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진정성 상품이라는 딜레마

2024년 5월 2일, explained

지금의 아이돌은 자신의 삶과 마음을 상품화한다. K팝 산업이 풀어야 할 숙제다.

지난 4월 25일, 어도어 민희진 대표가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진행 중이다. 사진: Chung Sung-Jun,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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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어의 민희진 대표와 모회사인 하이브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기자회견 이후, 민희진 어도어 대표이사는 하이브가 요구한 어도어 이사회 소집 요구에 응하지 않기로 했다. 하이브는 임시 주주 총회 허가 신청을 낸 만큼, 어도어 경영진을 1~2개월 안에 교체한다는 계획이다. 이번 사건에서 우리가 봐야 할 건 경영권 분쟁만이 아니다. 눈물과 욕설이 뒤섞인 기자회견장에서는 K팝 산업이 ‘상품화했던 것’이 노골적으로 밝혀졌다. 바로 아이돌의 삶과 마음의 무게, 즉 진정성 그 자체다.

WHY NOW

민희진 대표와 방시혁 의장 사이의 갈등은 모회사와 자회사 간의 갈등, 한편으로는 방시혁 의장이 최초로 구축한 멀티 레이블 체제가 겪어야 하는 진통이라 볼 수 있었다. 이런 여러 갈등의 맥락들을 짚다 보면 K팝 산업이 상품화해 왔던 것이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의 K팝은 사람의 진정성을 판다. 매력적인 상품이지만 통제 불가능한 영역이기도 하다. 팬들은 개인으로서의 아이돌을 자식처럼 길러 낸다. 자식의 배신은 더 뼈아픈 법이다. 덩달아 소비자의 마음도 흔들린다.

카피

민희진 대표는 어도어의 소속 아티스트 뉴진스를 하이브의 타 산하 레이블인 빌리프랩의 신인 아이돌 아일릿이 카피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고궁에서 한복을 입고 찍은 콘셉트의 화보, 패션쇼 공식 석상에서 첫 모습을 보인 것 등, 그가 표현하기로 아일릿은 뉴진스의 ‘포뮬러’를 그대로 따라 썼다. 각종 안무와 콘셉트도 문제 제기의 대상이었다. 풋풋한 10대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꾸며지지 않은 듯한 생머리를 내세우는 콘셉트가 흡사하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아일릿이 데뷔한 직후, 인터넷상에는 아일릿에 뉴진스 아류라는 수식어가 돌아다녔다. 민희진 대표는 이런 카피가 반복되면 아일릿이든, 뉴진스든, K팝 씬 전체에 좋을 것이 없다고 발언했다.

멀티 레이블

뉴진스와 아일릿을 둘러싼 카피 논란은 K팝 씬에서 하이브가 최초로 시도한 멀티 레이블 체제에서 그 원인 일부를 찾아볼 수 있다. 여러 기획사를 흡수하며 덩치를 키워 온 하이브는 각 레이블의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취지에서 멀티 레이블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멀티 레이블 체제는 K팝 시장 내에서 경쟁하고, 또 협력하는 구도다. 그 둘 사이의 선을 어떻게, 어디에 그어야 하는지는 아직 실험된 바가 없다. 4세대 아이돌들이 우후죽순 쏟아지는 지금, 새로운 트렌드를 만든 뉴진스와 그 뒤를 쫓은 아일릿이 카피인지, 혹은 모회사 하이브의 기획 아래에서 정당하게 태어난 콘셉트인지는 그 누구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두 그룹의 유사한 콘셉트를 하이브라는 모회사의 일관성으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어도어가 부른 돌풍을 빌리프랩이 훔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자연스러움

뉴진스의 돌풍 같은 성공의 핵심에는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어도어는 SM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복잡한 세계관이나, 화려한 무대 위의 범접 불가능함보다는 모두가 쉽게 접근하고 따를 수 있는 자연스러움을 내세웠다. 요컨대, 뉴진스는 엑소처럼 초능력자도, 에스파처럼 가상 세계를 구하는 히로인도 아니었다. 지난 4월 27일 발표된 신곡 〈버블검〉의 뮤직비디오도 뉴진스 멤버 혜인의 말로 시작된다. “오늘은 내가 비눗방울 만드는 법을 알려 줄게”, “와 너 진짜 잘한다, 우리 친구 할래?”와 같은 말을 건네는 식이다. 뉴진스가 만드는 무대와 노래는 다른 세계로의 진입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친구 되기의 과정이다. 기자회견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희진 대표는 뉴진스를 “고양이 같은 아이”, “전화해서 20분 내내 펑펑 우는 아이”로 소개했다. 뉴진스가 완벽한 아이돌보다는 대표님을 아끼고, 부모님이 전면에 나서는 개인으로서 호명된 셈이다.

