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차를 탄 고흐와 피카소
완결

지게차를 탄 고흐와 피카소

미술관들의 소장품 공유는 전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되어 버렸다.


지난여름 어느 날 아침, 나는 벨기에 앤트워프(Antwerp)의 미술관에서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을 보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갤러리는 텅 비어 있었다. 공간 한편에 1미터 너비의 나무 상자(crate)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감청색 상자에는 코드 번호와 함께 ‘이쪽을 여시오’라는 노란 글자가 스텐실로 찍혀 있었다. 그 외에 다른 표시는 없었다. 상자의 명목상 주소지는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였지만, 그 안에 든 그림은 세계를 유랑하는 여행자 신분이었다. 이 그림은 전날 밤 시칠리아(Sicily)에서부터 무장한 경비원들과 함께 육로를 이용해 앤트워프에 도착했다. 눈에 띄는 특색이라고는 전혀 없는 상자였다. 바로 그게 핵심이라고 누군가 내게 말했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전시회 큐레이터, 방문 큐레이터, 통역사, 르네상스 미술 전문가, 거기에다 이런저런 이들이 포함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러 문을 통해 들이닥쳤다.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장갑을 낀 두 명의 핸들러(handler)가 테이블로 걸어가더니, 그 위에 펜치, 줄자, 전동 드라이버를 조심스럽게 펼쳐 놓았다. 수술실에 있다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움직임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고 서류를 교환하는 동안, 방문 큐레이터가 낮은 목소리로 핸들러에게 지시를 내렸다. 방문 큐레이터는 이 그림의 여행에 계속 동행하고 있었다. 나무 상자가 바닥에 옆으로 눕혀지더니, 나사가 풀리며 뚜껑이 열리고, 충전재들이 꺼내졌다. 그림을 벽에 고정할 나사들은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방문 큐레이터가 합격이라는 의미로 퉁명스럽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공간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핸들러 한 명의 트레이닝 바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뿐이었다.

마지막 충전재까지 모두 밖으로 나오자, 갤러리 천장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목을 쭉 빼서 상자 안을 들여다보니,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의 ‘도마뱀에게 물린 소년(Bitten By a Lizard)’의 가장자리가 얼핏 보였다. 소년이 아파서 깜짝 놀라며 얼굴을 찡그린 채로 몸을 비틀고 있는, 세상을 놀라게 했던 거장의 초기 작품 중 하나가, 두 개밖에 없는 원작 중 하나가, 바로 여기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마치 셀러브리티 한 명이 우리들 한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아무리 미술관을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라 해도, 그 작품들이 어떻게 해서 그곳에 도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추측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미술계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출입 금지: 전시 준비 중.” 이런 안내문 뒤에서 일어나는 일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지고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전시 중인 중국 송나라 시대의 청동 작품이 대만의 개인 소장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벽에 조그맣게 붙어 있는 작품 표시밖에는 없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아우라’라고 표현했던, 미술 작품을 직접 눈으로 마주하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많은 사람들이 그 미스터리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의 ‘절규’가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걸리고 있다. (Photograph: Kirsty O’Connor/PA)
그 청동 작품을 대만에서부터 영국의 세인트 아이브스(St Ives)까지 가져오기 위해 필요한 절차들, 그러니까 전시·대여 계약, 보험, 포장, 운송, 선적, 통관, 설치 등은 모두 민감하고 비용이 많이 들고 복잡한 작업이다. 모든 전시의 뒤편에는 지구 전체에 걸친 물류 산업의 거미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미술 관련 기관들이 자신들의 소장품을 공유하는 것은 이제는 영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되어 버렸다.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에서 열렸던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전시를 놓쳤는가? 그렇다면 최근에 전시를 오픈한 뉴욕의 브루클린 미술관(Brooklyn Museum)으로 가면 된다. 2017년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에서 열렸던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전시를 놓쳤다면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 갤러리(Tate Britain Gallery)로 가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의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전시는 아부다비와 대만, 일본, 호주, 중국을 경유해 곧 홍콩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 전시는 2016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많은 미술관들이 방문자 수를 늘리기 위해 블록버스터 전시에 의존하고 있다. 그 비용을 조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미술관들과 협약을 맺고 투어 전시를 하는 것이다.

유명 작품으로 채워진 대형 전시에 대한 수요도 크고, 이들을 하나로 묶는 물류 산업에 대한 수요도 강력하다. “일종의 군비 경쟁처럼 되어 버렸어요.” 어느 큐레이터가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미술 시장의 과열은 이미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가장 최근의 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미술 시장의 연간 총 매출액은 680억 달러(77조 4792억 원)에 달하는데, 2008년 이후로 10퍼센트 성장한 것이며, 2018년에만 4000만 건의 거래가 발생했다. 엄청난 수량의 작품이 경매장에서 구매자들에게로 넘어가고, 딜러들에게 갔다가 다시 경매장으로 가고 있는데, 특히 급속하게 성장하는 아시아 시장에서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상업적인 대형 아트 페어가 55개 정도 있었지만, 이제는 260개가 넘는다.

