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 측량의 함정

삼각 측량의 함정

중도 좌파 노동당이 어떻게 영국 사회를 우경화하는가.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발행합니다. 그레이트 게임은 19세기 유라시아 패권을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전략적 경쟁을 일컫는 말입니다. 러시아 제국은 얼지 않는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흑해 일대로 남하했고, 대영 제국이 이를 저지하려 하면서 국제 정세가 요동쳤습니다.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이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한국을 강제 합병합니다. 20세기 중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그레이트 게임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국내외 정치 이슈는 한두 사건만 따로 떼어 볼 것이 아니라 맥락을 읽어야 합니다. ‘그레이트 게임’ 시리즈에서는 국내외 정치 이슈와 힘의 문제를 다룹니다. 단순 사실 전달을 넘어 맥락을 해설하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첫 에피소드에서는 영국 중도 좌파 노동당의 집권이 어떻게 영국 사회를 우경화할 수 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레이트 게임’ 시리즈를 멤버십 전용 팟캐스트로 들어 보세요. 국내외 정치 이슈와 힘의 문제를 캐주얼하게 이야기 나눕니다. 첫 에피소드 〈유럽의 극우 정치, 이 정도로 막장?〉에서는 두 에디터가 지금 가장 뜨거운(?) 극우 정치인 두 명을 소개합니다!
2024년 7월 4일 열린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했다. 차기 총리가 될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총선 승리가 확정되자 “변화는 지금 시작된다”고 말했다.

왼쪽, 오른쪽, 중간


좌가 있어야 우가 있고 중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극좌와 극우도 있습니다. 정치는 이 공간을 차지하는 게임입니다. 상대를 보면서 내 위치를 확인하고 공간을 창출해야 기회가 생깁니다. 좌파와 우파라는 말부터가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프랑스 국민 공회의 의석 배치에서 유래했습니다. 의장석에서 봤을 때 좌측에는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수립하자는 사람들이 앉았고, 우측에는 왕정으로 돌아가자는 사람들이 앉았습니다.

유럽에서 급진적 우파 정당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6월에 열린 유럽 의회 선거에서 전체 720석 중 149석을 극우 정당이 챙겼습니다. 7월 초 프랑스 조기 총선에서도 전체 하원 의석 577석 중 143석을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이 차지했죠. 좌파 연합과 중도 연합, 극우 정당이 의회를 삼등분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벌써 2년 전에 무솔리니 이후 100년 만에 극우 성향 총리가 탄생했습니다.

유럽만 그런 게 아닙니다. 미국에서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에 돌아올 가능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극우의 주류화가 세계적인 현상인 건 분명합니다. 극우 약진의 배경에는 경제 위기, 인플레이션, 이민자 급증이 있습니다. 중동, 동유럽, 북아프리카와 국경이 인접한 유럽에서는 특히 이민자 급증이 극우 정당의 연료가 되고 있습니다. 유럽의 극우 정당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후 변화로 기후 난민까지 늘어날 테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7월 4일 영국에서 조기 총선이 열렸습니다. 유럽 본토의 정세와 달리 중도 좌파 노동당이 하원 650석 중 412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습니다. 집권 보수당은 풍비박산이 났죠. 1834년 창당 후 최소 의석인 121석에 그쳤습니다. 기존 의석에서 250석을 잃었습니다. 전직 총리, 법무부 장관 같은 보수당 거물들이 줄줄이 낙선했습니다. 극우 정당의 성적은 어땠을까요. 반이민과 반녹색을 외치는 영국개혁당(Reform UK)은 5석에 그쳤습니다.

미국 정치 매체 《폴리티코(Politico)》는 “유럽 주요국에서 극우가 득세하고 중도 좌파가 쇠퇴하고 있지만,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영국이 뜻밖에 ‘사회 민주주의의 보루’로 떠올랐다”고 평가했습니다. 지금 당장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도 좌파 노동당이 집권당이 되면서 영국 사회는 더 보수화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정치는 공간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양당의 지난 30년 공간 전술을 돌아보면 다음 움직임이 보입니다.
1997년 영국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사진: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980년대는 보수의 시대였습니다. 미국은 공화당의 레이건, 영국은 보수당의 대처가 집권하며 보수의 전성기를 만들었습니다. 레이건과 대처는 기성 보수와 조금 달랐습니다. 이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하고 기독교 전통을 중시하는 점에서 기성 보수와 같았지만, 군사 외교적으로 대외 개입을 선호하고 경제적으로 세계화를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를 옹호했습니다. 이런 새 보수를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라고 부릅니다.

보수 진영이 시대에 맞는 옷을 입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진보 진영은 아직 전후 시대의 논리에 갇혀 있었습니다. 노동당은 여전히 생산 수단의 국유화와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하는 복지 국가 건설에 매달렸습니다. 노동당의 강력한 기반은 육체노동 계급과 노동조합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있었습니다. 육체노동 계급이 감소하고 여성이 노동 인력으로 유입되면서 노동당의 지지 기반이 불안정해집니다.