진정성

이런 뉴진스의 콘셉트와 기자회견이 불러온 파급력은 현재 K팝 아이돌이 파는 상품성이 개인의 삶과 진정성이라는 큰 틀에 닿아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이돌의 진정성은 예전부터 상품이 되어 왔다. 소속사는 K팝 아티스트를 기존 방송에 출연시키는 대신 회사의 콘텐츠 팀과 협업해 제작하는 웹 예능, 자체 제작 콘텐츠(자컨)를 꾸준히 생산했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꾸며진 모습이 아닌 편안한 관계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팬들의 만족감이 컸다. 200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아이돌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 연습생으로 출발했던 아이돌들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하고, 비로소 완성된 아이돌로서 팬을 만나는 로드 무비 서사를 완성했다. 다만 이러한 콘텐츠들은 대중보다는 이른바 ‘덕질’을 하는 코어 팬을 위한 콘텐츠였다. 상황은 달라졌다. 소셜 미디어와 쇼트폼을 타고 K팝 시장은 일부 팬들만의 영역이 아닌 전 세계인의 문화가 됐다. 자연스러움과 진정성 역시 대중에 어필할 수 있는 핵심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르세라핌과 카리나

가창력으로 논란이 됐던 아이돌 그룹 르세라핌의 코첼라 무대도 마찬가지였다. 르세라핌은 ‘아임 피어리스(IM FEARLESS)’를 애너그램 방식으로 만든 이름으로,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확신과 의지를 내포한다. 이른바 독기 콘셉트를 내세워 관심을 끈 아이돌이 아쉬운 라이브 실력을 보였다는 데서 대중이 내는 비난의 목소리가 더욱 컸다. 아이돌이 실현해야 하는 진정성은 콘셉트와 실력의 일치에서 끝나지 않는다. 걸그룹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는 열애 사실이 탄로 나자 인스타그램을 통해 사과문을 발표했다. 실망을 끼쳐 미안하다는 내용의 사과문은 팬을 향한 진정성이 넘치는 따듯한 말투로 쓰였다. 이제 대중들은 무대만 완벽하게 수행하는 아이돌을 원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움을 내세우고, 나와 가까우면서도 몰입할 수 있는 서사를 완벽하게 구축한 개인을 원한다.

팬덤 플랫폼

한편으로 코어 팬층을 위한 상품은 훨씬 더 강화됐다. ‘버블’, ‘위버스’, ‘포닝’과 같은 팬덤 소통 플랫폼을 통해서다. 본래 아이돌은 무대와 방송을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를 내세우고, 팬들은 2차 창작이나 자생적인 클럽 활동을 통해 아이돌의 이미지를 소비, 구축해 나갔다. 기획사가 주축이 돼 팬덤 플랫폼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팬들의 덕질, 그리고 그 소스를 주는 아이돌의 사생활이 소속사의 관리 대상이 됐다. 팬들은 언제 어디서나 꾸며지지 않은 듯한 아이돌의 일상을 받아 볼 수 있게 됐고, 스타들은 자신의 일상생활을 주기적으로 풀어내야만 진정성을 증명할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보는데도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아이돌, 커플티를 입고 찍은 사진을 팬들에게 보내는 아이돌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아이돌이 가진 마음의 무게가 상품이 된다.

태생부터 아이돌

진정성 자체가 상품이 된 시장은 아이돌 바깥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점차 어려지는 아이돌 데뷔의 평균 연령대 역시 이 흐름을 대변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연습생으로 발탁돼 5~6년 트레이닝을 거쳐 데뷔한 스타들의 이야기는 흔하다. 아이돌, 혹은 연습생 시기 바깥의 사생활을 최소화함으로써 학교 폭력이나 사생활 논란 등의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성장 서사를 기록하고 개인의 정체성이 아이돌로 발전돼 가는 과정 자체를 콘텐츠화할 수도 있다. 그에 맞춰 팬들도 바뀐다. 완벽한 아이돌을 선망하는 관객석의 타인이 아닌, 나의 아이돌을 키워내고 길러내는 보호자가 돼가는 것이다. 아이돌의 숨겨진 얼굴을 발견할 때 팬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자식에게 느끼는 배덕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IT MATTERS

최근 변화한 시장의 흐름은 이 진정성 딜레마를 최소화하기 위한 움직임이다. 하이브의 멀티 레이블 체제는 사람이라는 불확실한 IP에 몇 년을 의존해야 하는 위험을 비즈니스 모델로 분산하려는 시도였다. 버추얼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는 가상성을 통해 진정성 딜레마를 탈피하고자 한다. 직접 얼굴이나 신상을 노출하지 않으면서 위험성은 최소화하고, 팬들과의 솔직한 소통을 통해 진정성을 어필하는 식이다. 이들을 완벽한 시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번 민희진 대표의 눈물 어린 기자회견은 K팝 산업이 바로 그 진정성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뉴진스는 무대를 꾸미는 독립된 아이돌보다는 부모, 팬의 보살핌을 받는 여린 성장 서사의 주인공이 됐다. 하이브의 멀티 레이블 체제는 흔들리고, 플레이브는 새로운 해답보다는 특이한 사례로 시장에 어필하고 있다. 파편적인 시도만으로는 아이돌 스타의 진정성을 상품화함으로써 비롯하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진정성 상품이라는 자승자박을 현명하게 풀어내는 것, 그것이 산업으로서의 K팝이 마주한 새로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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