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탕이 아니라 금설탕

5월 16일, explained

덥다. 설탕 가격이 오른다. 전쟁이 길어진다. 설탕 가격이 오른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NOW THIS
 
설탕 가격이 위험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지난달 12일, 영국 런던 국제금융선물거래소에서 백설탕 선물 가격은 12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1톤에 700달러가 넘는 수준이다. 올해 초와 비교하면 30퍼센트가량 뛰었다. 아직 마트에서 집어 드는 설탕 가격까지 급등한 것은 아니다. 선물 거래 가격이 소비자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짧게는 4개월에서 1년 정도가 걸린다. 그러나 설탕 없이 만들 수 있는 먹거리는 많지 않다. 밑반찬부터 달콤한 라테 한 잔까지, 일상의 모든 것이 사치가 될 수도 있다.

WHY NOW
 
아이들은 사탕을 좋아한다. 아니, 어른들도 단맛에 쉬이 흔들린다. 본능적으로 인간은 달콤함을 탐하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당이 공급하는 즉각적인 에너지는 생존이며 행복이고, 동시에 독이다. 여기저기에 달콤한 음식이 넘쳐난다. 지난 시대가 설탕을 손쉽고 저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설탕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러시아로,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페루 앞바다에 이르기까지, 설탕의 달콤한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맞이하게 될 뉴노멀의 실체가 보인다.

유럽을 달콤하게; 포르투갈
 
전 세계에서 설탕(원료당)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브라질이다. 기원은 포르투갈이 브라질을 식민 지배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맛에 매료된 유럽인들은 식민지에 거대한 농장을 만들고 설탕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서는 대규모의, 집약적 노동력이 필요하다. 정글처럼 자라나는 사탕수수를 베어 공장으로 운반하고 분쇄한 다음 압착하고, 이렇게 얻은 즙을 큰 솥에서 오랫동안 끓이면 설탕을 얻을 수 있다. 20세기 이전에는 이 고된 과정이 순전히 사람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브라질과 같은 식민지의 노예 플랜테이션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설탕 말고 에탄올; 포르투갈 - 브라질
 
그렇게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 된 브라질은 21세기 들어 제2의 에탄올 생산국 자리에도 오른다. 원료가 있고, 수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사탕수수는 설탕의 원료인 동시에 에탄올의 원료이기도 하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이 필요했다. 브라질이 에탄올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호주 면적만 한 사탕수수밭을 가진 브라질은 ‘바이오 에탄올’을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현재 브라질 내 주유소에서 판매되는 기름의 4분의 1가량이 바이오에탄올일 정도이다. 브라질을 달리는 자동차 대부분은 에탄올과 휘발유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플렉스(Flex)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
 
전쟁의 영향; 브라질 - 러시아
 
이렇다 보니 한정된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 것인지, 에탄올을 만들 것인지의 질문이 남는다. 그리고 올해, 브라질의 답은 에탄올 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한 영향이 크다. 즉, 세계 권력 지형도가 뒤틀리면서 설탕 생산량이 줄어들고, 가격이 오르게 된다는 얘기다. 정확히는 석유 권력이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페트로 달러 시대의 종말; 러시아 - 사우디아라비아
 
OPEC(석유수출기구)이 최근 원유 생산량을 줄이겠다는 깜짝 결정을 발표했다. 하루 약 116만 배럴씩이다. 이유는 패권 다툼이다. 석유는 여전히 권력이다. 그 권력을 전쟁 이전에는 러시아와 중동의 원유 수출국들, 그리고 미국이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산 원유에 가격 상한제 등의 제재가 시작되었다. 미국으로 힘의 축이 자연스럽게 기울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위시한 OPEC의 국가들에는 위기다. 석유 권력을 되찾아 오기 위해 OPEC은 감산을 결정했다. 석유가 귀해지면 브라질 입장에서는 바이오 에탄올이 더 필요해진다. 결국, 올해 브라질의 설탕 공급량은 줄어들 가능성이 더 크다.
 
