하는 위치에서 자동적으로 공격을 반복하는 오토 마우스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를 드러낸다. 갑작스러운 PK에 대처하기도 쉽지 않고 낮은 아이템 드롭 확률 때문에 고급 아이템을 얻는 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웠던 탓이다. 이때 등장한 요소가 아이템 거래다. 유저들은 이기기 위해 비싸더라도 아이템을 구매했다. 처음에는 ‘아덴’이라 불리는 게임 내 재화로 거래가 이뤄졌다. 그러나 이 역시 풍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금 거래가 시작됐다. 〈리니지〉에는 아이템과 재화를 파밍해 거래소에 올리는 사람, 강해지기 위해 돈을 내고 아이템을 구매하는 사람, 그리고 이를 중개하는 업체로 이루어진 구조가 생겼다. 〈리니지〉 경제 시스템의 시작이다.

몇몇 아이템은 수천만 원을 호가하기도 했다. 비싼 몸값만큼 논란도 커졌는데 계정·아이템 절도와 같은 사이버 범죄부터 고가의 아이템을 잃은 유저가 상대를 찾아가 공격하는 ‘현피(현실+Player Kill)’ 사건이 발생해 논란이 됐다. 2013년에는 ‘집행검 반환 소송’이 일어 실제 법정으로 게임의 다툼이 번지기도 했고, 2017년에는 40명이 넘게 가담한 5~6억 대 아이템 거래를 빙자한 지능 범죄도 발생해 충격을 안겨줬다. 아이템 거래를 둘러싼 홍역이 커지자 이를 단속하겠다며 개발사가 입장을 표명했지만, 그마저도 암암리에 진행되는 거래와 편법을 막지 못했다. 자동 사냥 프로그램은 더욱 발전했고 여러 계정을 동시 조작하는 멀티 프로그램까지 성행했다. 게임 바깥의 환경이 게임 속을 지배해 버린 것이다.

〈리니지〉는 게임 산업을 온라인의 영역으로 개척했다는 점에서 국내 게임 산업의 터닝 포인트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그만큼 진통도 컸다. 온라인 살인 PK의 등장과 심화한 경쟁은 게임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부정적으로 바꿨다. 더불어 〈리니지〉와 유사한 시스템을 가진 게임들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리니지라이크’라 불리는 장르가 국내 게임 산업의 중심이 됐고, 모바일 전환 이후 이 흐름은 가속하기 시작했다. 월 구매 한도가 없는 모바일의 특성을 이용해 아이템 확률 상자와 같은 과금 모델이 등장했고, 이는 상당한 매출로 직결됐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세계적인 추세는 확률형 게임을 단속하기를 택했다. 확률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천장’ 시스템을 도입하는 식으로 과도한 사행성 요소를 막았다. ‘앱 스토어’와 ‘구글 플레이’와 같은 모바일 플랫폼은 연령에 따라 결제가 과도하게 이루어지면 이를 막거나 환불해 주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개발사의 노력이 필요하다. 세계를 흔드는 대형 신작이 거의 매달 나오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과금 모델에 집중한 우리나라 게임이 설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리니지〉 시리즈도 마찬가지다. 엔씨소프트에게도 〈리니지〉는 넘어야 하는 산이 돼 버렸다.

게임은 언제 무료가 되었나?

우리에게 일반적인 게임은 ‘유료’였다. 제값을 주고 구매해 즐기는 것이 당연했다. 온라인 게임 시대가 열린 1990년대 후반에도 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온라인 게임은 기간별 정액 서비스를 사용했다. 7일, 14일처럼 기간을 선택 후 구매한 후 게임을 즐기는 식이었다. 근데 이를 깬 업체가 바로 한국의 ‘한게임’이다. 무료라는 단어는 유저들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오히려 유료 게임 못지않은 높은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게임은 유료’라는 공식이 깨진 순간이었다.

