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깁기의 미학
완결

짜깁기의 미학

호메로스의 상속자


유튜브, 인스타그램으로 대표되는 뉴 미디어 콘텐츠의 핵심은 반복이다. ‘치킨’, ‘먹방’, ‘인싸’ 같은 단어가 수많은 게시물에서 반복된다. 인기 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반복이다. 이런 단어가 들어간 게시물에 이용자의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단어는 콘텐츠의 테마이기도 하다. ‘치킨 먹방’은 많은 사람들이 제작하고 소비하는 하나의 콘텐츠 장르다. 더 큰 범주인 ‘먹방’도 마찬가지다. 무리에 잘 섞여 어울리는 사람을 뜻하는 ‘인싸’ 역시 콘텐츠의 주제가 되었다. 트렌드를 다루는 콘텐츠에는 ‘인싸 되는 법’, 인기 있는 아이템을 소개하는 콘텐츠에는 ‘인싸템’, 유행하는 춤을 다루는 콘텐츠에는 ‘인싸 춤’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특정한 단어와 테마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기원전 800년 무렵에 지어진 서사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대표적이다. 음유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이 두 서사시에도 반복되는 단어와 테마가 등장한다. 군대를 결집하고 원정을 떠나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패배하는 서사, 정복자의 약탈, 영웅의 등장 등이 반복되는 테마다. 상투적이고 관용적인 단어가 반복되기도 한다. ‘용맹한 군인’, ‘어여쁜 공주’ 같은 표현이 여러 번 사용된다. 뉴 미디어 시대,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콘텐츠 생산 방식은 놀랍게도 고대 시인 호메로스의 시대와 닮아 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음유 시인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구전 서사시다. 이 작품은 기원전 약 800년에 만들어졌다.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한 구술의 시대였다. 오늘날 우리가 텍스트로 읽고 있는 작품은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필사본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말’로 지어진 것이다.

《일리아스》는 1만 5693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디세이아》는 1만 2110행에 달한다. 호메로스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말로만 이 방대한 분량의 서사시를 짓고 이야기를 만들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문자가 없던 시기에 쓰였지만, 호메로스에 대한 연구는 작품이 탄생한 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매체학자 월터 옹(Walter J. Ong)은 지난 2000년간 축적된 호메로스에 대한 연구를 분석하여 ‘구술성(Orality)’이라는 개념을 완성했다. 옹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고전학자 밀먼 패리(Milman Parry)의 발견이었다. 패리는 호메로스의 시에서 이전의 연구자들이 그동안 발견해 내지 못했던 요소를 발견했다. 호메로스의 시는 상투적인 정형구들이 모여 짜 맞추어진 형태라는 것이다. 패리의 발견에서 옹은 구술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상투적인 정형구들로 짜 맞추는 호메로스의 작시법은 시를 짓는 기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문자 없이 말로만 모든 커뮤니케이션과 창작을 해야 했던 시대의 소통 방식인 구술성을 호메로스의 작시법을 통해 알 수 있다.

옹은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발달 단계에 따라 시대를 구분했다. 문자가 존재하지 않아 오로지 말로만 모든 소통이 이루어지던 시대는 일차적인 구술 문화, 문자가 발명되어 문자와 말이 함께 사용되는 시기는 이차적인 구술 문화다. 호메로스의 시대는 일차적인 구술 문화, 지금은 이차적인 구술 문화인 셈이다.[1]

일차적인 구술 문화의 시기에는 지적인 활동을 위해 다양한 기법이 활용되었다. 그중 하나가 전형적인 테마와 단어의 반복이다. 문자 없이 지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쉽게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말로 하는 기억법의 핵심은 운율이다. 알파벳이나 조선 왕 계보에 음가나 운율을 붙여 암기하는 것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호메로스 시대에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서사시의 내용을 기억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육각운[2]이라는 운율에 맞춰 노래된 서사시다.[3]

