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 재난의 종료

5월 9일, explained

WHO가 코로나19 비상사태를 해제했다. 팬데믹은 끝났지만, 숙제는 남았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NOW THIS
 
공식적으로 일상을 되찾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해제한 것이다. 지난 6일이었다. 전 세계적인 감염병 재난, 팬데믹이 1192일 만에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물론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위협이 완전히 끝났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유행병 수준으로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팬데믹의 종식을 뜻하는 ‘엔데믹’ 논의가 급물살을 탄다.

WHY NOW
 
다만, 3년 4개월 전의 일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면 되는지에 관해서는 질문이 필요하다. 일상이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선포한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일상’이라는 단어에는 일상적인 부조리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전 세계가 함께 겪은 코로나19라는 위기는 그 부조리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제는 숙제를 할 시간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 놓쳐서는 안 될 기회가 있다.

달라지는 것
 
WHO의 발표에 우리 방역 당국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당장 질병관리청은 “국내 코로나19 위기단계 하향 조정 방안을 신속히 확정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이번 주 안에 코로나19 확진자 격리 기간이 7일에서 5일로 단축될 예정이다. 7월경에는 병원이나 약국 등에 남아있는 마스크 착용 의무가 완전히 사라지고, 확진자 격리 또한 의무에서 권고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즉, 감염병을 막기 위한 제한이 풀린다. 우리도, 바이러스도 자유로워진다.

올봄, 아이들이 유독 아픈 까닭
 
자유를 얻은 바이러스는 소아청소년과를 습격했다. 그 결과가 ‘소아과 대란’이다. 사실, 소아청소년과가 고사 위기에 몰려온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그 근간에는 우리 의료체계가 시한폭탄처럼 끌어안고 있는 각종 문제가 어지럽게 뒤엉켜 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기름을 부었다. 환자는 늘리고 의사와 병원은 줄였다. 신학기인 3월에서 5월 사이는 원래 소아청소년과가 붐빈다. 아이들이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서 새로운 바이러스와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3년간은 코로나19 탓에 단체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스크도 열심히 썼고 학교나 보육시설에 가지 않는 기간도 꽤 길었다. 그리고 올봄, 갑자기 마스크를 벗자 7종 정도의 감기 바이러스가 한꺼번에 유행하고 있다. RSV(호흡기 세포 융합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나으면 보카, 다음엔 아데노, 다음엔 리노 바이러스에 걸리는 식이다.
 
소아과가 문을 닫은 이유
 
당연히 열이 펄펄 끓는 아이들을 들쳐업은 아빠와 엄마들이 소아과로 향한다. 그런데 의사가 부족하다. 동네 소아청소년과 병원도 문을 닫았다. 번호표를 뽑고 오픈런을 하고 새벽부터 병원 앞에 진을 친다. 2023년 대한민국에서 병원 진료를 받기가 이렇게 어렵다. 2018년,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은 101퍼센트였다. 5년 전만 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2023년 전공의 확보율은 17퍼센트다. 이제는 너무 모자란다. 이 역시 원인은 다양하지만, 주범 중 하나로 코로나19가 꼽힌다. 팬데믹 기간에 소아청소년과가 문을 많이 닫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아프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몰두했던 강력한 방역 체계 덕분이다.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부모들이 코로나19 감염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9년 소아청소년과 진료비는 2조 9000억 원이었다. 2020년에는 2조 1000억 원으로, 1년 만에 3분의 1가량 감소했다. 2017년부터 작년 8월 사이 600여 곳의 소아청소년과가 폐업했다. 현실이 이런데 미래를 소아청소년과에 걸 전공의가 많을 리 없다. 그리고 팬데믹 시기, 위기로 내몰린 것은 소아청소년과뿐만이 아니다.
 
공공병원이 감당했던 것
 
코로나19와 최전선에서 싸웠던 공공병원들도 내몰렸다.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2021년 1월 기준으로 코로나19 감염병 전담병원 59곳 중 54곳이 공공병원이었다.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환자는 끊겼다. 코로나19 감염자 이외의 환자들이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의사들도 떠났다. 코로나19 감염자 이외의 환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외과 의사가 1년 내내 수술을 집도하지 못하면 손이 녹슨다. 공공병원에 남는다는 것은 경력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가 되었다.
 