2000년대, 본격적인 온라인 게임 시대에 맞춰 게임사들은 ‘맛보기’ 서비스를 내놓는다. 맛보기 서비스는 1980~1990년대의 데모 게임처럼 특정 구간까지 게임을 즐기고 이후는 과금하는 방식이었다. 시간제부터 주간, 월간 같은 다양한 방식이 나왔고 일부 게임은 큰 성공을 거두며 유저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온라인 게임이 늘어나면서 맛만 보고 사라지는 유저들이 늘었고 개발사는 수익화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인기 게임들도 정식 서비스만 들어가면 유저 수가 크게 줄어드는 문제를 겪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0~20대 남녀에게 사랑받던 〈퀴즈퀴즈〉는 월정액으로 서비스를 전환한 후 유저가 60퍼센트 넘게 감소했다. 〈리니지〉나 〈바람의 나라〉 같은 인기 게임이 아니라면 월정액 서비스 전환은 양날의 검처럼 불안했다.

2001년 3월 게임 포털 한게임은 서비스를 개선해 월 4000원의 프리미엄 서비스와 소액 과금 방식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100원에서 600원 정도의 적은 비용으로 필요한 게임을 이용하도록 유도하는 식이었다. 콘텐츠에 차이는 없지만, 진입 허들을 최소화해 맛볼 수 있도록 했다. 경쟁사들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월정액을 소액 형태로 세분화한 것 외에는 특별한 장점이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와 완전히 다른 양상을 띤다. 프리미엄 서비스 첫날에만 매출 9500만 원을 달성했고, 일주일 만에 3억 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 여기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유료화 같았지만, 기존 서비스하던 게임의 상당수를 무료로 제공한 것이다. 아이템을 제공하는 등, 프리미엄 서비스로 인한 혜택이 있기는 했지만 게임은 누구나 즐길 수 있었다. 오히려 무료 유저가 유료 결제로 진입하는 효과도 낳았다. 당시 한게임 전체 동시 접속자 수는 10만 명 정도였는데, 프리미엄 서비스를 실시한 이후 13만 명으로 늘었다.

한게임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은 네이버는 경쟁 업체였던 다음과 야후, 그리고 엠파스를 밀어내며 1위에 오른다. 성과를 본 경쟁 업체들의 연구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방식을 가장 먼저 차용한 업체는 ‘넥슨’이었다. 넥슨은 플레이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판매하는 방식으로 약간의 변화를 줬다. 지금의 부분 유료화다. 넥슨은 2001년 7월, 기존의 〈퀴즈퀴즈〉를 〈퀴즈퀴즈플러스〉로 개편하고 서비스를 무료로 전환한다. 주된 판매 상품은 아바타를 꾸밀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게임 내 캐릭터에 유명 브랜드의 의상을 입힐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추가적인 혜택도 얻을 수 있었다.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완전 무료화라는 자극적인 키워드에 많은 유저들이 몰렸고, 아이템 판매량도 기대 이상이었다. 효과를 체감한 넥슨은 다른 게임에도 순차적으로 부분 유료화를 적용한다. 가장 먼저 반영된 게임은 미니 게임 모음집 〈크레이지 아케이드〉였다.

이때 넥슨은 의상과 같은 편의 아이템이 아닌, 게임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아이템 판매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넥슨이 내놓은 시스템이 ‘P2W(Pay To Win)’ 아이템이었다. 〈비엔비〉 게임 내에서 물 폭탄을 맞을 경우, 유저는 방울에 갇히게 되는데 이걸 한 번 뚫고 나올 수 있는 ‘바늘’ 아이템이 그것이었다. 업데이트가 이루어지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부정적 반응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유저가 방에 입장한 다른 유저들에게 바늘 아이템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적했고,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 퇴장시키기도 했다. 넥슨은 저렴한 바늘 아이템을 모두가 기본적으로 사용할 것이라 내다 봤지만, 유저들은 이를 불합리한 구조로 느꼈다. 고민 끝에 넥슨은 바늘 아이템을 삭제했다. 그래도 얻은 건 있었다.