냉전이 종식되고 신보수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1994년, 토니 블레어가 41세 나이로 노동당 대표에 오릅니다. 당시 노동당은 15년간 선거에서 연전연패하고 있었습니다. 블레어는 노동당 개조 프로젝트에 돌입합니다. 블레어는 세계 질서의 변화에 저항하는 구좌파, 변화를 관리하려 하지 않는 신우파 모두를 거부합니다.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길(The Third Way)’을 내세웁니다. 좌우 따지지 않고 실용주의 노선을 택하겠다는 겁니다.

블레어는 노동당을 사실상 재창당했습니다. 당헌 4조에서 ‘생산·분배·교환 수단의 공동 소유’를 천명한 구절을 삭제하고 그 자리에 ‘시장의 기업성과 경쟁의 엄격성’ 같은 말을 넣습니다. “기업을 강조한 대처가 옳았다”면서 노동조합과 당의 연계도 약화시켰습니다. 보수당 정책 중에서 좋은 게 있다면 얼마든 가져가 썼습니다. 현대화 작업을 마친 신노동당(New Labour)은 1997년 총선에서 18년 만에 보수당을 누르고 정권 교체에 성공합니다. 블레어는 총리가 되죠.

영국만 그랬던 건 아닙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사회 분위기는 좌우 극한 대립에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죠.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 패배 후 이듬해 영국 유학길에 오릅니다. 영국 정치를 잘 아는 그가 신노동당의 중도 노선 성공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겠죠. 김대중과 김종필의 DJP 연합 탄생에도 제3의 길이 좋은 레퍼런스가 됐을 겁니다.

신노동당 정부는 14년간 영국을 이끌었습니다.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집권 노동당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했습니다. 특히 금융 규제를 대폭 완화해 영국의 금융업을 엄청나게 키웠습니다. 구좌파는 블레어를 “바지 입은 대처”라고 비판하기도 했죠. 블레어는 10년간 총리로 재임하고 2007년 당시 재무장관이던 고든 브라운에게 총리직을 넘깁니다. 브라운은 블레어보다는 조금 더 왼쪽에 있지만 역시 중도로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신자유주의로 순항하던 노동당은 신자유주의로 좌초합니다. 2007년 미국에서 부동산 거품이 꺼지며 대형 금융 기관들이 줄줄이 파산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집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실핏줄처럼 연결된 전 세계가 금융 위기를 겪습니다. 금융업을 급격히 키운 영국은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죠. 영국 정부는 금융권 구제에 7000억 파운드(1252조 원) 이상을 씁니다. 결국 2010년 노동당은 보수당에게 정권을 내주죠. 그리고 2024년 정권을 되찾기까지 14년간 암흑기를 보냅니다.
2018년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지방 선거를 앞두고 연설하고 있다. 사진: 영국 노동당

제러미 코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2010년 취임한 보수당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보수당의 토니 블레어’였습니다. 둘 다 43세에 총리가 됐고, 얼굴도 잘생겼고, 무엇보다 하는 짓이 똑같았거든요. 노동당의 우클릭을 이끈 블레어처럼 캐머런은 보수당의 좌클릭을 이끌었습니다. 캐머런은 분배와 환경 문제 같은 좌파의 의제를 수용하는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를 내걸었습니다. 당 로고도 대처 시절에 만든 불타오르는 횃불에서 초록 나무로 바꿨죠. 

한편 노동당은 블레어 때보다는 왼쪽으로 이동했지만, 구좌파에 비하면 여전히 오른쪽에 있었습니다. 집권 보수당과 야당 노동당이 중원에서 만나게 된 거죠. 둘 다 보수 정책을 내놓으니 변별력 없는 문항 앞에서 유권자들은 차라리 원조인 보수당을 찍었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 노동당 대표는 에드 밀리밴드였는데요, 밀리밴드는 ‘이상하게 생겨서’ 표를 잃기도 했습니다. 총리가 될 상이 아니라는 거죠. 이런 여론을 의식한 밀리밴드는 “사진발 잘 받는 정치인을 원한다면 나에게 투표하지 말라”고까지 합니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정말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2015년 총선에서도 노동당은 패배합니다. 밀리밴드는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사퇴합니다. 이제 새 당 대표를 뽑아야 하는데, 여기서 노선 충돌이 일어납니다. 조금씩 왼쪽으로 이동했던 것을 되돌려 제3의 길로 돌아가야 재집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블레어파와 이도 저도 아닌 보수당 따라 하기는 그만두고 좌파 정당의 색채를 분명히 하자고 주장하는 파로 나뉩니다.

