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 등장한 젊은 개혁

5월 17일, explained

청년층이 태국의 개혁을 이끌었다. 입헌군주제의 그늘 아래 있던 태국이 변하고 있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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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국민들이 개혁을 선택했다. 지난 14일 치러진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한 것은 기존의 정치 세력이 아닌 새로운 정당이었다. 하원 500석 중 151석을 차지한 행동전진당(까우끌라이당·Move Forward Party·MFP)이다. 42세의 젊은, 하버드 출신의, 기업 출신 엘리트 피타 림짜른랏 대표가 다음 총리가 될 수 있을지 주목받는다. 징병제 폐지와 동성 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는 동시에, 태국 정치의 근간인 왕실에 대한 모독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WHY NOW

태국 정치는 오랫동안 빨간 셔츠를 입은 ‘포퓰리스트(populist)’ 탁신파 대 노란 셔츠를 입은 군부 지지 세력 반탁신파의 구도로 이어져 왔다. 오렌지색의 전진당은 빨간색과 노란색 사이에 터를 잡은 게 아닌, 그들 자신의 새로운 오렌지색을 칠하는 정당이다. 오렌지색의 물결에 동참한 것은 SNS 홍보와 열렬한 지지로 이들을 제1당으로 만든 청년들이다. 청년층이 전진당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이 물결은 태국 사회를 어떻게 바꾸게 될까?

레드불, 태국 민주화의 날개를 펼치다

시계를 돌려 2012년, 에너지 드링크 브랜드 ‘레드불(RedBull)’의 창업자 3세 오라윳 유위티야가 사고를 친다. 방콕 시내에서 술과 마약에 취해 페라리를 과속으로 몰다가 오토바이를 탄 경찰관을 치인 것이다. 음주운전, 마약, 과속, 뺑소니까지 차 타고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했는데 수사의 결론은 봐주기였다. 경찰은 사고 후에 스트레스로 술을 마셨다는 오라윳의 말을 인정해서 음주운전 혐의를 적용하지도 않았고, 인터폴 수배를 내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8년 만인 2020년, 수사 당국은 결국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시민들은 경찰이 재벌 3세를 비호했다고 비판하며 거리로 나왔다. 많은 시위들이 그렇듯, 결국 분노의 불은 더욱 근원적인 곳인 총리와 군주제로 옮겨 붙었다.

역린 혹은 돌풍

군부는 시위를 막기 위해 지도부를 체포하고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발사했다. 그리고 시위에 나서 시민들과 함께 군주제에 저항한 정당을 해산했다. 이때 해산된 정당은 지금 1당을 차지한 전진당의 전신, 미래선진당이다. 2019년 총선에서 젊은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미래선진당의 운명은 2020년 2월 바뀐다. 사법부는 정당 대표의 의원직을 상실시키고 정당 자체를 해산시켰다. 이들은 전진당으로 이름을, 새로운 대표를 내세워 얼굴을 바꾸고 나타났다. 형법 112조 ‘왕실모독죄’를 폐지하자는 메시지는 유지했다. 왕실모독죄는 말 그대로 국왕을 비판하면 형사 처벌이 가능하도록 규정한 법이다. 태국에서 왕실은 신성하고 존엄한 존재였기에 건드릴 수 없는 역린이기에, 태국인들에게 왕실을 모독해도 된다는 주장은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태국 국민들은 밝은 눈을 떴다. 

빈부격차와 중진국의 함정

태국은 겉보기에는 먹고 살 만한 나라다. 명목 GDP 상으로 세계 27위로, 30위인 싱가포르와 34위인 베트남 등 주변 아세안 국가에 비해 나쁜 성적이 아니다. 문제는 빈부 격차다. 태국에서는 상류층 ‘하이쏘’가 부와 명예를 독점한다. 반면 대부분의 서민층 ‘로쏘’는 신분 상승의 기회가 없다. GDP를 전체가 아니라, 1인당으로 놓고 보자. 태국의 1인당 GDP는 전국 평균 7800달러 수준이다. 그런데 수도 방콕의 1인당 GDP는 1만 9749달러 수준이라면, 경제적으로 낙후한 북동부의 농부아람푸에서는 2460달러다. 도시 규모에 따라 GDP 격차가 매우 심하다. 게다가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 발달 속도가 빨랐던 태국은 이미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 출산율은 1.09 수준으로 떨어졌고, 2029년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사다리 없는 태국 경제 구조의 근원에는 경직된 입헌군주제가 자리한다.

입헌군주제의 그늘

태국으로 입국하는 해외 관광객들은 국왕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면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한다. 왕의 얼굴이 그려진 지폐를 함부로 훼손해도 안 된다. 왕실은 태국의 상징이다. 적어도 존경을 받았던 선대의 왕, 70년을 집권한 라마 9세까지는 그랬다. 사생활과 인성 논란이 있던 라마 10세가 집권하며 국민들의 존경심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태국 사회의 역동성을 제거하는 근원으로 군주제가 지목받기 시작했다. 태국 국왕이 상징적 존재를 넘어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왕에게는 쿠데타 세력을 승인하거나 승인하지 않을 권력이 있고, 국왕의 승인을 받은 군부는 자연스럽게 군주제의 가신 역할을 했다. 2020년 국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며 진압한 것 역시 군주제를 등에 업은 군부였다. 군부는 민중들이 몰아내도 다시, 또 다시 권력을 잡아 왔다. 2000년대 초중반에 집권했고 현재 정치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포퓰리스트 탁신 전 총리도 군부 쿠데타로 실권한 인물 중의 하나다.