부분 유료화 시스템의 정착, 〈카트라이더〉

여러 시행착오 끝에 넥슨은 〈카트라이더〉에 부분 유료화를 안착시킨다. 유료 카트 등의 아이템을 판매하며 높은 동시 접속 수와 매출을 기록했다. 넥슨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경쟁 업체들도 무료 게임을 조금씩 선보였고, 2005년에는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이 부분 유료화에 기반을 둔 서비스를 시작했다. 부분 유료화는 어중간한 위치의 온라인 게임을 국내에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한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무료 서비스를 기반에 둔 온라인 게임은 게임을 그저 판매의 대상이 아닌 서비스로서 바라본 사례였다. 물론 이 방식이 안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사람들은 결국 재미있는 게임과 강력한 아이템에 돈을 썼기 때문이다. 매출이 안정적이지 않자 결국 게임 업체들은 무조건적인 승리를 보장하는 유료 아이템을 다시 상점에 내놓기 시작했다.

확률형 아이템 논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도 이때쯤이다. 2005년 이후에는 범람하는 무료 게임으로 인해 산업의 전체 매출은 증가하고 있었지만, 개별 업체의 매출은 줄어들고 있었다. 모두 무료 게임이었기 때문에 게임을 홍보하기 위한 지출 비용도 계속 상승했다. 재정적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게임사들은 밸런스에 영향을 주더라도 당장 팔릴 아이템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때 역풍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 P2W 스타일의 확률형 아이템 뽑기다. 강력한 아이템을 유료로 판매할 경우 〈비엔비〉와 같은 논란이 생길 수 있었지만, 모두가 같은 확률로 아이템을 뽑을 수 있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카트라이더 드리프트〉 게임 화면 ⓒNEXON
모바일 게임이 등장하자 P2W 방식은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했다. 중・소형 개발사들은 부분 유료화 시스템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고, 당시 국내 게임 생태계에는 P2W 방식만 남게 됐다. 당시의 세계 게임 산업은 8세대 게임기의 시대를 열며 대형 게임들이 잇따라 쏟아지던 시기였다. 국내 시장은 반대로 향했다. 게다가 사행성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게임 아이템을 대규모로 생산하는 시설을 말하는 이른바 ‘작업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발사는 이 시류에 편승하듯 아이템 등장 확률을 소수점 아래로 내리기도 했다. 심한 경우, 0.001퍼센트 확률의 아이템도 등장했다. 초기의 부분 유료화 정책은 누구나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하려는 대안적 시도였으나 한편으로는 게임 산업이 수익만을 좇아 달리게 되는 분기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모바일이 연 손가락 전쟁 시대


우리는 2000년대 초반부터 휴대전화로 게임을 즐겼다. 가벼운 퍼즐 게임부터 스포츠, RPG, 액션 게임 등을 피처폰으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피시방의 시대였다. 〈스타크래프트〉를 필두로 시작된 피시방 문화는 휴대전화 게임을 음지에 가뒀다. 물론 휴대전화 게임의 한계도 뚜렷했다. 당시의 휴대전화는 낮은 기기 성능으로 인해 통화, 문자, 무선 인터넷, 카메라 촬영 등으로 기능이 제한돼 있었고, 주고받을 수 있는 데이터 용량의 한계가 명확했기에 게임 자체의 퀄리티도 빈약할 수밖에 없었다. 컴투스가 2007년 발표한 대작 〈이노티아 연대기〉의 용량은 고작 4.3메가바이트였다. 같은 해 아이폰(iPhone)의 등장으로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렸지만, 여전히 휴대전화 게임이 걸어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 간혹 〈미니 게임 천국〉이나 〈슈퍼 액션 히어로〉와 같은 흥행작이 등장해, 개발사들은 모바일 게임을 ‘황금알을 품은 거위’로 묘사했다.

