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학의 유령 넘어서기

2023년 10월 19일, explained

미국자연사박물관이 과거를 반성한다. 우리도 우리의 현재를 성찰해야 한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뉴욕의 미국자연사박물관이 1만 2000개의 인간 유해 수집품을 점검한다. 1940년대에 비윤리적으로 수집된 유골이 우생학 등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됐다는 이유에서다. 박물관장 션 디케이터(Sean M. Decatur)는 이러한 유해를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것이 “착취를 확대”한다며 “이들은 조상이며, 어떤 경우에는 비극의 희생자”라고 밝혔다.

WHY NOW

1940년대, 미국자연사박물관은 우생학의 첨단에 서있었다. 우생학을 위해 세워진 두 동상은 정상적인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미국 국민의 초상’을 유지하는 일이라 말한다. 80년이 흐른 지금, 우생학은 폐기됐다. 그럼에도 우생학의 유령은 우리 주변을 조용히 맴돈다. 우생학의 신화를 넘어서야만 미래의 박물관이 보인다.

박물관의 뼈들

박물관의 인간 유해 전시는 꾸준한 논쟁거리였다. 파리 인류박물관에는 호주 원주민의 머리, 이누이트의 유해, 세네갈 남부 지역인 카자망스 왕의 유해 등이 소장돼 있다. 유해를 본국, 혹은 가족의 곁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주장과 미래의 연구를 위해 자료를 엄격히 보관해야 한다는 연구적 관점이 맞선다. 이번 미국자연사박물관의 결정은 이 논쟁과는 거리를 뒀다. 당시의 유해 수집 자체가 “극심한 권력 불균형”에 기반을 두고 이뤄졌을 뿐 아니라, 19세기와 20세기의 연구자들이 그러한 유해를 우생학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션 디케이터의 말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의 전시품들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과학적 인종 차별, 우생학

유해 수집 당시 미국자연사박물관의 큐레이터로 근무한 해리 샤피로(Harry L. Shapiro)는 1956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우생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우생학 담론을 주창한 프랜시스 골턴은 인간의 지적, 도덕적 능력이 유전적으로 결정된다고 믿었다. 자연선택은 느리게 이뤄질 수밖에 없으니, 사회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우성 유전자를 선택해야 한다. 우생학은 열등한 개체의 출생을 낮추는 부정적 우생학과 우등한 개체의 출생을 높이는 긍정적 우생학으로 구체화됐다. 히틀러는 전자를, 백인우월주의는 후자를 택했다. 우생학은 제국주의 시절 무르익었다. 우생학의 시대, 인종 차별은 당연히 과학적이었다.

우생학의 뿌리, 진화론

우생학의 아버지인 프랜시스 골턴은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의 외사촌이었다. 다윈은 골턴을 낳지 않았지만, 우생학은 분명 진화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진화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일이나 사물 따위가 점점 발달해 감.” 진화(evolution)는 발달(develop)의 과정이라는 뜻을 함축한다. 정작 다윈은 진화와 적자생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진화’는 《종의 기원》 6판, ‘적자생존’은 《종의 기원》 5판에서야 등장한다. 그 이전까지 진화는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라는 구절로 표현됐다. 다윈의 진화론은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적합한 자만이 살아남는 냉혹한 자연을 말하지 않는다. 생물체는 그저 변화를 지속하며 계승할 뿐이다.

생명의 나무

다윈의 진화론 이전까지, 생명은 위태로운 사다리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사다리 꼭대기에는 신이, 그 밑에는 천사가, 그 밑에는 인간이, 그 밑에는 열등한 짐승들이 자리했다. 다윈은 생명의 사다리를 대체할 생명의 나무 개념을 제시한다. 나무에서 줄기가 뻗어 나오듯 다양한 생물들이 실은 공통 조상에서 출발했다는 논리다. 이 논리에 따르면 동물원의 침팬지는 수 세기가 지나도 인간이 될 수 없다. 침팬지와 인간은 공통 조상을 공유할 뿐, 서로가 무언가의 목적이나 과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생학은 ‘변화를 동반한 계승’에 하나의 방향성과 목적을 덧씌운다. 인위적인 목적이라는 한 겹을 두른 진화론은 침팬지를 인간으로, 모든 인간을 우월한 백인으로 만드는 데 집중했다.