수만 행에 달하는 긴 시를 완전히 기억하여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정해진 운율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해서 부르기 쉽도록 운율에 맞춰진 표현이 반복해서 사용된 이유다. 예를 들어 ‘지략이 뛰어난 오디세우스(polymētis Odysseuś, 폴리메티스 오디세우스)’라는 표현은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72회나 나온다. 오디세우스가 실제로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지만, ‘폴리메티스’라는 표현이 서사시의 운율에 잘 들어맞아서다.[4] ‘지략이 뛰어난 현명한 오디세우스의 손을 잡고’[5], ‘그녀에게 지략이 뛰어난 오디세우스가 이런 말로 대답했다’[6], ‘지략이 뛰어난 오디세우스가 그에게 이런 말로 대답했다’[7] 등과 같은 방식으로 시가 이어진다. 오디세우스라는 인물에 ‘지략이 뛰어난’이란 형용구를 조합해 운율을 맞추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음유 시인들은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상투적인 표현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네스트로는 현명한 인물이다. 늘 ‘현명한 네스트로’로 불린다. 군인이 등장할 때는 반드시 ‘용맹한’과 같은 형용구가 함께 나타난다. 공주도 매번 ‘아름다운’ 공주로 표현된다. 나무는 언제나 ‘딱딱한’ 나무다. 특정 형용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기억의 유지를 돕는 것이다.

상투적인 표현을 서사시에서는 정형구라고 한다. 문자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형구는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클리셰는 쓰기 교육을 받을 때 최대한 피해야 하는 표현으로 꼽힌다. 문자 세계, 쓰기 문화에서 동일한 형용사를 72번이나 반복한다면 아마도 작가 취급조차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구술 문화에서는 정형구를 좋은 표현이라고 여겼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는 그런 반복이 나타나고, 호메로스는 천재 작가로 칭송받는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낭송해 널리 알린 것은 음유 시인이다. 음유 시인은 여기저기를 떠돌며 사람들 앞에서 시를 낭송했다. 글자가 없는 시대에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히 똑같이 낭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시인이 낭송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고, 같은 음유 시인이 낭송하더라도 설명하는 방식이나 표현이 달라진다.[8] 이들은 청중의 반응에 따라 매번 조금씩 다르게 노래를 불렀다. 음유 시인들은 다양한 테마와 정형구들을 알고 있었고, 이를 운율에만 맞출 수 있다면 무한정 길게 노래할 수 있었다. 이들이 노래를 만드는 방법은 상황에 맞게 정형구와 테마를 적절히 짜깁기하는 것이었다.

구술 문화의 음유 시인들에게 완전히 똑같은 낭송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유사하게, 비슷하게 노래할 뿐이다.[9] 완벽히 똑같다는 개념 역시 쓰기 문화에서 등장한 문자 문화의 사고 체계이다. 문자가 도입된 후에야 기록을 본래 모습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문자가 없는 구술 문화에서는 큰 맥락과 내용만 같다면 동일한 노래로 통용된다. 이것이 구술성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이 탄생한 구술 문화에서는 상황과 분위기에 맞춰 정형구와 테마를 잘 조합하여 짜깁기하는 능력이 창의성이었다. 이런 능력을 음유 시인들이 갖추고 있었고, 그중 특출한 능력을 가진 자가 호메로스였다. 호메로스의 위대함은 다양한 정형구와 상투구, 테마를 적절히 짜 맞추는 데에 있다.

구술성이란 근본적으로 말의 속성이며, 말은 소리로써 발화된다. 혼잣말을 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에는 상대방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구술성에는 공동성이라는 특징이 있다. 말은 대화 상대와 공유하는 것이다. 함께 대화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된다. 둘 이상의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구술성에는 외면적인 속성도 있다. 혼자서 하는 작업인 쓰기는 고독하고 내면적인 데 비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대화는 외면적이다. 상황에 따라 말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상황 의존적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의 음유 시인


뉴 미디어에서 만들어지는 콘텐츠들은 문자에 기반을 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뉴 미디어 콘텐츠의 본질은 대화이고, 말이다. 뉴 미디어 속 문자는 발음되는 대로 쓰인 입말을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사실 문자가 아니라 구어를 사용하고 있다. 콘텐츠를 보는 것보다는 듣는 것에 가까우며, 시각이 아닌 청각에 의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뉴 미디어의 구술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스낵 컬처(Snack Culture)다. 스낵 컬처는 짧은 시간 내에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말한다. 웹 드라마, 웹툰, 팟캐스트, 유튜브, SNS 콘텐츠 등이 대표적이다. 스낵 컬처에는 이전의 미디어 콘텐츠들과는 다른 특성이 있다.