모바일 게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때는 온라인 게임의 암흑기라 불리는 2010년 이후였다. 2010년 삼성전자의 1세대 갤럭시가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를 등에 업은 채 시장에 나섰고, 2011년 이후부터는 비약적인 성능 향상을 보였다. 아이폰 역시 꾸준히 신제품을 내며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모바일 게임을 만들던 개발사들도 더 나은 퀄리티의 게임을 출시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능조차 생소했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개발사 ‘손노리’ 출신의 개발자들이 모여 있던 ‘턴온게임즈’는 ‘CJ E&M 넷마블(現 넷마블)’에 흡수돼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2011년 PC 온라인 게임 시장은 경쟁 포화와 게임성 한계, 무료화로 인한 수익 악화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100~200억 원을 투자한 온라인 게임들이 줄줄이 낙마하고 있었고, 투자는 얼어붙어 새로운 게임 개발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건강상 문제로 경영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있던 방준혁 의장이 복귀했다. 그는 ‘빠른 의사 결정을 통해 게임 개발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라는 기업 목표를 걸고 넷마블을 전문 게임 개발사로 탈바꿈하고자 나섰다. 이때 방 의장이 주목한 것은 정체되고 있는 온라인 게임이 아닌 아이폰과 갤럭시 중심의 스마트폰 시장이었다. 턴온게임즈도 하나의 프로젝트를 배정받는다. 개발 목표는 명확했다. 기존 피처폰으로 나왔던 게임보다 좋아야 하며, 3D 그래픽을 사용해야 했고, 터치 기반에서도 명쾌한 조작이 가능해야 했다. 이미 여러 휴대용 게임기가 나와 선전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비슷한 수준을 보이면서도 터치에 불편함이 없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간단한 터치, 길게 누르기 등, 몇 동작에만 의존해야 했다. 당시 시장에서는 ‘넥스트플로어’의 캐주얼 슈팅 게임 〈드래곤 플라이트〉가 화제를 모으고 있었는데, 간결한 조작성과 복잡하지 않은 구성이 그 성공 비결이었다. 턴온게임즈는 간단한 조작감을 살린 게임 개발에 착수한다.

그렇게 2012년 12월 31일 출시된 한 게임은 국내 게임 시장에 큰 변화를 몰고 온다. 이 게임이 바로 스크롤 방식의 캐주얼 레이싱 게임인 〈다함께 차차차〉다. 게임 방식은 간단했다. 다른 차량을 추월하고, 더 멀리 가면 승리하는 식이었다. 여기에 차량을 구매해 업그레이드하면 기존의 단점이 보완돼 더 쉽게 높은 점수를 기록할 수 있었다. 온라인 게임이나 콘솔 게임을 즐기는 유저로서는 다소 유치하게 보일 수 있는 게임이었지만, 대중은 열광했다. 〈다함께 차차차〉는 출시 이후 닷새 만에 매출 1위에 올랐고 하루 기준 8~9억 원, 석 달도 안 돼 3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했다. 당시 온라인 게임 평균 매출이 한 달 기준 10억 원 이상 나오기 힘든 구조였던 걸 감안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다함께 차차차〉 게임 화면 ⓒNetmarble
넷마블은 이때의 성공을 기반 삼아 모바일 게임 전문 개발 및 유통사로 거듭난다. 2013년 발표한 〈몬스터 길들이기〉는 모바일 플랫폼에 최적화된 RPG 표준 방식을 선보이며 다시 한번 유례없는 성과를 기록했다. 이후 넷마블은 여러 형태의 〈다함께〉 시리즈를 선보이며 국내 모바일 게임의 선두 자리를 지킨다. 모바일 게임 시장으로 많은 유저가 몰리자 많은 개발사가 개발 방향을 모바일 게임으로 전환했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100여 종이 넘는 모바일 게임이 쏟아진다. 본격적인 모바일 게임의 경쟁 시대가 열린 것이다. 모바일 게임 경쟁에서는 엔씨소프트와 넥슨, 넷마블 같은 전통적인 강호로 불리던 게임 업체가 아닌, 새로운 ‘신데렐라’들이 탄생했다. 2014년 ‘액션스퀘어’가 선보인 액션 RPG 〈블레이드〉가 대표적이다. 모바일에서 보기 드문 뛰어난 그래픽과 손맛을 내세운 이 게임은 출시 8일 만에 구글 플레이와 앱 스토어 매출 1위를 기록했고 장기간 흥행을 이뤄 1년 만에 1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다음 해 넷마블과 네이버가 손잡고 선보인 〈레이븐〉이 〈블레이드〉를 능가하는 성적을 달성하며, 모바일 게임은 가능성이 큰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레이븐〉은 TV와 포털 등을 통해 광고를 내며 대중의 접근을 이끌었고, 터치 조작의 정확성을 개선해 마니아에서 일반 유저로 타깃을 선회했다. 막대한 비용의 광고 대전이 열린 시점도 이때부터다.