결국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작품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가치를 띠게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투어를 하게 되었다. 순수 미술 작품을 운송하는 일은 돈이 많이 들고, 전문적이며, 기술적으로도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다. 오래된 걸작들은 깨지기가 쉽다. 현대 조각 작품들은 부서지기 쉽거나, 때로는 정말 형편없이 제작되어 있어서 어디로 옮긴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모험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의 문화적 중요성을 가진 유물을 다룬다는 극심한 긴장감까지 가해진다.

어쩌면 여기에 또 다른 역설이 있다. 디지털 복제 시대에 원작의 진정한 ‘아우라’를 잠시라도 느껴 보기를 간절히 바라며, 진짜 세잔(Paul Cézanne)의 작품을, 진짜 벽에 걸어 두고, 마치 작가가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앞에 설 수 있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기회를 우리는 갈망한다. 예술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물론 보여지는 데 있지만, 투어는 제쳐 두고라도 그저 전시되는 것만으로도 작품은 결국 위험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며, 어쩌면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어느 컨저베이터(conservator·예술품 보존 전문가)의 말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술과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술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여’나 ‘제공’ 같은 단어가 정감 있게 들릴지는 몰라도, 마치 프리미어리그 축구팀들 사이에서 스타플레이어를 트레이드하듯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2018년 7월 말,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서는 여름 전시가 끝나가고 있었다. 며칠 있으면 설치팀이 들어와서 15세기 베니스의 화가였던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를 주제로 하는 가을 전시의 준비에 착수할 예정이었다. 갤러리 벽에는 페인트가 새로 칠해지고, 맞춤형 장식장들도 들여오게 될 것이다. 1층 작업실에서는 목공 두 명이 새로운 액자를 조각해서 금박을 입히고 있었다. 전시장 바로 밖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유쾌하기 그지없는 손님들은, 잠긴 문 뒤에서 전시 산업이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 건물 깊숙이에 자리한 사무실에서는 수석 큐레이터인 캐롤라인 캠벨(Caroline Campbell)이 내셔널 갤러리의 샌즈버리 관(Sainsbury Wing)을 축소해 놓은 낡고 꾀죄죄한 모형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모형의 벽들에는 컬러로 인쇄된 작은 그림들이 블루텍 접착제로 붙어 있었다.

캠벨의 계획은 약 100점의 그림과 드로잉, 조각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전시의 주요 작품들은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갤러리, 개인 소장자로부터 배송될 것이다. 이들 작품의 3분의 1은 영국에서는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선보인 적이 없던 것들이다. 이듬해 1월 전시가 종료되면 그 그림들은 베를린의 게멜데갈러리(Gemäldegalerie)로 일제히 이동하게 된다. 엄청난 노고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지만, 이 정도 스케일로 미술관들끼리 협력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많은 것들이 움직이게 되죠.” 얼굴을 찡그리며 모형을 응시하던 캠벨이 말했다. 그러고는 작은 벽면을 따라 만테냐의 작품 모형을 몇 밀리미터 위로 옮겼다.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열린 조지 마이클 컬렉션 예술품 경매에서 핸들러들이 마이클 크레이크-마틴(Michael Craig-Marti)의 ‘무제(섹스)’를 옮기고 있다. (Photograph: Kirsty O’Connor/PA)
그녀는 이 전시의 기획에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시 아이디어를 윗선에 처음 보고한 것이 2012년이었다. 이후 그녀는 다른 미술관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베를린의 관계자 전원을 초대하고, 프랑크푸르트, 비엔나, 로스앤젤레스, 브리스톨, 브레시아, 코펜하겐, 상파울루를 비롯한 다른 많은 도시들에 있는 미술관에 연락해서 작품 대여를 논의했다. 가능하다면 캠벨 자신이 직접 방문해서 대여 요청을 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면 런던으로 작품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은 더 커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 작품들은 보물이에요. 그 점을 명심해야 해요. 다른 미술관들이 그들이 가진 가장 눈부신 왕관을 우리에게 내어 주는 겁니다.”

어느 미술관의 레지스트라(registrar·소장품 관리 담당자)는 대형 전시를 열어야 하는 압박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협상도 아주 많이 하고, 벼랑 끝 전술도 많이 폅니다. 대여라는 건 협상 카드와 같은 거예요. ‘좋습니다, 고갱(Paul Gauguin)을 빌려드리지요. 그런데 혹시 당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티치아노(Titian)에 대해서 우리가 보낸 공문은 받으셨나요?’”

협상에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대여(loan)’나 ‘제공(courtesy of)’ 같은 단어가 정감 있게 들릴지는 몰라도, 마치 프리미어리그 축구팀들 사이에서 스타플레이어를 트레이드하듯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뉴욕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MoMA)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들은 명성과 기부금, 컬렉션 목록 덕분에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별 하나짜리 소규모 갤러리도 전략만 잘 구사한다면 그런 거물들에게 한 방을 먹일 수도 있다.

