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W THIS
불닭볶음면이 라면 시장의 지각을 바꾸고 있다. 만년 3위였던 삼양라면은 1위, 2위인 농심과 오뚜기의 시가 총액을 넘어서며
1위에 올랐다. 분기 기준으로 영업 이익 역시 추월했다. 숫자만이 아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입 모아 불닭볶음면을 제1의 라면으로 꼽는다. K-푸드의 노멀은 이제 비빔밥, 불고기가 아닌 불닭볶음면이다.
WHY NOW
마트의 한 벽면 전체를 채운 라면 매대에서 맛있다는 것만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MZ세대의 소울 푸드가 된 불닭볶음면에는 중독적인 맛 이외에도 특이한 점이 있다. 불닭볶음면이 잘 꾸며진 요리보다는 DIY, 문화, 콘텐츠, 오락거리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틱톡 시대의 음식은 먹는 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미 우리의 식문화는 리믹스 시대에 들어섰다.
불닭볶음면
2012년 매대에 등장한 불닭볶음면의 기획안은 2005년부터 나와 있었다. 국물 없는 매운 라면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지 않던 시절인 탓에, 매운 볶음 라면이라는 아이디어는 먼지 속에 가려져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라면, 틈새라면과 같은 매운맛 제품이 인기를 끌게 된다. 불닭볶음면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불닭볶음면은 맵다. ‘핵불닭볶음면’의 경우에는 임산부의 섭취는 자제하는 게 좋다는 경고 문구가 쓰여 있을 정도다. 마니악한 음식인데도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2023년 기준 불닭볶음면의 전체 매출은 1조 1929억 원으로, 이 중 해외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68퍼센트에 이른다.
세계화의 조건
하나의 음식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하나의 전략은 세계인의 입맛에 맞춘 현지화였다. 외국인들이 한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프렌치 스타일, 아메리칸 스타일 등을 접합시켜 메뉴를 구성하는 식이다. 또한, 한국의 음식뿐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까지 음식을 통해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전략 중 하나였다. 식당을 가장 ‘한국스럽게’ 꾸며 놓고 테이블이 아닌 온돌 바닥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게 그 사례다. 체계적인 조리법을 통해 모두가 같은 정도의 맛을 보장할 수 있는, 정돈된 레시피도 필요했다. 만들어진 공식을 퍼트려 더 많은 이들이 한국을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정설이었고, 지름길이었다.
스시
전 세계인을 사로잡은
스시는 세계화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한 대표적인 음식이다. 게다가 스시에는 동양의 이국적임도 함께 담겨 있었다. 《스시 이야기(The Story of Sushi)》의 저자 트레버 코슨(Trevor Corson)은 전 세계를 사로잡은 스시의 매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스시가 왜 그렇게 세계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됐는지에 대한 개인적 이론 중 하나는 소비자로서의 우리가 이국적이고 모험적이면서도 접근하기 쉽고, 새로운 제품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스시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미지의 동양 문화를 쉽고 빠르게 체험할 수 있도록 해줬다. 어느 나라의 전통 음식, 그리고 그것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때는 언제나 문화가 필요했다. 다만 과거의 경우, 문화는 국가, 민족과 같이 전통적인 경계 내에 갇혀 있었다.
소셜 미디어
이제 젊은 세대는 교과서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소셜 미디어를 통해 타 국가의 문화를 접한다. 이런 형태의 접근은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일단 이국적인 것을 경험하고 상상하기 너무 쉬워졌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직접 이국적인 것을 만들어 체험하거나 변형해 다시 퍼트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익숙한 한국의 마라탕 유행이 대표적이었다. 유튜브와 틱톡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마라탕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마라탕 전문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은 남이 만들어 주는 마라탕을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않았다. ‘나만의 마라탕 재료’를 소개하는 영상을 찍어 올리거나 저렴한 마라탕 레시피를 올려 직접 집에서 마라탕을 끓여 먹는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스시는 일본과 뗄 수 없는 사이었지만, 마라탕의 시대는 다르다. 마라탕과 중국은 느슨한 관계를 맺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음식의 위상
음식의 위상도 바뀌었다. 더 이상 음식은 귀하지 않다. 이제 음식은 맛있거나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가능케 하는 도구적 역할, 그 이상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음식은 자신을 PR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도구가 돼야 하며, 직접 만들고 즐기며 퍼트릴 수 있는 유익한 콘텐츠가 돼야 한다. 자신의 저녁 메뉴를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리는 행위는 일상을 모양 잡고 자랑할 수 있는 간편한 방법이 됐다. 식품 대기업들은 SNS에 떠도는 창작 레시피에 촉각을 기울인다. MZ세대 소비자는 ‘
모디슈머(Modify+Consumer)’다. 친숙한 것들을 직접 조합해 자신만의 것으로 바꾼다. 내가 먹는 것은 나를 보여 준다.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내가 먹는 것을 보여 주는 것 또한, 먹는 행위의 일부다.