대화성; 콘텐츠로 대화하다

스낵 컬처는 주로 스마트폰을 기반으로 개인이 혼자 즐기는 콘텐츠이지만, 활발하게 공유되며 대화의 매개가 된다. 개인들은 스마트폰을 이용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콘텐츠를 즐긴다. 그러다 혼자 보기 아깝거나, 친구의 평을 듣고 싶으면 즉시 스마트폰을 이용해 공유한다. 누군가가 게시한 트윗을 보면 리트윗과 답글로 후기와 감상을 나눈다. 웹툰을 보며 질문이 떠오를 때 댓글로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도 한다. 즐거움과 호기심을 즉각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스낵 컬처에 대한 반응을 또 다른 스낵 컬처로 표현하기도 한다. A라는 스낵 컬처에 대한 답을 B라는 스낵 컬처로 하고, 그에 대한 답이 또다시 C라는 스낵 컬처로 이어지는 식이다. 말 대신 스낵 컬처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이다. 이런 대화 방식은 이미 메신저나 SNS 같은 뉴 미디어 사용자들에게 익숙한 화법으로 자리 잡았다.

대화는 구술적인 현상이다. 이야기 상대가 있어야,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어야 대화가 시작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미디어 환경은 현실에서 만나지 않아도 대화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스낵 컬처도 대화성을 가진다. 스낵 컬처는 메신저에서 SNS로, SNS에서 온라인 커뮤니티로,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콘텐츠로서 대화를 매개한다. 콘텐츠를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대화가 된다.

즉시성과 다양성; 콘텐츠의 생명 주기와 유통

스낵 컬처 콘텐츠는 생명 주기가 짧다. 즉각적으로 소비되고 폐기되며 수시로 새로운 콘텐츠가 탄생한다. 빠르게 소비되며 빠르게 만들어지고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 스낵 컬처의 특징이다. 유행이 변하면 스낵 컬처도 변한다. 동시에 스낵 컬처의 종류와 개수는 무한하다. 빠르게 소비되기 위해, 명확한 타깃을 가진 다양한 콘텐츠가 만들어진다. 여행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추천 여행지를 다루는 콘텐츠로, 오페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오페라를 다루는 콘텐츠로 다가간다. 취향과 관심이 저마다 다른 개인에게 각자의 관심사로 접근하는 것이다.

쌍방향 소통; 반응도 콘텐츠가 된다

스낵 컬처는 제작이 기술적으로 어렵거나, 특별한 내용이 필요한 콘텐츠가 아니다. 개인이 빠르게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용자들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을 겸하는 쌍방향 소통이 스낵 컬처의 특징이다. 따라서 소비자의 요구가 콘텐츠에 빠르게 반영된다. 소비자의 반응 자체가 콘텐츠가 되기도 한다. 스낵 컬처를 본 소비자가 댓글로 기발한 표현을 남기면, ‘스낵 컬처 + 댓글’의 형태로 새로운 스낵 컬처가 만들어진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즉각적으로 소통하고, 소비자의 의견이 반영되면서 새로운 버전이 빠르게 만들어진다. 소비자의 요구가 반영된 콘텐츠는 발행과 동시에 순식간에 널리 퍼져 나간다. 기존 미디어에서는 콘텐츠가 만들어지기까지 몇 차례의 기획 보고서와 회의 등 여러 사람의 노력과 시간, 그리고 제작진의 특별한 능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뉴 미디어에서 빠르게 소비되는 스낵 컬처는 지금까지의 미디어 콘텐츠와는 제작에서 소비, 유통 등 전 과정에서 차별점을 갖는다.