이 시기 모바일 게임은 국내 게임 시장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자리매김한다. 구글 플레이와 앱 스토어는 유통사를 통하지 않고도 글로벌 시장을 노릴 수 있는 창구였기에 해외 진출도 쉽게 계획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모바일 게임은 카카오톡이나 라인과 같은 메신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과 연계하기도 했다.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다는 모바일 게임의 장점은 더욱 강화됐고 장르도 다양해졌다. 당시 온라인 게임은 MMORPG를 중심으로 FPS 게임이나 다인 대전 액션, 레이싱 게임과 같은 몇몇 장르에 집중되는 성향을 보였으나, 모바일 게임은 3매치 퍼즐부터 방치형, 수집형, 액션 RPG, 슈팅, 소셜 네트워크 게임, 시뮬레이션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유저를 만났다. 장르의 다양화는 스마트폰의 보급 확산과 더불어 게임이 더욱 대중적인 형태로 진화했다는 의미였다.

이 중에서도 수집형이라 불리는 하위문화는 모바일 게임 시장을 주도하는 장르로 급부상했다. 다양한 성격의 캐릭터를 수집하고 성장시켜 스테이지를 격파하고, 다른 유저와 경쟁하는 이 장르는 남성 유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했다. 〈스텔라 메이든〉을 비롯해 〈라스트 오리진〉, 〈블루 아카이브〉 같은 게임이 인기를 끌었고, 〈소녀전선〉과 〈우마무스메: 프리티더비〉 같은 해외 인기작도 들어와 사랑받았다.

급성장에는 부작용도 따랐다. ‘게임 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로 제한돼 있던 결제 한도가 모바일에서는 무제한이었던 게 문제가 됐다. 몇몇 게임은 이 허점을 노린 과금 모델을 대거 출시했다. 과금은 캐릭터를 성장시키기 위한 지름길이었고, 각종 아이템을 확률로 얻도록 하는 시도가 만연했다. 하나의 캐릭터를 최고 레벨로 올리기 위해서는 수천만 원이 필요한 사례도 생겼다. 모바일 게임의 재미 요소는 세계관과 조작, 줄거리보다는 경쟁 중심으로 흘렀다. 누가 더 많이 과금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렸고, 개발사는 이를 자극하는 유도성 이벤트와 대규모 전투, 공성전 등을 열어 수익성을 높였다. 모바일 게임 시장은 초기의 활력을 잃은 채 기존의 것을 반복했다. 새로움을 겨냥한 시도는 줄어들었고, 수집형과 MMORPG 장르를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됐다. 9세대 게임기의 등장, 8K 해상도를 지원하는 AAA급 게임이 꾸준히 나오는 지금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모바일 게임은 낮은 진입 장벽과 터치 환경을 사용한 자유로운 조작, VR부터 AR 등 주변 기기와의 높은 호환성을 가졌다.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다양한 손가락 전쟁 시대의 미래를 그릴 수 있다. 꾸준한 진화를 위해서는 과금 전략보다는 세계 시장을 주목시킬 만한 게임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게임 패스로 보는 게임 경쟁의 미래


마이크로소프트는 콘솔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며 가정용 게임기 경쟁을 펼쳐 왔지만, 성과는 기대 이하였다. 닌텐도의 휴대용 게임기는 파상공세를 펼쳤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약진을 거듭했다. MS의 엑스박스는 초기보다는 훨씬 많은 유저를 모았지만, 항상 게임 라인업 문제로 인해 선두를 차지하지 못했다. 문제를 극복해야 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임 온라인 대여 서비스로 시선을 돌린다. 저렴한 비용으로 게임을 일정 기간 빌리고, 즐길 수 있는 형식이었다. 때마침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떠오르던 건 다름 아닌 ‘넷플릭스(Netflix)’였다. MS는 넷플릭스로부터 구독 개념을 차용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서비스가 ‘게임 패스(GAME PASS)’다.