텅 빈 병원에 남은 것
 
팬데믹이 끝났지만, 환자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환자들은 내 증상과 병력을 이미 알고 있는, ‘다니던 병원’에 다니기 마련이다. 숫자로 보면 상황은 더욱 명확하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 3월, 경기도의료원 산하 6개 병원의 병상이용률은 약 73퍼센트였다. 올해 3월은 약 41퍼센트다. 전담병원 지정은 지난해 5월 진작 해제되었으나 회복이 더뎌도 너무 더디다. 떠난 환자도, 의사도 돌아오려면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팬데믹이 끝났으니, 정부 지원도 끊긴다. 박수는 받았지만, 정작 병원 건물은 속이 텅 비어버렸다. 올 하반기에는 월급이 밀리는 공공병원도 나올 수 있다는 내부 관계자의 전언이다. 물론 실속을 차린 곳도 있다. 거점 전담 병원으로 지정되어 사실상 ‘병실 임대 사업’을 한 일부 민간 병원들이다. 인력은 정부와 학회 등에서 지원했고 보상금도 챙겼다.
 
팬데믹이 남긴 경험
 
지난 3년간 무너진 것이 있다면 쌓아 올린 것도 있다. 바로 비대면 진료의 인프라 구축과 사용자 경험이다. 비대면 진료와 관련된 논의는 오랫동안 공전해 왔다. ‘원격의료’라는 이름으로, 영리병원이나 의료민영화를 부추길 것이라는 꼬리표가 달려 번번이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마음대로 병원에 갈 수 없는 일상’을 경험하면서 인식도, 제도도 변화했다. 무엇보다 기술이 달라졌다. 의료법 개정으로 의료인끼리 원격 협진이 처음으로 가능해 진 2002년에는 스마트폰이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누구든 스마트폰을 들고 있고, 누구든 원격의료를 이용할 수 있다. 큰돈을 들여야 큰 병원의 유명한 교수님을 주치의처럼 만날 수 있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업무 중 짬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이 독감 처방을 받는 차원의 이야기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

그렇다고 무작정 규제를 풀고 비대면 진료를 합법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규제를 풀기 전에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비대면 진료의 최대 수혜자가 되어야 할 장애인이나 고령층의 디지털 접근성, 대형병원을 선호하는 풍토 속에서 동네 의원급 병원 생태계를 보호할 방법 등이다. 비대면 진료는 의술이 아니라 기술이다.  살려야할 것은 시장이 아니라 환자다. 지역사회에서 돌봄 망을 어떻게 촘촘하게 구축할 것인지, 의료 소외 지역에서 응급 환자, 중증 환자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지, 늘어가는 만성질환, 노인성 질환 등을 잘 관리해 건강보험재정 건전화를 어떻게 꾀할지 등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비대면 진료의 성격과 범위가 결정되어야 한다. 사실, 팬데믹 기간에 이와 같은 과제는 여실히 드러났다. 3년 동안 논의조차 제대로 시작하지 못했을 뿐이다. 빠르면 이번 주, 코로나19 위기 단계가 하향 조정되면 비대면 진료는 바로 불법이 된다.

IT MATTERS
 
숙제를 닥쳐서 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미처 챙기지 못한 부분도 생긴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도 마찬가지다.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가 치솟던 시기에는 무엇이 문제인지, 어디에 빈틈이 있는지 모두 나서 떠들었다. 당장이라도 해결 방안을 강구할 것처럼 정치권도 들썩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해묵은 논의들이었고, 그마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치명률이 떨어지자 모두 잊었다.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급급했다.
 
‘내외산소흉신’의 전공의 부족 문제는 하루 이틀 제기되어 온 것이 아니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이른바 ‘바이탈과’들이 위험하다. 공공병원 확충 문제도 마찬가지다. 서울에서 대전 가는 고속도로 하나면 지방의료원 30개 정도는 지을 수 있다는 분석까지 나왔지만, 지방 소도시에서는 산모들이 병원이 없어 구급차를 타고 도로 위를 헤매야 한다.

팬데믹이 환부를 드러냈다. 소외될수록 더 아프고, 더 위험한 우리 사회의 환부다. 비대면 진료나 mRNA 백신과 같은 새로운 기술을 도구 삼아 고름을 걷어내고 상처를 봉합하는 것은 결국, 잠재적 환자인 우리의 몫이다. 보건 의료 체계와 관련된 논의에 성실하게 귀를 기울이고 정책 결정자들이 최선의 결론을 내리도록 감시해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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