일단 대여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가 이뤄지면, 이제 진짜 흥정이 시작된다. 작품을 언제, 어떻게 운송할 것인가? 보험료와 운송비는 누가 지불할 것인가? (보통은 빌리는 쪽이 부담한다.) 어떤 종류의 디스플레이 가구를 제작해야 하는가? 방탄유리, 경보 장치, 경비 등 어떤 종류의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 온도와 습도는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

앞서 소개한 레지스트라의 설명에 의하면 갈등이 일어나는 곳은 대개 내부다. 미술관 소속의 큐레이터와 컨저베이터가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다. “이걸 아셔야 해요. 14세기 피렌체파의 판넬화라면 너무 연약해서 어디로 가지고 나갈 수가 없어요. 다른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은 그걸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요.” 그가 웃었다. “작품을 전시하는 순간, 바로 위험에 처하는 거예요. 만약 제 말대로만 한다면 아무것도 전시할 수 없는 거죠.”

전시회에서 요구하는 작품들은 항상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확실한 것,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것. 통관 허가도 필요하다. 어떤 작품들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어서 정부 차원에서 대여를 규제하기도 한다. 1963년에 ‘모나리자’가 미국으로 전시를 떠났을 때, 이를 중재했던 것은 다름 아닌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였다. 정치적 상황이나 서류 문제는 아주 복잡해서, 때로는 전시가 열리기 불과 몇 주 전까지도 전시 품목이 확정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케네디가 1963년 워싱턴 D.C.의 미국 국립 미술관에서 ‘모나리자’의 제막을 걷어 낸 후의 모습 (Photograph: MediaPunch Inc/Alamy Stock Photo/Alamy Stock Photo)
보험은 특히 골치 아픈 항목이다. 영국에서는 많은 대여 작품들이 정부 보상제(Government Indemnity Scheme·GIS)에 의해 보상이 된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빌려 온 모네(Monet)의 그림을 누가 밟고 지나가면, 영국 디지털·문화·미디어·스포츠부(DCMS)가 보상금을 지불한다. 이런 제도 덕분에 영국의 미술관들은 별도의 민간 보험에 돈을 낼 필요가 없다. 최정상급 아티스트의 작품 하나를 석 달간 대여하는 데 드는 민간 보험 비용은 대략 8만 파운드(1억 1948만 원) 정도다.

이렇게 합리적으로 보이는 제도가 있지만, 지나치게 활성화된 미술 시장이 이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경매 시장에서 순수 미술 작품의 평균 가격은 2000년 이후 두 배가 되었는데, 이는 곧 대여 작품 보험료도 치솟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장 최근의 정부 발표를 보면, DCMS가 예술 작품들에 대해 ‘현재 보장하고 있는’ 금액은 187억 파운드(27조 9286억 원)에 달한다. 2018년에 테이트(Tate) 한 곳에서만 정부가 잠재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대여 미술품에 대한 보상 금액은 82억 5000만 파운드(12조 3215억 원)였다. 2017~2018 연계 시즌으로 계산하면, 테이트의 보상액은 더 상승해서 117억 파운드(17조 4771억 원)였다. 테이트 측에서는 “우리의 전시 프로그램에는 근현대 미술의 주요 작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국 납세자들에게 다행스러운 것이라면, GIS에 대한 보험금 청구가 그리 자주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예술 작품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 심각하게 손상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34년 동안 이 제도로 지출된 연간 평균 비용은 4만 6000파운드(6871만 원)에 불과했다.

이런 보험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터뷰를 했던 컨저베이터 한 명은 그녀가 맡은 작품들에 대해서 여전히 안심하지 못하고 초조함을 느꼈다. 운송 과정을 잘 견딜 수 있을지. 도착해서 잘 다루어질지, 사소한 요인으로 불에 타는 건 아닐지, 나가 있는 동안 필요한 모든 조치들이 취해질지. 미술품의 운송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그가 해외로 장기간 여행을 떠나는 모험심 많은 어르신을 걱정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를 끊임없이 유랑하는 투어 전시의 비용은 그 작품들을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가 치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960년대 초반 장거리 화물을 직항으로 빠르게 실어 나를 수 있는 대형 제트 항공기가 출현하면서 세계 곳곳을 누비는 블록버스터 전시가 시작되었다. 그 시초로 많이 언급되는 건 ‘대형 전시의 효시’라고 불리는 카이로 박물관의 대표전인 ‘투탕카멘의 보물(Treasures of Tutankhamun)’ 전시다. 이 전시는 1961년에 미국에 처음 도착한 이후 20년 동안 투어를 계속했다. 일본, 프랑스, 영국, 소비에트 연방, 독일 등을 거치며 유례없이 많은 관람객을 모았다[심지어 영화배우 스티브 마틴(Steve Martin)이 발표한 우스꽝스러운 싱글 앨범 〈King Tut〉도 1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유물들은 특수 제작된 강화 나무 상자에 담겨서 세 대의 비행기에 나뉘어서 운반되었다. 당시로서는 전례 없던 900만 파운드(133억 원) 상당의 보험에 들어 있었는데, 현 시세로 1억 3500만 파운드(1998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1972년에 이 유물들이 런던에 도착할 때에는, 영국 공군의 수송기 한 대가 그 유명한 투탕카멘왕의 가면을 실어 나르는 데 동원되었다.