이때 제러미 코빈이 등장합니다. 코빈은 노동당 내에서도 제일 왼쪽에 있는 인물입니다. 자신을 지칭할 때도 “나는”이 아니라 “우리는”을 사용하는 집단 신봉자죠. 정치 인생 40년간 시위란 시위는 다 찾아다닌 사람이었습니다. 당내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죠. 당이 수십 년간 우경화했으니, 주류는 당연히 블레어파였습니다.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려면 동료 의원 35명의 서명이 필요한데, 코빈은 이마저도 후보 등록 마감 직전에야 받을 수 있었죠.

당 대표 선거에서 코빈은 코빈합니다. 철도, 에너지 같은 기간 산업의 국유화와 고소득자 세금 60퍼센트, 대학 등록금 면제를 공약합니다. 블레어는 코빈이 당선되면 노동당이 망한다며 경고했지만, 코빈은 그런 블레어를 이라크전의 책임을 물어 전범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동료 의원들에게 막말도 서슴지 않는 상남자 코빈은 평당원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게 됩니다. 비주류 중의 비주류에서 일약 당 대표 유력 주자로 올라서죠.

아까 언급한 ‘총리가 될 상이 아닌’ 에드 밀리밴드가 코빈에게는 정치 인생의 은인입니다. 원래 노동당 대표 선거는 진성 당원과 노동조합원만 투표권이 있었는데, 밀리밴드가 당 대표 시절에 노동당 웹사이트에서 “노동당의 가치를 믿는다”는 상자에 체크 표시를 하고 3파운드를 내면 누구나 투표할 수 있게 바꿨습니다. 투표 결과 코빈은 60퍼센트의 지지율로 노동당 대표가 됩니다. 노동당이 블레어 이전의 노동당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2024년 7월 6일 영국 신임 총리 키어 스타머가 영국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에서 첫 내각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Chris Eades-WPA Pool/Getty Images

키어 스타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2016년부터 영국 정치권은 극심한 혼란을 겪습니다. 브렉시트 때문입니다. 영국이 EU를 탈퇴하네 마네, 국민 투표를 하네 마네, 탈퇴 조건은 이거네 저거네, 하면서 보수당, 노동당 할 것 없이 모두 내홍에 빠집니다. 보수당은 브렉시트 여파로 집권 14년간 총리가 네 번 바뀝니다. 노동당 역시 상황은 비슷했습니다. 계파별로 브렉시트에 대한 생각이 달랐죠. 게다가 코빈파와 블레어파의 갈등까지 더해집니다. 결국 2019년 12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참패합니다.

2020년 코빈의 뒤를 이어 키어 스타머가 노동당 대표로 선출됩니다. 스타머의 노동당은 왼쪽에서 중앙으로 다시 이동합니다. 당이 다시 보수화하니 당내 노선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겠죠. 더구나 스타머 전임 당 대표는 노동당 역사상 가장 좌파적이라는 제러미 코빈이었으니까요. 스타머는 ‘너무’ 신중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지만, 코빈을 상대하려면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던 것 같습니다. 스타머는 코빈과 그의 추종 세력이 반유대주의를 조장한다며 출당시킵니다.

2024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중도층을 잡기 위해 우클릭 전략을 택합니다. 노동당은 그동안 안보 분야에서 무르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국가 안보의 당”을 자처하며 집권하면 핵 잠수함을 건조하겠다고 공약했습니다. 국방 지출도 국내총생산(GDP)의 2.5퍼센트로 끌어올리겠다고 했죠. 또 무상 교육, 무상 의료, 초고소득자 증세 같은 강성 좌파 정책을 버리고, 소득세와 법인세 동결 같은 친기업 정책을 내놓습니다.

선거 결과는 아시다시피 노동당이 412석을 얻으며 압승을 거뒀죠. 블레어가 진두지휘한 1997년 총선(418석)에 견줄 만한 역대급 승리였습니다. 승리의 동력은 크게 두 가지였죠. 먼저, 중도 확장 전략입니다. 강성 좌파 색채를 지우면서 대안 세력으로 인정을 받았죠. 스타머가 내놓은 공약들은 언뜻 보기엔 보수당 정책 같아서 영국 언론에서는 제3의 길 시즌 2라는 평가가 나옵니다. 실제로 블레어의 참모 그룹 일부가 스타머 정부에 참여하고 있고요. 블레어와 다른 점이라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회의적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두 번째는 보수의 분열입니다.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은 보수당보다 3배 넘는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득표율을 살펴보면 노동당 33.7퍼센트(412석), 보수당 23.7퍼센트(121석), 극우 성향 영국개혁당 14.3퍼센트(5석)였습니다. 보수 진영의 득표율을 합하면 38퍼센트로 노동당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비례대표제가 없는데다 득표율 1위만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이고 결선 투표도 없는 선거 제도 덕분에 노동당이 압승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개혁당이 전체 선거구 650곳 중에서 609곳에 후보를 냈거든요. 보수당에 고춧가루를 제대로 뿌린 거죠.
2020년 7월 21일 보리스 존슨 영국 보수당 대표 겸 총리가 내각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존슨 총리 오른쪽에는 차차기 총리가 되는 리시 수낵 당시 재무부 장관이 있다. 사진: Pippa Fowles