2017년 2월 28일 처음 공개된 게임 패스는 등장과 함께 논란이 됐다. 게임을 구독 형태로 제공하는 발상 자체가 유저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는데, 수백 개의 게임을 게임 한 개도 안 되는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시의 비즈니스 생태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방식 때문에 경쟁 업체와 게임 개발사는 당황했다. 공개와 함께 게임 업계 뜨거운 감자가 된 게임 패스는 그해 6월 1일 정식 서비스에 들어갔다. 월 만 원도 되지 않는 가격에 목록에 있는 게임을 무제한 즐길 수 있었다. 초기 유저 반응은 애매했다. 일부 퍼스트 파티 라인업을 제외하면 대부분 2~3년 정도 전 출시된 게임이었고 현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영미권 이용자가 아니라면 원활히 이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언론들은 게임 패스가 철 지난 게임을 서비스하는, 기대에 못 미치는 구독 서비스라며 혹평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부족한 라인업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임 패스 입점을 두려워하는 개발사도 많았고, 구독 시 수익 분배와 같은 다양한 문제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는 유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경쟁 업체인 소니와 닌텐도로서도 게임 패스는 ‘바보’ 같은 서비스였다. 가뜩이나 게임 판매와 라인업 확보에서도 밀리는 처지의 마이크로소프트가 가장 불리한 방식의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게임 패스 서비스는 6개월도 되지 않아 경쟁 게임에 밀려 존재감을 잃어 갔다.
게임 패스 화면 ⓒMicrosoft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입장은 달랐다. 시행착오가 절실했던 서비스였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실패가 아니라고 봤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는 유저가 원하는 것, 그리고 전 세계로의 확산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철저히 분석했다. 게임 패스가 주는 부정적인 인식을 지우기 위한 작업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덕분에 서비스의 질은 개선됐지만, 가장 큰 문제는 빈약한 라인업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문제를 투 트랙 형태로 해결하려고 했다. 하나는 출시가 임박한 AA급 게임에 과감하게 자금을 투자하며 대형 라인업을 확보하는 전략이었고, 또 하나는 게임 스튜디오를 직접 인수하는 방향이었다. 내부에서 개발할 수 있는 게임의 한계는 분명했기 때문에 무리하게 자체 개발력을 확보하기보다는 외부에서 떠오르는 개발사나 라인업을 다수 보유한 유통사를 인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결과다.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안착하는 데까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지만 결국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게임 패스는 2020년 기점으로 대부분의 문제를 해소했다. 게임 패스 덕분에 유저는 PC와 엑스박스를 오가며 게임 플레이를 즐길 수 있었다. 유명 게임들은 MS와 계약을 맺어 ‘데이 원(Day One)’[3]으로 출시됐다. 2021년에는 로그라이트 게임 〈하데스(Hades)〉를 시작으로 〈사이코너츠2 (Psychonauts 2)〉, 〈미스트(Myst)〉 리메이크, 〈백4블러드 (Back 4 Blood)〉, 〈12분(Twelve Minutes)〉, 〈디 어센트(The Ascent)〉와 같이 외부 개발사가 제작한 게임이 게임 패스를 장식했다. 게임 패스에는 매달 5~10여 종 이상의 신작, 20종의 추가 라인업이 나왔다. 다수의 유명 스튜디오를 흡수하고, 그곳의 라인업을 게임 패스에 추가하는 것도 MS의 전략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베데스다(BETHESDA GAME STUDIOS)’ 인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둠〉 시리즈를 비롯해 〈폴아웃〉, 〈엘더스크롤〉 시리즈로 알려진 베데스다를 인수하기 위해 모회사인 제니맥스미디어를 인수했다. 당시 인수가는 무려 8조 7000억 원으로 2016년 ‘텐센트’가 ‘슈퍼셀’을 10조 원 규모에 인수한 이후 최고 수준의 빅딜이었다. 인수가 확정된 후 베데스다의 모든 게임이 기다렸던 듯 게임 패스에 등록됐다. 게임 패스 구독률은 빠르게 상승했고 몇 달간 게임 업계를 장악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공세에 놀란 건 유저뿐만은 아니었다. 방심하고 있었던 소니와 닌텐도는 그제야 게임 패스가 비즈니스에 지각 변동을 일으키고 있단 걸 알게 된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시선은 액티비전블리자드로 향했다. 인수가는 무려 82조 원. 2022년 1월 18일 터진 이 사건은 전 세계 유례없는 세기의 딜이었다. 〈워크래프트〉와 〈디아블로〉 시리즈, 그리고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 시리즈가 게임 패스에 포함됐다. 화제의 중심에 선 마이크로소프트는 곧바로 경쟁 구독 서비스 ‘EA Play’와 연합을 맺는다. 그리고 자사의 온라인 멀티플레이 서비스 ‘엑스박스 라이브 골드(Xbox Live Gold)’를 게임 패스에 통합시킨다. 여기에 유저들이 원했던 DLC나 추가 혜택을 도입하고, 게임 패스 구독자에게는 할인 서비스도 제공했다. 스마트폰과 빠른 인터넷 환경만 갖추면 다운로드 없이도 게임을 즐길 수 있는 클라우드 서비스도 더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소니는 구독 서비스 ‘PS플러스(PS PLUS)’로 맞대응에 나선다.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나온 고전 게임부터 여러 독점 게임을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게 한 서비스였다. 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5년 넘게 다듬어 온 게임 패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소니는 당장의 매출 폭락을 우려해 라인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하지 못했고, 고전 게임 역시 개발사와의 협의 문제로 인해 본격적인 서비스가 어려웠다. 게임 패스는 전체 시장의 60퍼센트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며 게임 구독 서비스의 왕좌에 올랐다. MS의 액티비전블리자드 인수가 완료되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비롯해 〈디아블로4〉 같은 신작, 그리고 〈콜 오브 듀티〉 최신작도 게임 패스를 통해 만날 수 있게 된다.