재클린 케네디가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던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를 설득해서 1963년에 미국에서 ‘모나리자’를 전시할 수 있는 동의를 얻어 내자, 루브르 박물관의 큐레이터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많은 이들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항의했다).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의 관장조차도 극도의 부담감을 느껴서 전시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침내 미국 연안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모나리자’를 실은 정기선이 뉴욕항으로 들어왔다. 그림을 실은 화물 상자는 모든 교통 운행이 통제된 상태에서, 보안 차량들의 호위를 받으며 시내를 가로질러 워싱턴에 입성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보관되던 당시 소방 스프링클러가 오작동하는 바람에 물에 노출되고 말았다(다행스럽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그 그림은 유리로 보호되고 있었다).
1977년 뉴올리언스의 핸들러들이 ‘투탕카멘의 황금 가면’의 포장을 풀고 있는 모습 (Photograph: Granger/REX/Shutterstock)
‘모나리자’ 투어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한 관람객은 그 전시를 일컬어 “성물과도 같은 걸작들이, 위험천만함을 무릅쓰고, 중무장을 한 채로 처음 나선 외부 전시”라고 말했다. 1964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위대한 작품 ‘피에타’(1499)가 뉴욕의 플러싱 메도스(Flushing Meadows)에서 열린 ‘1964~1965 월드 페어’에 참가했는데, 관람객들은 두꺼운 유리 벽 뒤에 전시된 이 작품을 무빙워크를 타고 지나가면서 봐야 했다.

블록버스터 투어 전시의 인기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점차 증가해 왔다. 《뉴욕타임스》의 건축 비평가는 1978년에 이에 대해 “미술관의 성장은 서커스 같은 구경거리나 현금 인출기 같은 것”이라고 논평했다. 그런데 이는 재정 지원이 감소하면서 미술관들이 소장품으로 돈을 벌어야만 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 후 5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완전히 다른 환경을 마주하고 있다. 2018년 영국박물관은 국제 투어 전시를 13회 개최했고,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국제 전시를 11회, 영국 내 투어 전시를 7회 개최했다.

전 세계를 끊임없이 유랑하는 투어 전시의 비용은 그 작품들을 사랑하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가 치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서질 것 같은 대여 작품들이 설치된 화려한 전시회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 그림의 근처에도 다가갈 수 없다. 입장권 한 장에 30파운드(4만 4800원) 이상을 지불하고서도 말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전시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종종 어떤 이들은 블록버스터 전시 시대의 종말을 말하기도 하지만,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의 렘브란트전이나, 루브르의 다빈치전이나, 바우하우스 100주년 전시 같은 것에서 볼 수 있듯, 그 기세가 수그러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의 영향과 라이브 퍼포먼스와의 협업 등으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이러한 대형 전시들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예술의 형태인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미술관들은 대여 작품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운반 요원이나, 가장 이상적으로는 컨저베이터가 항상 곁에 붙어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 작업을 ‘못에서 못까지’라고 부른다.


사우스 켄싱턴(South Kensington)에 위치한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내부에 있는 복잡한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방화문이 줄지어 있고 지문 인식 잠금 장치로 보호되어 있는 조용한 복도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환승’ 창고인데,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작품들이 포장되어 내보내기 직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다.

어느 날 오후 내가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적재 구역 근처에 비어 있는 회색 나무 상자들이 있었다. 모든 미술관들은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짙은 푸른색이다.

방화문 뒤에는 보물들이 놓여 있었다. 17세기의 네덜란드 풍경화 한 점이 완충 쿠션 위에 놓여 있었고, 푸른 웨지우드 도자기가 철제 선반 위에 올라가 있었다. 엄청나게 부유한 사람이 벼룩시장이라도 벌여 놓은 듯한 광경이었다. ‘촬영 금지’라는 손으로 쓴 쪽지가 붙어 있는 곳에서 나는 한스 베그너(Hans Wegner)의 클래식 의자 작품과 부딪칠 뻔했는데, 손 하나가 나타나 내 팔을 붙들고 안전한 곳으로 안내했다. “작품이 이동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입니다.” 나를 붙잡아 준 니코스 고골로스(Nickos Gogolos)가 말했다.

고골로스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수석 레지스트라다. 여덟 명의 팀원을 이끄는 그의 업무는 소장품들을 관리하는 것인데, 관내와 관외를 모두 관할한다. 현재 이 박물관이 한 해에 전 세계 350개 전시장에 3000점의 작품을 대여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이는 영국의 대저택과 지역 갤러리들 전체에 장기 대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수량이다), 고골로스의 업무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작품 대여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이 엄청나게 바빠졌어요.” 사무실 의자에 앉으면서 고골로스가 말했다. 그의 알림판에는 마음을 다스리는 문구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2001년 런던의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설치되고 있는 마티스의 ‘기대어 누운 누드’ (Photograph: Peter J Jordan/PA)
박물관급 예술품을 운송하는 일은 전문적인 비즈니스다. 런던에 위치한 모마트(Momart)와 콘스탄틴(Constantine) 같은 소수의 일류 업체들만 주요 미술관의 신뢰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술관들은 대여 작품을 운송하는 과정에서 운반 요원이나, 가장 이상적으로는 컨저베이터가 항상 곁에 붙어 있을 것을 요구한다. 이 작업을 ‘못에서 못까지’라고 부른다. 어떤 작품 하나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의 38A 보관실을 나오는 순간부터 9200킬로미터 떨어진 상하이의 어느 박물관 벽에 걸릴 때까지 계속해서 같은 사람이 동행하는 것이다. 중간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간이 있지 않은 한, 그들은 모든 운송 단계마다 예술 작품과 꼭 붙어서, 나무 상자에 꼭 붙어서 다녀야 한다.