탁신, 그 대신 

원래 탁신의 친나왓가(家)는 태국 야당의 치트키였다. 재벌 출신이기는 하나 30바트 의료 보험, 학자금 융자 확대 등 태국 정치 세력 중 유일하게 친서민 정책을 펼쳤던 친나왓가, 그리고 이들이 이끄는 프아타이당은 오랫동안 시민들의 선택을 받으며 무패 신화를 이어 왔다. 이번 선거의 구도 역시 원래는 군부 대 탁신파의 구도로 짜였다. 그러나 전진당 1당이라는 이 의외의 결과에 모두 놀라고 있다. 이는 군주제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는 않는, 지금까지의 야당과는 다른 개혁 세력이 필요하다는 태국 국민들의 요구를 반영한다. 전진당은 청년들의 픽(pick)이었다. 군주제 의제에 더불어 젊고 잘생기고, 연설도 잘하고, 소셜미디어도 활용하는 피타 림짜른랏 전진당 대표는 신진 정치인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민주화의 길에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가 반영된 결과다.

전진당의 숙제, 연정 구성

그러나 총선에서 제1당의 지위를 차지했더라도 제1당의 대표가 총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연정이라는 숙제가 남았다. 총리 선출에는 하원 의원 500명에 군부가 임명한 상원 의원 250명도 참가하기 때문이다. 상하원 합동 투표에서 과반인 376석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전진당은 151석, 여기에 연정 참여 의사를 밝힌 프아타이당의 141석을 합쳐도 292표다.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에 총리가 선출된다. 기업가 출신의 신진 정치인 피타 대표가 군부의 쿠데타 위협과 태국 왕정 사이에서 어떤 줄타기를 할지, 그만한 역량을 보일 수 있을지 주목받는 이유다.

무너지는 군부 세력

친군부 성향의 집권당 팔랑쁘라차랏당, 그리고 이들과 연정을 구성한 품짜이타이당, 양당이 차지한 것은 전체 의석에 15퍼센트에 그쳤다. 2019년 총선에서 이들의 비례대표 득표율이 34퍼센트를 넘었던 것을 고려하면 시민들이 군부 세력에 명확히 등을 돌렸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2019년 총선의 최종 투표율은 74.59퍼센트였다. 이번 2023년 총선의 최종 투표율은 85퍼센트, 1946년 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로 기록될 걸로 예상된다.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도가 높아질수록 군부가 무너지는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IT MATTERS

태국은 쿠데타가 전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여기서 태국의 왕실은 군부가 누리는 정치적 기득권의 발판, 나아가 사상적인 근거가 되어주고 있다. 왕위 승계를 인정하는 군부만이 300억 달러라는 태국 왕가의 재산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태국 시민들에게는 1997년 금융 위기 이후 엘리트를 불신하며 주권 행사를 해온 역사가 있다. 이들의 시민사회 역량 덕분에 태국의 민주주의는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다. 남은 과제는 시스템을 깨는 것이다.

태국 정치를 둘러싼 갈등을 여러 각도로 볼 수 있다. 왕정과 군부, 탁신파 등 기득권층 사이의 파워 게임, 경제적 계층 차이에서 발생하는 저항,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이 그것이다. 지금 태국 청년 세대에게 이전 세대의 상징인 라마 9세 국왕에 대한 존경심은 없다. 즉위 반대에 부딪히고 각종 논란에 휩싸였던 라마 10세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구시대적 군주제, 이로 상징되는 태국 사회를 개혁하기를 원한다. 전진당의 주요 공약 세 가지 중 왕실모독죄 폐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징병제 폐지와 동성 결혼 합법화다. 젊은 층의 생각과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사회 구조를 바꾸고 사회 변화에 제도를 일치시키는 아이디어다. 그래서 전진당은 리더만 젊은 당이 아니다. 그 뒷배가 되는 지지 기반도 젊은 것이다. 2020년 시위, 이번 총선에서 나라를 흔들었던 청년 유권자들 말이다.

태국 국기에는 세 가지 색깔과 이것이 각각 상징하는 바가 있다. 중앙의 청색은 국왕, 그 바깥의 흰색은 불교, 가장 바깥의 붉은색은 국민의 피를 나타낸다. 이는 본디 국민의 피로써, 불교를 정신적 바탕으로 하여, 국왕을 수호한다는 의미를 띄었다. 그러나 지금 태국 시민들의 시선에서 다시 본다면 국민들의 피와 불교적 전통이라는 바탕이 있기에 비로소 왕실이 존재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진당의 대표가 총리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태국 국민들의 저항은 쉬이 꺼지지 않을 것이다.
백승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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