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관식이 감추는 것

5월 10일, explained

70년 만에 영국 국왕의 대관식이 열렸다. 그 성대함과 화려함은 영국의 민낯을 감추고 있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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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국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God save the King!)” 지난 6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찰스 3세 영국 국왕과 카밀라 왕비의 대관식이 열렸다. 군주가 신과 국가에 헌신을 맹세하는 종교 의식인 대관식은 영국 왕실의 전통과 영연방의 단결을 상징한다. 이번 대관식은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이후로 70년 만에 열린다. 영국 군주제의 전통을 상징하는 성스럽고 경건한 행사가 오랜만에 열린 것이다.

WHY NOW

웨스트민스터 사원 바깥에서는 사정이 좀 달랐다. “나의 왕이 아니다(Not My King)”라고 외치며 팻말을 든 시위대가 있었다. 이들은 반군주제를 주장하는 단체 ‘리퍼블릭(Republic)’이다. 경찰은 이날 오전 트래펄가 광장에서 리퍼블릭의 대표 그레이엄 스미스(Graham Smith)를 체포했다. 영국을 부르는 정식 명칭에는 ‘Great Britain’이 들어가 있다. ‘위대한(Great)’이라는 단어는 영국의 힘과 왕실의 권위를 나타냈다. 지금 영국은 왕실의 행사에 반대하는 시민이 있고, 경찰은 그들을 체포한다. 영국 국민들은 여전히 국가와 왕실에 위대함을 느낄까.

달라진 대관식, 그러나

원래 대관식은 중세적 전통을 가진 행사이나, 영국은 이번 대관식에서 나름 현대적인 모습을 담으려 노력했다. 불교와 유대교, 시크교 지도자를 초대하며 왕실의 종교인 성공회 외에도 종교적 다양성을 보였다. 처음으로 여성 사제가 성경을 낭독하거나 여성이 보검을 들기도 했으며, 인종적 다양성도 내비쳤다. 그럼에도 영국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대관식이 열리기 엿새 전인 4월 30일,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위치한 햄던 파크(Hampden Park)에서는 찰스 3세의 대관식을 비웃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한국 선수 오현규가 속한 프로 축구단, 셀틱 FC(Celtic Football Club)의 팬들이 부르는 노래였다. 대관식을 비하하는 단어가 포함된 노래는 경기장에 쩌렁쩌렁 울렸고, 이를 담은 영상은 BBC 방송을 타고 세계로 퍼졌다.

스코틀랜드와 영국 왕실

셀틱 FC가 영국 왕실에 야유를 쏟아낸 건 처음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 당시에도 셀틱의 팬들은 경기 시작 전 추모를 하는 시간에 “왕실이 싫으면 박수를 쳐라”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왕실에 대한 셀틱 팬들의 반응은, 그 구단의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셀틱 FC는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가톨릭교도들이 사회 통합을 목적으로 창설한 구단이다. 따라서 셀틱 FC의 팬들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지역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들은 응원할 때 영국의 국기가 아닌 스코틀랜드의 깃발을 흔들고,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을 지지하는 노래를 응원가로 사용하며, 스코틀랜드 자치 정부가 분리독립을 추진할 때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스코틀랜드 내 집권당인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은 독립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대관식에서 보이는 영국의 역사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왕실에 대해 고운 시선을 가지려야 가질 수가 없다. 영국 왕실의 대관식 때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돌이 쓰인다. 대관식 의자 아래에 괴어 놓는 ‘운명의 돌’이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한 1296년에 전리품으로 가져갔던 이 운명의 돌은 스코틀랜드 왕권의 상징이자, 동시에 스코틀랜드의 굴욕적인 역사를 상징한다. 이번 대관식에서 영국 왕실이 썼던 ‘남의 물건’은 스코틀랜드 것 하나가 아니다. 왕을 상징하는 홀(笏·scepter)과 왕관에 박힌 컬리넌 다이아몬드도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남아공에서 온 것이다. 비록 명목상 거래 형태로 영국에 넘기기는 했으나, 남아공에서는 제국주의 시절의 거래는 사실상 불법이라며 이를 다시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화려한 대관식은 한편으로는 영국이 과거에 세계에 저지른 만행을 상징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시민이 굶주리는 영국