박물관에서 나무 상자가 이후의 수송을 담당할 보안 차량에 실리는 순간부터 여정이 시작된다. 주로 어슴푸레한 새벽녘일 때가 많다. 책이나 필사본 같은 작은 물품은 직접 기내로 반입해서 나르기도 하는데, 물론 이 경우에도 관련 서류가 필요하며 보안 검색대에서 기나긴 심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작품들은 별도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을 배정받는다. 고골로스의 설명이다. “머리 위 선반에 넣어 두고 내려 버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죠.”

조각품들 가운데에는 너무 거대하거나 무거워서 해상 컨테이너로 수송해야 하는 것들도 있다[2018년 12월 초에 아트 바젤 마이애미(Art Basel Miami)로 그런 수송 작업이 있었는데, 마침 허리케인 시즌의 막바지였다. 이처럼 해상 운송을 한다고 해도 또 다른 위험 요소는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역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방법은 비행기에 의한 화물 운송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륙 네다섯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나무 상자를 검사하고 기체 화물칸에 실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정기 여객기를 예약해서 보내는데, 그렇게 하면 운송 요원이 함께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 상자가 너무 클 때는 화물 비행기 안에 훨씬 더 큰 공간을 예약해야 한다.
 

만약 마티스의 그림 세 점을 실은 트럭이 지금 라트비아에서 눈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면, 그런 게 스트레스가 되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은 당연히, 하나도 없다. 작품 하나를 호주에서 영국으로 가져왔다가 다시 돌려보내는 데에만 6만 파운드(8959만 원)가 든다.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트럭 운송을 해도 2만 5000파운드(3733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 발송하는 측에서는 작품들이 공항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긴급 운송’으로 처리되기를 원하지만, 대부분은 우선순위 수하물로 다루어진다. 레지스트라로 일하는 고골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말에 실어서 나르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당일 발송이 되고, 비용도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최근에 운송업체가 공항에서 서류를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우리 물건을 그냥 짐짝 다루듯 실어 버리려고 하더군요. 생선 박스한테도 밀려날 뻔 했어요.”

고골로스는 한 운송 요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화물 상자를 계속해서 잘 지켜보았고, 서류에도 서명을 했는데, 그만 비행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출발 라운지에서 저한테 전화를 했더라고요. 운송하기로 했던 작품이 방금 전에 이륙을 했다고 말이죠.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젠장, 큰일났다.’” 2010년에는 어떤 운송 요원이 뉴욕의 호텔 바에서 술에 취해 19세기 프랑스 화가 코로의 초상화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85만 파운드(12억 6900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다행히 그림은 몇 주 뒤 발견되었다.

목적지 공항에 도착하면, 운송 요원은 나무 상자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을 지켜본 다음, 전시될 예정인 미술관까지 데려다줄 온습도 조절 장치가 설치된 트럭에 실리는 것까지 지켜본다. 만약에 중간에 하룻밤을 묵어가야 하는 일정이라면, 이동 경로상에서 역시나 보안이 되어 있고 온습도 장치를 갖춘 순수 미술품 전용 보관 창고를 반드시 예약해 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 보통은 이 방법이 더 많이 사용되는데 ― 운송 트럭 안에서 누군가 항시 머물면서 그 안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한다.

중간 규모의 전시라고 해도 중요한 작품이 80점 정도는 들어간다. 그 작품들 모두가 정확히 정해진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대형 전시의 설치 작업은 빠듯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운송업체들의 도착 시간은 시간대별로 지정된다). 작품 개수에다 투어 중인 전시 수를 곱해 보면 ―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은 현재 12건의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 레지스트라들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한 포스터를 책상 앞에 붙여 놓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고골로스의 말이다. “만약 마티스(Henri Matisse)의 그림 세 점을 실은 트럭이 지금 라트비아에서 눈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면, 그런 게 스트레스가 되는 겁니다. 한번은 미국을 가로질러서 작품을 운송하던 트럭이 텍사스 한가운데에서 고장이 난 적이 있었어요. 교체할 부품이 도착하려면 최소한 몇 시간은 걸리는 곳이었죠. 그들은 길가에 차를 세워 두고 있었어요. 저는 그저 트럭의 짐칸에 실려 있는 게 뭔지에 대해 아무도 모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미술 작품이 이동 중에 있다는 사실을 운송 과정에서 절대로 표시를 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운송 박스들은 합판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안에는 여러 겹의 완충 포장재가 채워져 있다. 대여를 해주는 쪽에서는 전시 온도를 항시 20도로 맞춰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운송 과정에서는 그 기준을 지키는 게 대개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의 목표는 운송 박스가 갤러리 외부에서 머무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된다(기술자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온도 반감기’라는 용어가 있는데, 운송 상자 내부의 온도가 50퍼센트 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미술품을 보내는 사람들은 공기 완충 장치가 달린 특장 트럭을 예약하지만, 충격 흡수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게티(Getty) 보존 연구소는 우주 왕복선 용도로 개발된 화황 고무를 이용해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개척해 왔다. 테이트의 기술자들도 이 분야를 이끌고 있는데, 실험용 그림에 가속도계를 달아서 높은 곳에서 떨어트린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한다(이 실험에 참여했던 전직 컨저베이터는 ‘아주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이 실험에서 어떤 작품은 열일곱 번을 넘어지고 난 후에 그림에서 균열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연구진은 결론을 내렸다. ‘일반적인 그림’은 50G의 중력과 시속 145킬로미터의 자동차 사고에도 견뎌 낼 수 있다고 말이다. 전직 컨저베이터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운송 상자들은 높이가 높고 홀쭉해서 넘어지는 것이 가장 큰 위험 요소’다.