공격성; 논쟁하는 콘텐츠

뉴 미디어 콘텐츠는 논쟁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용자들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상대방의 논리에 반박하다 보니,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언어가 오가기도 한다. 공격성은 구술성 고유의 특징 중 하나다. 《일리아스》에서는 잔혹한 전쟁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된다.[10] 또한 새로운 두 인물이 만났을 때는 말싸움을 벌이거나 결투를 벌여 우위를 결정하는 등 논쟁과 다툼이 빈번하다. 스낵 컬처를 비롯한 뉴 미디어 콘텐츠에서도 각자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를 공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반복과 유행; 반복은 세련됨이다

스낵 컬처에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유행어가 있다. ‘인싸’, ‘마상’, ‘TMI’, ‘쓰앵님’, ‘띵언’처럼 각 시대마다 많이 쓰이고 유행하는 단어들이 스낵 컬처에 지겹도록 반복해서 나타난다. 심지어 유행어가 포함되지 않은 콘텐츠는 따분한 콘텐츠로 간주된다. 이는 호메로스의 시에서 정형구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황과 겹쳐진다. ‘지략이 뛰어난 오디세우스’라는 표현이 72번이나 등장했던 것처럼, 스낵 컬처에도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다. 유행어가 서사시의 정형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 상황과 분위기에 맞게 잘 표현한 콘텐츠를 세련된 콘텐츠로 여기는 것 역시 호메로스 시대의 구술 문화와 일치하는 특성이다.

반복은 콘텐츠의 소재에서도 나타난다. 스낵 컬처의 주요 유통 플랫폼인 유튜브를 살펴보면 특정 소재의 콘텐츠가 다양한 유튜버들에 의해 제작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유튜브에서 먹방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보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음식들이 있다. 주로 치킨, 라면, 떡볶이, 김밥, 짜장면, 햄버거, 피자 등이다. 다양한 유튜버들에 의해 먹방 콘텐츠로 제작되는 이 음식들을 전형적인 테마라고 볼 수 있다. 수많은 유튜버들이 반복되는 테마와 유행어를 각자의 개성과 소비자의 요구에 짜 맞추며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있다. 시청자의 요구를 즉각 영상에 반영하고, 상황과 분위기에 맞게 유행어와 테마를 짜깁기하는 것이 핵심이다. 호메로스 시대의 작시법과 유사한 방법이다. 음유 시인들이 풍성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스낵 컬처 제작자들도 인기 있는 테마에 대해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유행어에 대한 감각도 뛰어나다. 이들은 음유 시인처럼 짜깁기의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든다. 이제 세련되고 새로운 콘텐츠는 잘 짜깁기한 콘텐츠다.

 

짜깁기의 창의성


인간의 사고 체계와 표현 방식은 의사소통 도구에 따라 변화한다. 오로지 말로만 대화하고 창작하던 호메로스의 시대에는 구술적인 조직 방식에 따라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다. 뒤이어 문자가 만들어지고, 문자 체계에 익숙해진 인간들은 문자 문화의 활동 양식에 따라 분석하고 비평하며 추상적으로 사고하게 되었다. 또한 문자에 의존해 기록하고 기억을 보존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도처에 뉴 미디어가 넘쳐나고 뉴 미디어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삶을 살고 있다. 뉴 미디어는 인간의 표현 방식과 사고 체계에 다시 호메로스 시대의 구술성을 불러왔다. 새롭게 만들어 낸 고유한 것만이 창의성이 아닌 시대가 돌아왔다.