설탕값도 기후재난; 브라질, 인도
 
달라진 국제 정세와 함께 설탕 가격을 밀어 올리고 있는 또 다른 변수는 바로 기후다. 지난 2월에서 3월 사이, 브라질은 전례 없는 폭우로 몸살을 앓았다. 수도인 상파울루에서는 하루 만에 600mm에 달하는 비가 쏟아져 최소 36명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4월부터 시작되어야 할 사탕수수 추수가 늦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비 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브라질뿐만이 아니다. 브라질 다음으로 설탕 생산량이 많은 인도 또한 사정이 비슷하다. 사탕수수 주요 재배지인 중서부 마하슈트라주가 피해를 보았다. 올해 인도의 설탕 생산량 또한 감소할 전망이다. 그런데 올해가 문제가 아니다. 내년의 설탕 전망은 더욱 암울하다. 곧 닥칠 것으로 보이는 ‘슈퍼 엘니뇨’ 때문이다.
 
슈퍼 엘니뇨의 경고; 브라질, 인도 - 페루
 
페루 앞바다에는 엘니뇨·라니냐 감시구역이 있다. 이 구역의 바닷물 수온이 평년보다 차가워지면 라니냐, 더워지면 엘니뇨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이상 기후를 불러온다. 작년,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태풍 ‘힌남노’를 비롯해 전 세계에 나타났던 기상이변이 라니냐 현상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올해는 엘니뇨다. 그것도 평년보다 수온이 2도 이상 높은 슈퍼 엘니뇨다. 역사적으로 1950년대 이후 세 차례에 불과했던 대이변이다. 기후 전문가들은 벌써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가혹한 기후 재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미 페루에콰도르 등 적도 부근 동태평양 인접 국가들은 폭우와 홍수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올해 지구의 기온은 관측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가능성이 크다. 설탕을 비롯한 먹거리 전반에 위기가 닥칠 가능성도, 역시 크다. 어렴풋한 전망이 아니다. 유엔의 경고다.
 
지금, 생존의 위기; 페루 - 한국의 낙원상가

한국에 닥칠 일은 무엇일까. 올여름, 아이스크림 가격이 오를 수 있다. 올겨울,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아쉬운 일이다. 안 그래도 치솟는 장바구니 물가에 또 다른 부담이 될 것이다. 이 부담이 어딘가에서는 생존의 위기가 되기도 한다. 가깝게는 종로 낙원상가 주변의 저렴한 국밥집들이 가격을 올릴 수 있다.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 등 이미 식량난을 겪고 있는 곳에서는 현실이 더욱 잔인해질 것이다. 전쟁도, 기후 위기도 뉴스 속의 거대 담론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뉴노멀은 달콤하지 않다.

IT MATTERS
 
평화로운 시대가 끝났다. 사실, 전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끊겼던 때는 없지만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전쟁이었다. 길어질 줄 몰랐던 전쟁이었다. 세계 질서가 변했다. 단단해 보였던 국제 패권이 흔들리면서 전 세계는 각자도생을 준비한다. 그래서 설탕 가격이 오른다.
 
흉년으로 삶이 빈곤해질 수 있는 시대가 다시 왔다. 기술로 극복했다고 믿었던 식량 안보가 흔들린다. 더워진 지구 때문이다. 예측하기 힘들어진 기후 재난 때문이다. 물론, 바다는 뜨거워지기도, 차가워지기도 한다. 라니냐도, 엘니뇨도 그 자체로는 이상기후 현상이 아니란 얘기다. 그러나 패턴이 깨지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올 초까지 이어졌던 라니냐 현상은 3년 연속 이어졌다. 올해를 강타할 것으로 예상되는 엘니뇨도 한 달가량 이르게 시작될 전망이다. 지구가 배신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욕심이 어리석었다. 그래서 설탕 가격이 오른다.

평온하고 무사했던 일상은 이제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설탕이 귀해지는 시대가 우리에게 닥쳐온 ‘뉴노멀’이다. 이미 영국에서는 굶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도 남 일이 아니다. ‘천 원의 아침밥’ 같은 사업이 주목받고 결국 정부가 지원을 늘리게 된 것은 실제로 아침을 굶는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식량 안보를 위해 수입국을 다변화하고 외교 역량을 단단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코앞에 닥쳐온 위기라면 그 위기에 가장 먼저 쓰러질 굶는 사람들을 챙기는 정책에 빈틈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재정건전성을 이유로 망설이기엔 배고픈 시대가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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