최첨단의 운송 상자 안에는 경로 추적 장치와 함께 충격 모니터가 내장되어 있다. 1963년에 ‘모나리자’가 미국으로 갈 때는 운송 상자가 물에 뜰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림을 실은 여객선이 대서양을 가로지른다는 사실을 고려한 것이다.

박물관급 예술품의 가치를 고려한다면, 보안도 상당히 철저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미술 작품들이 육로로 운송되는데, 트럭의 내부 또는 뒤따르는 차량에 무장한 경호 인력들이 탑승한다. 테이트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던 니콜라 무어바이(Nicola Moorby)는 말한다. “이탈리아에서는 마치 액션 영화라도 찍는 것 같아요. 경찰이 호위를 해주고, 막 그러거든요. 미국은 약간 마초스러운 분위기가 있어요. 운반대 위에 누군가 총을 들고 앉아 있죠. 누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만약에 뭔가 일이 벌어지면, 그냥 차 안에 계세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월급 받으면서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고골로스의 말에 따르면, 영국은 조금 더 절제된 방식을 선호한다고 한다. “런던 타워에서 왕실 보물들이 나올 때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물론 모르시겠죠. 트럭에 ‘모네가 타고 있어요’ 이렇게 쓰여 있지 않으니까요.”

무어바이는 작업 방식을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 전동 드릴을 가지고 운송 상자 앞에서 작업을 하려고 하면, 제가 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러지 마세요.’ 스크루 드라이버만 사용해야 하거든요. 상상하기 싫은 일들이 있어요. 공항 활주로에 운송 상자가 방치되어 있다거나, 운송업체가 발이 묶이는 경우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주요 미술관들에서는 아주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기 때문에 일이 잘못되는 경우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직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영상을 보여 줘요. 트럭의 앞 유리창으로 내다보이는 끝없이 뻗어 있는 아우토반의 풍경 같은 것이죠.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은 그렇게 운송이 되죠.”

그렇지만 여전히 잊지 못할 에피소드는 하나씩 가지고 있다. 무어바이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투어는 베니스의 한 궁전에서 개최된 임시 특별전이다. 달리(Salvador Dali)의 주요 작품 하나를 들고 가야 했는데, 공항에서 궁전까지 가는 유일한 방법은 수 세기 전 틴토레토(Tintoretto)나 티치아노의 그림에서나 볼 법한 바지선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대운하를 따라서 달빛을 받으며 아름답고도 인상적인 입구로 거슬러 올라갔어요. 물 위에서 바로 갤러리 후문으로 연결이 되더라고요.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었죠.”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설치된 작품 (Photograph: Zsolt Czegledi/EPA)
예술 작품이 이동을 하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물류 작업은 언제나 골칫거리였다. 1504년 5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작가의 작업실에서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으로 이동될 때, 800미터도 되지 않는 그 거리를, 이 ‘거대한 대리석 거인’을 그곳에 일으켜 세우는 데까지 40명도 넘는 장정들이 거의 한 달 동안 힘을 쏟아부어야 했다. 거대한 작품을 실어 나르는 데 있어서의 문제점은 15세기 베니스에서 해결이 되었다. 당시 베니스는 가장 국제적인 면모를 갖춘 도시였다. 베니스의 화가들은 항상 운하의 습기, 소금기 많은 기후와 사투를 벌여야 했다. 벽화나 판넬화에는 상당한 악조건이었다. 작업이 끝나도 마르지 않고 뒤틀려 버렸던 것이다. 1470년대에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리는 화폭을 대체하기 위해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곳에는 돛을 만드는 데 이용되는 재료가 풍부했다. 바로 캔버스였다. 캔버스는 기적과도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자마자 말랐고, 주문한 고객에게 둘둘 말아서 보낼 수도 있었다. 그걸 전달받은 고객은 다시 펴서 액자에 걸어 두기만 하면 되었다.

