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 측량의 함정
스타머 정부는 총선 승리로 검증된 중도 전략을 이어 갈 겁니다. 블레어 정부 시즌 2가 되겠죠. 그런데 스타머가 모방한 블레어의 전략은 사실 블레어가 원조가 아닙니다. 블레어도 어디선가 베껴 왔죠. 바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입니다. 클린턴 집권 1기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1994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은 그 유명한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보수주의 공약을 제시해 40년 만에 하원을 장악합니다. 클린턴은 재선이 위태로워지죠.
1996년 재선을 앞두고 클린턴은 주지사 시절부터 선거 운동을 맡겼던 선거 전략가 딕 모리스를 고용합니다. 클린턴과 모리스는 백악관에서 주 1회 비밀 심야 회의를 열었습니다. 재집권을 위한 거의 모든 것을 논의하는 자리였죠. 모리스는 클린턴에게
‘삼각 측량(triangulation)’ 전략을 제안합니다. 삼각형 중간의 꼭짓점처럼 좌우 어디에도 치우지지 않고 중도층을 포섭하는 전략입니다. 표 확장성이 있다면 공화당의 정책도 얼마든 가져오는 거죠.
클린턴의 중도 확장 전략을 두고 클린턴은 경선 때까지 민주당 후보였다가 취임 후 공화당 대통령이 됐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실용주의를 택한 건 잘한 일이라는 의견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실용의 방향성을 봐야 합니다. 국가 정책을 이념이 다른 여러 정당이 타협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집권당과 정부가 편의적으로 삼각 측량을 이용해 만들면 필연적으로 무게 중심이 한쪽에 쏠리게 됩니다.
극우 정당의 인기는 반이민 정서의 증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영국개혁당, 보수당, 노동당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반이민 정책을 폅니다. 진보적 사회 민주주의 의제가 분명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삼각 측량 전략은 보수당의 의제를 노동당 온건파의 의제로 편입하는 것입니다. 결국 노동당 기득권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킵니다. 이 상태에서 다시 삼각형을 그리고, 또 그리면 삼각형은 점차 오른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1980년 이후 미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우경화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노동당이 좌파 의제를 포기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도 좋지 않습니다. 좌파 의제가 늘 옳아서가 아닙니다. 좌파 의제는 우파 내에서 토론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국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의 정당이 중간과 오른쪽에 몰려 있습니다. 그러면 반쪽짜리 토론만 나옵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지만, 노동당이 좌파적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우파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세계화의 피해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빼앗긴 영국 보수당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데이비드 캐머런 때처럼 중도 공략을 위해 왼쪽으로 이동할까요? 그러기는 아마 어려울 겁니다. 캐머런 때는 보수당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정당이 없었습니다. 중도 표를 얻기 위해 왼쪽으로 이동해도 보수 성향 유권자는 보수당을 찍었습니다. 그래도 노동당보다는 오른쪽에 있으니까요. 지금은 다릅니다. 보수당보다 더 오른쪽에 영국개혁당이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당은 윈스턴 처칠이 태어난 지역에서도 의석을 잃었습니다. 집토끼를 잃은 보수당은 집안 단속에 먼저 나설 겁니다. 지금 보수당이 대적할 상대는 노동당이 아니라 영국개혁당입니다. 영국개혁당은 ‘영국의 트럼프’라 불리는 나이젤 패라지가 당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패라지는 극단적인 반이민주의자입니다. 인종 차별 발언과 막말로 자주 구설에 오르죠. 패라지는 초선 의원이지만 ‘영국의 트럼프’답게 거침이 없습니다. 벌써부터 우파를 재편해서 2029년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되겠다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보수당의 선택지는 두 개입니다. 패라지를 인종 차별주의자와 푸틴의 하수인으로 낙인 찍어 정치 생명을 끝장내거나, 패라지를 보수당으로 영입하는 겁니다. 전자는 이미 몇 년간 시도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후자는 성공하면 당이 더 우경화하고, 실패하면 보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에서 당이 더 우경화할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보수당은 어느 쪽을 택하든 더 우경화하고, 중도 좌파 노동당 정부는 삼각 측량으로 국가의 꼭짓점을 더 오른쪽으로 옮길 공산이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