게임 패스를 MS의 ‘돈놀이’로 평가하는 언론이나 유저도 많다. 경쟁이 끝난 후에는 자연스레 독점의 부작용을 유저가 떠안을 것이며, 이는 정통적인 게임 시장을 무너트리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게임 패스는 소비자의 선택 폭을 넓히고 권한을 키운 소비자 친화적 서비스이기도 했다. 유저는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게임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게임 업계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후발 주자로 게임 경쟁에 뛰어든 엑스박스는 가능한 최선의 공세를 펼치고 있다. 소니와 닌텐도는 MS의 선택에 따라 더 나은, 저렴한 서비스를 꺼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서비스에 대한 유저들의 기대감은 점점 커질 것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경쟁 업체들의 노력과 발전으로 이어진다. 게임 패스 역시 그렇게 변해왔다. 게임 패스는 미래의 게임 경쟁과 비즈니스를 바꾼 ‘게임 체인저’다. 거대 공룡들의 경쟁에서 유저가 선택할 카드는 결국 더 좋은 서비스다.
[1]
비트는 ‘Binary Digit’을 줄인 말로 컴퓨터의 저장 단위 중 하나다. 비트는 당시 게임기 성능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개념 중 하나였다.
[2]
1929년 2월 14일 시카고에서 벌어진 아일랜드 갱단과 알 카포네 간의 살인 사건이다. 밀주 판매를 놓고 벌어진 이 사건은 범인을 찾지 못해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개발팀이 이 이름을 쓴 이유는 왜 갑자기 빌이 모든 전권을 넘겼는지 전폭적 지원을 약속했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3]
‘데이 원’은 게임이 출시되는 시점에 게임 패스에 등록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