노마와 노먼

우생학의 기본 정신은 1945년 6월, 미국자연사박물관 전시장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노마와 노먼’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마와 노먼은 ‘전형적인(typical)’ 생식 능력을 갖춘 두 남녀로 소개됐다. 이들의 이름처럼, 동상은 인간의 평범한 모습을 제시하는 걸 목표로 했다. 노마와 노먼이 제시한 평범한 인간은 건강한 신체를 가진 백인 이성애자였다. 해리 샤피로는 노마와 노먼이 인종 혼합으로 인해 쇠퇴할 미국을 살려 낼 것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칭찬이 담긴 기사의 제목은 ‘미국 국민의 초상(A Portrait of the American People)’이었다. 우생학은 정상과 평범함의 신화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였다.

BMI 지수

우리는 평범함의 신화라는 우생학의 정신에서 벗어났을까? BMI 지수는 개인의 체중을 키로 나눈 후, 그 숫자를 제곱해 계산하는 건강 지표다. 1970년대부터 체지방을 측정하는 주요 지표로 쓰였는데, 최근 수년간 BMI 지수가 인종 차별적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BMI 지수를 개발한 벨기에의 수학자 아돌프 케틀레는 유럽 백인 남성의 데이터를 수집해 건강한 BMI 지수를 설정했다. 유색인종과 히스패닉, 여성의 데이터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BMI 지수가 지배적인 시대, 유색인종의 신체적 다양성은 보험 가입, 난임 치료 거부의 이유가 됐다. 지난 6월 13일, 미국의학협회는 BMI의 인종 차별적 문제를 인정하고 의사들에게 BMI 사용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표준 신체를 벗어난 몸

남성의 상반신에 맞춰 설계된 안전벨트, 170센치미터의 키에 맞춰진 지하철 손잡이 등, 표준 신체를 상정한 설계를 문제 삼은 지는 겨우 십수 년밖에 되지 않았다. 2022년 4월 이전까지, 해부학 수업에서는 백인 표준 남성의 체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3D 컴퓨터 모델을 사용해 여성의 신체를 공부했다. 미래 먹거리인 우주 산업에서도 이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이다. 1960년대, 우주에 알맞은 표준 신체는 105킬로그램에 167~188센치미터의 키를 가진 남성이었다.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여성은 헐렁한 우주복을 입었다. 모두가 우주에 설 수 있는 시대가 이제서야 다가온다. 나사는 2022년, 여성의 뼈와 조직, 장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사능 보호 조끼를 실험하겠다 밝혔다. 유색인종과 여성의 달 남극 착륙을 목표로 하는 아르테미스 3호 프로젝트는 ‘프라다’와 협업해 차세대 달 우주복 제작에 나선다.

IT MATTERS

우주는 언제나 무한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열려 있지는 않았다. 누구나 자연사를 배울 수 있지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는 전시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유사하다. 평균과 정상의 지배력이 강고하다면, 우생학의 유령은 우리의 곁을 계속해 떠돌 것이다. 정상의 지배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지속돼야만 우리는 미래의 자연사 박물관으로 나아갈 수 있다.

최근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원자, 광물, 행성, 별 등의 현상으로 확대하는 내용의 논문이 발표됐다. ‘기능 정보 증가의 법칙’은 복잡한 자연 시스템이 결국 “더 큰 패턴화, 다양성, 복잡성”으로 진화한다고 말한다. 우주는 원자, 분자, 광물의 규모에서도 다양해지고 복잡해진다. 이 복잡한 환경은 다양한 모습의 생명체로 이어진다. 다양성을 늘려 가는 게 진화의 핵심이라면, 그 핵심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 또한 생명체의 몫이다. 진화의 즐거움은 그곳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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