삼각 측량의 함정


스타머 정부는 총선 승리로 검증된 중도 전략을 이어 갈 겁니다. 블레어 정부 시즌 2가 되겠죠. 그런데 스타머가 모방한 블레어의 전략은 사실 블레어가 원조가 아닙니다. 블레어도 어디선가 베껴 왔죠. 바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입니다. 클린턴 집권 1기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1994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은 그 유명한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보수주의 공약을 제시해 40년 만에 하원을 장악합니다. 클린턴은 재선이 위태로워지죠.

1996년 재선을 앞두고 클린턴은 주지사 시절부터 선거 운동을 맡겼던 선거 전략가 딕 모리스를 고용합니다. 클린턴과 모리스는 백악관에서 주 1회 비밀 심야 회의를 열었습니다. 재집권을 위한 거의 모든 것을 논의하는 자리였죠. 모리스는 클린턴에게 ‘삼각 측량(triangulation)’ 전략을 제안합니다. 삼각형 중간의 꼭짓점처럼 좌우 어디에도 치우지지 않고 중도층을 포섭하는 전략입니다. 표 확장성이 있다면 공화당의 정책도 얼마든 가져오는 거죠.

클린턴의 중도 확장 전략을 두고 클린턴은 경선 때까지 민주당 후보였다가 취임 후 공화당 대통령이 됐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주의를 택한 건 잘한 일이라는 의견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실용의 방향성을 봐야 합니다. 국가 정책을 이념이 다른 여러 정당이 타협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집권당과 정부가 편의적으로 삼각 측량을 이용해 만들면 필연적으로 무게 중심이 한쪽에 쏠리게 됩니다.

극우 정당의 인기는 반이민 정서의 증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영국개혁당, 보수당, 노동당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반이민 정책을 폅니다. 진보적 사회 민주주의 의제가 분명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삼각 측량 전략은 보수당의 의제를 노동당 온건파의 의제로 편입하는 것입니다. 결국 노동당 기득권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킵니다. 이 상태에서 다시 삼각형을 그리고, 또 그리면 삼각형은 점차 오른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1980년 이후 미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경화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노동당이 좌파 의제를 포기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도 좋지 않습니다. 좌파 의제가 늘 옳아서가 아닙니다. 좌파 의제는 우파 내에서 토론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국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의 정당이 중간과 오른쪽에 몰려 있습니다. 그러면 반쪽짜리 토론만 나옵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지만, 노동당이 좌파적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우파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세계화의 피해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빼앗긴 영국 보수당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데이비드 캐머런 때처럼 중도 공략을 위해 왼쪽으로 이동할까요? 그러기는 아마 어려울 겁니다. 캐머런 때는 보수당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정당이 없었습니다. 중도 표를 얻기 위해 왼쪽으로 이동해도 보수 성향 유권자는 보수당을 찍었습니다. 그래도 노동당보다는 오른쪽에 있으니까요. 지금은 다릅니다. 보수당보다 더 오른쪽에 영국개혁당이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당은 윈스턴 처칠이 태어난 지역에서도 의석을 잃었습니다. 집토끼를 잃은 보수당은 집안 단속에 먼저 나설 겁니다. 지금 보수당이 대적할 상대는 노동당이 아니라 영국개혁당입니다. 영국개혁당은 ‘영국의 트럼프’라 불리는 나이젤 패라지가 당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패라지는 극단적인 반이민주의자입니다. 인종 차별 발언과 막말로 자주 구설에 오르죠. 패라지는 초선 의원이지만 ‘영국의 트럼프’답게 거침이 없습니다. 벌써부터 우파를 재편해서 2029년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되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보수당의 선택지는 두 개입니다. 패라지를 인종 차별주의자와 푸틴의 하수인으로 낙인 찍어 정치 생명을 끝장내거나, 패라지를 보수당으로 영입하는 겁니다. 전자는 이미 몇 년간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후자는 성공하면 당이 더 우경화하고, 실패하면 보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에서 당이 더 우경화할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보수당은 어느 쪽을 택하든 더 우경화하고, 중도 좌파 노동당 정부는 삼각 측량으로 국가의 꼭짓점을 더 오른쪽으로 옮길 공산이 큽니다.
 
이연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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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시리즈는 정치와 국제 관계, 힘의 문제를 다루는 피처 라이팅입니다. 정치 이슈는 정치 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레이트 게임’은 국내외 정치 이슈와 힘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 권력을 이용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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