셀틱 FC 팬들의 야유를 방송 ‘해브아이갓뉴스포유(Have I Got News For You)’에 이용한 BBC는 셀틱 팬들에게 200파운드를 보상했다. 셀틱 FC의 팬들은 이 돈을 글래스고 푸드뱅크에 후원했으며, 다른 팬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웹페이지를 홍보했다. 현재 글래스고에서는 시민 네 명 중 한 명이 식량 빈곤을 겪고 있다. 15만 명이 넘는 인구다. 식량 빈곤은 글래스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 전역의 아동들이 식량 빈곤에 시달리며, 다섯 명 중 한 명은 밥을 못 먹고 있다. 영국 물가는 지난해 10월 11.1퍼센트 상승해 41년 만에 최고 기록을 세웠다. 지난 3월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 역시 10.1퍼센트로, 서유럽에서 유일하게 두 자릿수 상승률을 보였다. 그런데 대관식에 사용한 예산은 1억 파운드, 한화로 1500억 이상으로 추정된다. 반군주제 집회를 지위한 리퍼블릭은 이마저 보수적으로 잡은 액수라며, “비싼 돈을 들여 무의미한 연극을 하는 것은 생계 위기로 어려움을 겪는 수백만 명의 영국인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위나 다름 없다”고 왕실에 대해 비난했다.

브렉시트 그 이후

축구장에서 야유를 보낸 건 셀틱의 팬들만이 아니다. 대관식 당일, 리버풀의 안필드(Anfield)에서도 야유가 터져 나왔다.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한 영국 국가 ‘갓 세이브 더 킹(God save the King)’이 울려퍼질 때였다. 프리미어리그 축구 클럽 리버풀FC(Liverpool Football Club)의 팬들은 부(Boo) 소리를 내며 야유했고, 선수들은 국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역시 리버풀이라는 도시와 관련 있다.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리버풀은 1964년부터 줄곧 노동당이 집권해 왔다. 리버풀은 2016년 브렉시트 투표 당시 유럽연합 잔류 측의 득표율이 높았던 몇 안 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영국은 EU를 탈퇴했고, 3년이 흘렀다. 최근 영국은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의 10대 교역국 지위에서 탈락한 것으로 확인됐다. 브렉시트를 강력히 지지했던 전자제품 기업 다이슨(dyson)은 정작 2019년이 되자 영국을 탈출해 싱가포르로 본사를 이전하여 비판받기도 했다. 브렉시트로 인한 영국의 경제적 손실은 예상보다 크게 나타나고 있다.

영국 왕실과 보수당

브렉시트를 주도한 것은 보수당이었다. 보수당은 영국 왕실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찰스 3세 개인에 대해서는 기후변화 등 여러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온 만큼 보수당의 견해와 개인의 견해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군주제 자체는 영국 보수당의 뿌리이다. 영국 보수당의 전신이자 별칭은 토리당으로, 이들은 17세기 후반에 국교단일화를 주장하며 국왕 편에 섰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현대에 이르러서 보수당은 자유시장주의와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군주제 전통에 두고 있다. 보수당의 부의장인 리 앤더슨(Lee Anderson)은 리퍼블릭 대표 그레이엄 스미스 체포 후 트위터에 “군주제가 있는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면 해결책은 이민을 가는 것”이라고 적기도 했다.

보수당, 국민에게 외면받다

지난 4일 실시된 영국 지방선거에서 보수당은 참패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국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YouGov)에 따르면 2021년 12월 이후로 계속해서 보수당의 지지율은 노동당에 비해 낮아 왔다. 물가가 절정으로 치솟은 작년 10월에 보수당의 지지율은 19퍼센트까지 떨어지고, 노동당의 지지율은 56퍼센트까지 오르기도 했다. 현재 영국의 국민들은 보수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게다가 젊은 유권자들은 군주제에 대해 지지하지 않을 뿐더러 관심조차 없다.

IT MATTERS

70년 만의 대관식은 해본 사람이 없어서 다들 비디오를 보고 재현해야 했다. 왕실은 나름대로 현대적인 대관식을 하려 했지만, 그 안에는 영국이 가리고 싶을 식민 지배와 갈등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영국의 군주제, 그리고 허울뿐인 대관식은 그 자체로 전근대성을 상징한다. 대관식에서 보여지는 화려함과 왕이라는 일종의 성스러운 존재로는 영국이 세계에 저지른 만행도, 정부가 국민에게 주고 있는 고통도, 영국 내부에 존재하는 갈등도 가릴 수 없다.

현재 영연방의 국가들은 영국의 노예 교역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벨리즈와 자메이카는 곧 공화국으로 전환해 영국 왕과의 관계도 끊겠다고 나서고 있다. 역시 영연방 국가인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의 총리도 영국 군주가 국가 원수로 있는 것은 생전에 끝내고 싶은 부조리한 일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희망이었던 영연방마저 해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과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지금의 영국은 정말로 위대한 국가일까. 화려하고 무거운 왕관을 쓴 75세 노인 찰스 3세는 전근대의 상징을 가지고 현재의 초라함을 가리는 영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국가의 위대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지금 영국에는 국민들이 인정하는 위대함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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