미디어에서는 ‘히트다 히트’[11], ‘뭣이 중헌디’[12], ‘내가 이러려고 ~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13], ‘전화 아이받늬?’, ‘왜 살이 아이빠지니?’[14], ‘스튜핏’, ‘그뤠잇’[15], ‘어머니, ~를 집으로 들이셔야 합니다’[16] 등 상투적인 표현이 반복된다. 시기에 따라 유행하는 표현은 다르지만, 특정 표현이 유행어로 자리 잡으면 그 시기에는 그 표현이 뉴 미디어에 도배된다. 이 표현들이 계속 나타나는 이유는 유행하는 단어들을 상황에 맞게 적절히 짜깁기하는 것이 세련된 표현 방식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구술성은 뉴 미디어 시대의 창의성이다. 스낵 컬처로 대표되는 뉴 미디어 콘텐츠들이 가진 구술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17]

①첨가성

콘텐츠에 댓글의 반응이 끊임없이 덧붙여진다. 그 시기의 분위기나 상황에 따라 유행어와 유행하는 테마를 더하고, 때로는 콘텐츠와 콘텐츠를 짜깁기해 새로운 스낵 컬처가 제작된다. 댓글, 공유 등의 반응을 많이 일으키는 콘텐츠는 좋은 콘텐츠로 여겨진다.

②집합성

스낵 컬처는 다양한 요소로 구성된다. 글과 그림, 소리가 함께 어우러져 있다. 폰트와 이미지, 사운드 파일들이 조합되어 있는 형태다. 대화할 때 말과 함께 표정, 몸짓을 사용하듯 다양한 요소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③장황함

문자를 이용해 글을 쓰면 내용이 논리 정연하게 다듬어지는 반면, 말로 내용을 설명하다 보면 이야기가 늘어지고 장황해지기 쉽다. 스낵 컬처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자로 쓰인 콘텐츠이지만, 속성은 구어적이기 때문이다. 스낵 컬처에서 장황함이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는 콘텐츠의 속도에 있다. 빠르게 올리고, 빠르게 퍼뜨리기 위해서는 문자를 정돈하고 다듬을 시간이 없다. 매 순간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스낵 컬처 콘텐츠는 쉽게 장황해진다.

④반응과 교류

구술 문화에서 이야기의 독창성은 ‘새로운 이야기의 줄거리를 생각해 내는 데 있지 않고, 그때그때 청중과 어떤 특별한 교류를 만들어 내는’[18] 것이다. 스낵 컬처에서도 마찬가지다. 완결성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댓글의 반응이 그대로 스낵 컬처에 반영되어 새로운 콘텐츠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댓글이 재편집되어 유통되기도 한다.

⑤논쟁성

미디어 공간에서 이용자들은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은근한 기 싸움을 벌이곤 한다. 댓글에서는 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자극적인 표현을 써서 논쟁을 유도하기도 한다. 특히 구술적인 특성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는 아프리카 TV 등 스트리밍 라이브 방송 시스템에서는 논쟁적인 특성이 더 강하게 나타나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표현이 난무한다.

⑥참여 유도

스낵 컬처에는 콘텐츠 제작자와 이용자 사이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콘텐츠 소비자도 언제든 제작자로 변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용자들은 콘텐츠를 보다가 불만이 생기면 곧바로 항의하고, 만족감을 느끼면 곧장 찬사를 보낸다. 즉각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며 콘텐츠에 참여한다. 제작자는 이용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⑦항상성

늘 현재에 머물러 있다. 스낵 컬처는 지금 유행하는 유행어만 사용한다. 지나간 유행어는 사용되지 않는다. 능력 있는 제작자는 지금 이 순간의 상황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유행어와 소재를 짜깁기해 콘텐츠를 만든다.