사건 사고는 그 시대에도 있었다. 1580년 틴토레토는 바로 얼마 전에 작업을 마친 대작 때문에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곤자가(Gonzaga) 가문의 주문으로 그렸던 여덟 편의 연작 중 가문 근거지인 만토바(Mantua)로 보낸 처음 네 개의 작품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덜 마른 상태에서 그림을 말아 그 상태 그대로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운송한 탓이었다. 티치아노가 후원자이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Philip II)에게 보낸 서신을 살펴봐도 배송의 어려움을 말하는 부분이 정말 많이 나온다.

현재 헤이그에 소장되어 있는 16세기 궁정 화가 프랑수아 뷔넬(François Bunel)의 유화에는 화가의 작업실이 묘사되어 있다. 작은 조각상들이 선반 위에 놓여 있고, 벽에 걸린 정물화와 풍경화는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땀에 젖은 10여 명의 남자들이 액자를 등에 묶은 채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고 있다.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전문적인 예술품 핸들러가 묘사된 작품이다.
16세기 말 화가의 작업실 풍경을 엿볼 수 있는 프랑수아 뷔넬의 작품 ⓒThe Confiscation of the Contents of a Painter's Studio

노련한 핸들러들은 작품이 지하 수장고를 떠나는 순간부터 갤러리의 정해진 위치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매 과정에 투입되는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을 계산한다.


작품 상자가 목적지에 일단 도착하고 나면, 이제는 핸들러들이 나설 차례다. 대형 미술관들은 자체 인력들이 맡아서 하지만, 운송업체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직접 핸들러들을 고용하고 있다. 이들은 매 단계마다 작품을 소중하게 다루는데, 갤러리뿐만 아니라 아트 페어나 개인 고객을 위한 서비스도 제공한다. 이들은 0.5톤의 아시리아 화상석을 기중기를 이용해서 들어 올린 뒤 좁은 통로에 내려놓기도 하고, 주머니 크기만 한 현대 회화 작품의 위치를 벽에서 몇 밀리미터 위로 옮기는 일을 하기도 한다.

내가 인터뷰를 했던 핸들러들 중에서는 자신의 업무를 예술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실제로 그들 중에는 돈을 벌기 위해 핸들러로 일하는 예술가들도 많다. 작품의 규모나 재료 ― 캔버스, 대리석, 합판, 종이, 네온 ― 를 보자면 예술이란 아이러니한 세계다. 온갖 정성을 들여서 제작이 되고 전시에까지 이르지만, 그 작품들에 어떠한 생채기라도 내지 않기 위해서 일하는 일군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다. “화려함을 좇아서 이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뉴욕의 대형 미술관에서 핸들러로 일하는 사람이 내게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인터뷰를 했던 다른 몇 명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자신 있게 밝힌 핸들러가 한 명 있었는데, 마이키 홀(Mikei Hall)이었다. 비좁은 영국의 전시 설치 업계 내에서도 그 일에 관해 자랑스럽게 자주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다. 그는 현재 테이트의 선임 핸들링 기술자인데, 그곳에서만 30년째 일해 왔다.

어느 가을날 오후, 우리는 테이트 브리튼에서 만났다. 학생들 사이를 걷던 중, 그는 때때로 자신의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했다. “뭔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했지?’”

노련한 핸들러들은 작품이 지하 수장고를 떠나는 순간부터 갤러리의 정해진 위치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매 과정에 투입되는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을 계산한다. 출입문을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을지를 확인하는 것은 이 업무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이야기를 나눈 어떤 컨저베이터는 미술품 수집업체 한 곳의 일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장하고 있는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 크기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전시실로 옮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 작품을 운반대에서 내려 둘둘 말아야 했다. 이런 걸 ‘더블 핸들링(double-handling)’이라고 부르는데, 작품을 한 번 이상 만질수록 자연히 파손 위험도 덩달아 높아진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경우다.

뉴욕에서 일한다고 했던 익명의 핸들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업무는 모든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흠집이 나서도 안 되고, 큐레이터의 긴장도 풀어 주어야 하고, 아티스트도 안심을 시키면서 말이죠.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아주 품위 있고, 주의 깊고, 세심하게 작업을 해야 합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예술 작품도 긴 여정을 마치면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은 포장을 풀기 전에 바뀐 환경에 적응시키기 위해 24시간 전에 갤러리로 들여온다. 나무 상자가 열리게 되면 별다른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 즉시 ‘컨디션 체크’가 이루어진다. 통상적으로는 실제 작품을 사진과 비교하고, 이미 작품에 나 있던 결함들, 그러니까 ‘텐팅(tenting)’이나 ‘크리즐링(crizzling)’, 유리성 마모 같은 그림 표면의 흠집들을 정리해 놓은 표를 보면서 다시 한번 확인한다.