창작 레시피
불닭볶음면은 이런 시대적 흐름에 최적화된 음식이었다. 사람들은 직접 마요네즈나 마늘, 치즈, 햄 등을 추가해 자신만의 불닭볶음면 레시피를 만들었다. 해외의 불닭 레시피가 한국으로 역수출되기도 했다. 먹방 유튜버들은 라이스페이퍼를 활용해 불닭 쌈을 만들고 삼양에서 내놓은 불닭 소스를 모든 음식에 뿌려 먹는다. 불닭으로부터 파생되는 수많은 창작 레시피 자체가 하나의 바이럴로 기능했다. 회사의 신제품 기획 방향도 명확해졌다.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끄는 창작 레시피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를 더욱 쉽게 만드는 파생 상품을 개발하기만 하면 된다. 우유를 넣어 불닭볶음면을 끓이는 사람이 많아지면 ‘까르보 불닭’을, 국물 라면에 대한 선호가 여전하다면 ‘불닭볶음탕면’을 만드는 식이다. 시장에 쏟아지는 제품이 다양해질수록, 사람들의 상상력도 무한히 커진다. 이
상상력의 크기가 곧 시장의 잠재력이다.
리믹스
불닭볶음면은 한국스러운 전통 음식도, 혹은 접하기 어려운 고급 음식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즐기고, 또 그 방식을 자랑할 수 있는 일종의 액세서리에 가깝다. 틱톡 시대의 식문화는 리믹스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이때의 리믹스는 단순히 새로운 레시피를 발명하는 것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커뮤니티와 브랜딩까지도 리믹스의 영역에 포함된다. 삼양은 지난 2022년 런던 현지에서 진행된 런던아시아영화제에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불닭볶음면이 아닌 불닭 소스를 활용한 닭강정이 주력 메뉴였다. 원숭이 캐릭터로 PFP NFT를 만드는 BAYC는 성수동에 ‘
보어드 앤 헝그리’라는 이름의 버거 가게를 열었다. 창립자는 BAYC의 커뮤니티를 “브랜드의 스토리텔링에 활용할 것”이라 말했다. 버거는 커뮤니티를 모으는 도구로, 또 기존의 커뮤니티는 F&B를 지속하는 땔감으로 작용한다. DJ의 매력이 리믹스하는 곡의 원본 소스가 아닌 원본을 뒤트는 방식에서 나오는 것처럼, 식문화의 리믹싱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활발해지고 있다.
IT MATTERS
충성스러운 열혈 팬을 만들고 지속해 온 아이돌 팬 문화, 서브 컬처는 이미 리믹싱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팬들은 직접 자체 굿즈를 만들고, 아이돌 멤버나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각자의 서사를 부여해 팬픽이나 스핀오프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 과정에서 소모임과 커뮤니티가 생겨났고, 팬덤 확장의 지속 가능한 동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착즙’이 이뤄져야만 한정된 원본 소스 안에서 자생적인 확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매운맛과 한국의 문화가 불닭볶음면 성공의 주된 화신은 아니다. 불닭볶음면은 팬들의 착즙을, 소셜 미디어의 확산력을, 재빠른 개발력을 토대로 승부했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는, 리믹스의 장을 열어주자 불닭볶음면은 라면 그 이상의 문화가 됐다. 우리가 불닭볶음면에서 배워야 할 것은 한국적임과 매운맛만이 아닐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