⑧상황 의존성

스낵 컬처 콘텐츠는 특정 상황에 맞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다. ‘먹방’은 식사를 하는 상황, ‘GRWM’[19]은 외출을 준비하는 상황, ‘ASMR’[20]은 편안한 소리를 들으며 집중해야 하거나 긴장을 풀어야 하는 상황에 맞도록 만들어진다. 어떤 상황에서 주로 소비될 콘텐츠인지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호메로스 시대 음유 시인들의 작시법은 그 자체로 구술성이었다. 말이 가지는 고유의 특성을 최대로 활용한 창작법이다. 뉴 미디어 시대, 스낵 컬처 제작의 핵심도 구술성이다. 특히 아프리카 TV나 유튜브 라이브 방송, 인스타그램 라이브 등의 시스템에서는 구술성이 더 확연히 드러난다. 콘텐츠 제작자는 실시간 방송 형태로 콘텐츠를 만들고, 댓글을 통해 청중들의 반응과 분위기가 콘텐츠에 즉각 반영된다. 제작자는 청중의 반응을 살피며 순간적으로 콘텐츠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스낵 컬처 제작자들은 이 플랫폼에서 저 플랫폼으로, 뉴 미디어 공간을 떠돌아다니며 각각의 분위기와 반응에 맞게 유행어와 인기 테마를 짜깁기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음유 시인들이 장터를 돌아다니며 시를 낭송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뉴 미디어 콘텐츠는 다 비슷비슷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다른 콘텐츠와 뉴 미디어 콘텐츠가 구별되는 지점이자, 뉴 미디어 콘텐츠만의 창의성이다. 새로운 상황과 반응에 맞추는 능력이 뉴 미디어 콘텐츠 제작자의 특별한 역량이다.
[1]
월터 옹(이기우·임상원 譯),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2]
육각운 혹은 육보격으로 번역되는 ‘hexameter’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된 시 형식이다. 한 행이 여섯 개의 보격(步格, 소리걸음)으로 이루어졌다. 서사시는 철저한 육보격 운율에 따라 지어졌다. 하나의 보격은 긴 음절 둘(장-장-) 또는 긴 음절 하나와 짧은 음절 둘(장-단단)로 구성되어 있다.
이반 일리치·배리 샌더슨(권루시안 譯),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문학동네, 2016, 39쪽.
[3]
해롤드 이니스(김문정 譯), 《제국과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4]
월터 옹(이기우·임상원 譯),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98쪽.
[5]
호메로스(천병희 譯), 《오뒷세이아》, 도서출판 숲, 2016, 168쪽.
[6]
호메로스(천병희 譯), 《오뒷세이아》, 도서출판 숲, 2016, 240쪽.
[7]
호메로스(천병희 譯), 《오뒷세이아》, 도서출판 숲, 2016, 302쪽.
[8]
이반 일리치·배리 샌더슨(권루시안 譯),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문학동네, 2016.
[9]
월터 옹(이기우·임상원 譯),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10]
《일리아스》 8권 전투의 중단, 10권 도론의 정탐에서 전쟁의 잔혹함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다른 장면보다 더 상세하게 묘사하여 폭력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특히 서로를 향해 공격하는 장면과 격렬한 전투로 인한 풍경 묘사가 잔인하다. 이에 대해 월터 옹은 《일리아스》의 폭력성이 TV나 영화에 맞먹는다고 말한 바 있다.
[11]
2016년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하하가 유행시킨 말. 〈무한도전〉에서는 이 유행어의 원조가 누구인지 분쟁 조정 위원회까지 열기도 했다.
[12]
2016년 개봉한 영화 〈곡성〉에 나온 대사. 당시 TV 광고 등 수많은 매체에서 패러디되었다.
[13]
박근혜 전 대통령의 2016년 대국민 담화 중 나왔던 발언,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는 말이 여러 상황에서 패러디되며 희화화되었다.
[14]
2017년 개봉한 영화 〈범죄도시〉에 등장한 주인공 장첸의 조선족 말투가 유행했다.
[15]
2017년 김생민이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유행시킨 단어.
[16]
2019년 종영한 드라마 〈SKY캐슬〉에서 나온 대사를 패러디한 것. 이 드라마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파생된 유행어가 많다.
[17]
월터 옹이 분석한 구술성의 특징들을 바탕으로 뉴 미디어 콘텐츠의 특징을 도출했다.
월터 옹(이기우·임상원 譯),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18]
월터 옹(이기우·임상원 譯),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70쪽.
[19]
‘함께 외출 준비해요(Get Ready With Me)’의 줄임말. 외출을 준비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은 콘텐츠다.
[20]
자율 감각 쾌락 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바람 소리, 물소리, 속삭이는 소리 등 편안함을 주는 소리를 들려주는 콘텐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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