모두가 쉬쉬하기는 하지만, 이송 과정에서 손상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아트 페어와 경매장은 특히나 작품을 대충 다루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들에게는 그냥 상품이거든요.” 한 컨저베이터의 말이다. 상업 갤러리라고 해서 사정이 더 나은 것도 아니다. 그 컨저베이터가 말하기를, 그녀는 최근 물에 손상된 그림의 복원을 마쳤는데, 보안 요원이 그림을 열린 채광창 밑에 놔두어서 생긴 일이었다. 지게차 역시 치명적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나무 상자를 뚫고 들어갈 수도 있거든요.”
2007년 헨리 무어(Henry Moore)의 ‘점들이 있는 타원’(1968~1970)이 런던의 큐 왕립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Kew)에 설치되고 있는 모습 (Photograph: Cate Gillon/Getty Images)
그녀 인생의 골칫거리는 버블랩(bubblewrap, 일명 뽁뽁이)인데, 이것조차도 건조한 그림에는 쓸린 자국을 남기기 때문이다. 최근 어떤 수집가 한 명은 절약 정신이 지나치게 투철했던 나머지, 적절한 운송 상자를 사용하는 데 돈을 들이지 않고 자신이 직접 버블랩으로 둘둘 말아서 골판지로 겉포장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작품이 손상을 입고 말았다.

어떤 작품들은, 특히 현대의 작품들은, 애초에 만들어질 때부터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1970년대부터 나온 파피에 마세(papier-mache)라는 종이는 잘 바스러지는 걸로 악명이 높고, 198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 중에서 전기 장치가 들어 있는 조형 작품들은 전선이 조잡하게 얽혀 있기로 유명하다.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의 동물 보존 설치 작품들에서는 유해한 수치는 아니지만 포름알데히드 가스가 누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데미언 허스트의 ‘파리’라는 회화 작품은 수천 마리의 죽은 파리들을 캔버스 위에 붙여서 제작되었는데, 허물을 벗는 파리의 습성이 남아 있다는 소문이 있다. 인터뷰를 했던 어떤 핸들러는 “게다가 냄새도 지독하게 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화이트큐브(White Cube) 측은 이렇게 말했다. “파리들이 없어지거나 떨어지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가장 멀리 이동한 작품의 기록은 아마도 데미언 허스트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2003년에 발사된 화성 탐사선 비글2(Beagle 2)에는 알루미늄 판에 점을 찍은 그의 그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과학 장비들의 수치를 보정할 때 사용되었다. 이듬해 탐사선이 화성 표면에 충돌하면서 이 작품은 분실이 되었는데, 아마도 역사상 가장 손실이 컸던 예술품 취급 사고로 기록될 것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미술관 건물들은 요즘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무겁고 커다란 현대 미술품을 수용하도록 설계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벽이나 바닥을 강화하거나, 크레인을 사용해 창문으로 작품을 집어넣거나 지붕 위로 들어 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2015년 영국 왕립 미술원(Royal Academy)에서 열렸던 아이웨이웨이(Ai Weiwei) 회고전에서는, 미술품 전문 운송업체 모마트의 기술자들이 90톤에 달하는 철근을 박스에 담아서 중앙 계단 위로 실어 날랐다. 적어도 이 작품은 연약하진 않았다. 베니스 비엔날레(Venice Biennale)는 중세의 아르세날레(Arsenale) 단지를 중심 전시 지역으로 활용하는데, 이곳으로 대형 조형 작품을 들여오는 일은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 이러한 작업에는 운하의 진흙 위에서 지탱할 수 있는 지지대를 가진 특수한 크레인 장비들이 동원된다.

1970년 6월, 3.5톤에 달하는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조형물 하나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 미술관 부지 위로 쓰러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크레인의 기초가 붕괴된 것이 원인이었는데, 이 사고로 두 명의 엔지니어가 목숨을 잃었다. 1971년 미국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의 워커 아트(Walker Art) 박물관에서도 사망 사고가 있었다.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념비적 작품인 ‘조각 3번(Sculpture No 3)’의 절반을 이루는 2미터 44센티미터 너비의 강철판이 지지대를 이탈해, 설치 작업을 하던 레이몬드 존슨(Raymond Johnson)을 덮친 것이다. 리처드 세라는 무죄로 판명이 났지만, 설치 업체에게는 관리 부주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내가 대화를 나눈 또 다른 핸들러는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대형 그림을 트럭에서 꺼내던 순간의 일을 떠올렸다. “어마어마한 크기였어요. 열 명이 달라붙었는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어요. 거의 뒤집어질 뻔했어요. 그런 엄청난 경우에도 융통성은 있어요. 업체에서는 작품이 흔들거리면 멀리 떨어지라고 말해요. 예술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작품들은 엄청나게 비싸다는 거 아시죠? 떨어트리기라도 한다면 바로 잘리겠죠.”

작품이 어딘가로 이동할 때는 이케아(Ikea) 가구 조립 설명서보다 정교하게, 조립 방법을 단계별로 상세히 알려 주는 문서가 함께 따라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케아 가구를 한 번이라도 조립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핸들러가 설명서를 보강해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살아 있어서 직접 지침을 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핸들러와 큐레이터가 어떻게든 알아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이런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면서 만족스러운 점은 무엇인지 뉴욕에서 일하고 있는 핸들러에게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작품에 숨은 비밀을 어느 정도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림의 뒷면을 볼 수도 있고, 조형물이 어떻게 조립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죠. 내 손에 세잔과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이 쥐어져 있는 거예요. 작은 낙서를 볼 수 있고, 대가들이 캔버스를 어떻게 재활용했는지도 알 수 있어요.”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아주 은밀한 작업이죠, 아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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