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노 리버럴은 왜 트럼프를 지지하나

테크노 리버럴은 왜 트럼프를 지지하나

이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기술 낙관주의자다.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시리즈는 국내외 정치와 힘의 문제를 다룹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발행합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실리콘밸리 테크노 리버럴의 트럼프 지지 현상을 다룹니다.
‘그레이트 게임’ 시리즈를 멤버십 전용 팟캐스트로 들어 보세요. 국내외 정치 이슈와 힘의 문제를 캐주얼하게 이야기 나눕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 〈기술적인 대통령 후보〉에서는 두 에디터가 실리콘밸리의 스타 CEO들 중 누군가가 미국 대선에 출마한다면 누굴 후보로 밀겠는지를 놓고 이야기 나눕니다.
7월 22일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조던 피터슨 박사와의 대담에서 “좌파(woke mind) 바이러스가 내 ‘아들’을 죽였다”고 했다. 머스크의 첫째 아들은 2020년 성전환 수술을 거쳐 여성이 됐다. 출처: The Hill

실리콘밸리의 리버럴(liberal)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좌파의 도시입니다. 반세기 넘게 공화당 출신이 시장에 당선된 적이 없습니다. 2020년 대선 때 이 지역에서 민주당 바이든은 85.3퍼센트, 공화당 트럼프는 12.7퍼센트를 득표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1970년대 반전 운동과 히피, 성 소수자의 성지였습니다. 도시 분위기가 자유롭고, 이민자와 유색 인종이 많아 민주당 지지세가 강합니다. 게다가 혁신의 상징이자 리버럴의 보루인 실리콘밸리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죠.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들은 투자자 모임에도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갑니다. 미국 동부 보스턴의 창업자였다면 짙은 양복을 입었을 겁니다. 마크 저커버그는 콘퍼런스에 토론자로 나가면서 삼선 슬리퍼를 신고 간 적도 있습니다. 서부 해안 창업자들 특유의 탈권위와 무질서하기까지 한 자유분방함은 정치적으로 진보 정당과 가깝습니다.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실리콘밸리의 한 창업자는 캘리포니아주의 분리 독립을 ‘진지하게’ 제안했을 정도입니다.

8년이 지난 지금, 분위기가 꽤 달라졌습니다. 우파 진영에서 활동하는 CEO와 VC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일론 머스크, 피터 틸, 마크 앤드리슨, 브라이언 암스토롱, 조 론스데일, 윙클보스 형제 등 업계 유명 인사들이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페이팔 마피아 데이비드 삭스는 실리콘밸리 자택에 억만장자들을 초대해 트럼프 모금 행사까지 열었습니다. 물론 실리콘밸리에선 여전히 민주당이 강세입니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히 감지되고 있습니다.

테크노 리버럴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민주당 정부는 자산 1억 달러 이상인 억만장자에게 부유세 25퍼센트를 부과하려 합니다. 둘째, 민주당 정부는 반독점을 이유로 빅테크의 인수·합병을 막아 왔습니다. 셋째, 민주당 정부는 AI의 급속한 발전에 속도 조절을 주문합니다. 넷째, 민주당 정부는 암호 화폐에 부정적입니다. 다섯째,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 JD 밴스는 실리콘밸리 VC 출신입니다.

정리하자면 민주당 정부가 재집권하면 스타트업과 VC업계가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반면 트럼프와 공화당 정부는 그렇지 않거나, 민주당보다는 덜 그럴 거라는 얘기죠.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이유만으로는 완벽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들이 정말 상업적인 이유에서만 공화당을 지지하는 걸까요. 부유세 도입을 주장하는 슈퍼 리치들도 많은데 말입니다. 다섯 가지 이유는 표면에 드러난 현상일 뿐입니다. 근원은 따로 있습니다.
2023년 10월 22일 마크 앤드리슨이 “왜 지금 기술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출처: a16z

기술 낙관주의 선언


마크 앤드리슨은 지금의 인터넷을 만들었습니다. 1993년에 세계 최초로 이미지를 표시할 수 있는 웹 브라우저 ‘모자이크’를 개발했죠. 이게 인기를 끌자 넷스케이프를 설립합니다. 2년 뒤 나스닥에 상장하죠. 닷컴 버블이 꺼지기 직전인 1999년에 넷스케이프를 43억 달러에 AOL에 매각합니다. 그해 앤드리슨은 벤 호로위츠와 함께 옵스웨어(Opsware)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또 차립니다. 2007년에 HP에 16억 달러를 받고 매각합니다.

두 회사를 팔았을 때 앤드리슨은 아직 30대 후반이었습니다. 은퇴할 나이가 아니었죠. 2009년 앤드리슨은 호로위츠와 함께 ‘앤드리슨 호로위츠(Andreessen Horowitz)’라는 VC를 설립합니다. 줄여서 a16z라고 합니다. 첫 글자 a와 마지막 글자 z 사이에 16개의 글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a16z의 투자 포트폴리오는 스타트업 명예의 전당 수준입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에어비엔비, 스카이프, 스트라이프, 깃허브, 피그마, 로블록스, 코인베이스, 오픈AI 등이 있습니다.

앤드리슨은 닷컴 열풍부터 버블 붕괴, 스마트폰의 등장, 클라우드, 메타버스, 암호 화폐, AI까지 실리콘밸리의 중흥기를 겪었습니다.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걸 지켜본 사람이죠. 또한 a16z는 운용 자산이 350억 달러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VC입니다. 게다가 앤드리슨과 호로위츠 두 창업자는 실리콘밸리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사람들입니다. 은둔의 경영자가 아니라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 서는 걸 즐기고 책과 아티클을 끊임없이 발표하는 슈퍼 인플루언서입니다.

그런 앤드리슨과 호로위츠가 얼마 전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고 고액을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우클릭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실리콘밸리의 리버럴이 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됐을까요. 9개월 전 앤드리슨이 서브스택에 올린 글 ‘기술 낙관주의 선언(The Techno-Optimist Manifesto)’에 힌트가 있습니다. A4 용지로 20장 분량인 긴 글인데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성장이 곧 진보”라는 얘기입니다.

앤드리슨은 기술이 일자리를 빼앗고 불평등을 심화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훼손하고 미래를 위협한다는 ‘거짓말’을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문명은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은 침체”라며 성장하지 않으면 제로섬 게임과 내부 갈등, 퇴보, 붕괴가 일어나 결국 인류가 멸망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따르면 성장의 원천은 인구 증가, 천연자원, 기술, 세 가지입니다. 앞선 두 가지는 수명이 다했고, 남은 건 기술 발전뿐입니다.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일어난 조지 플로이드 사건. 출처: NBC News

PC주의와 능력주의


기술 낙관주의자는 1인당 GDP, 아동 사망률, 기대 수명 같은 장기 데이터를 근거로 지구 문명이 끊임없이 성장해 왔다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성장은 절대 선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것과 성장을 저해하는 것은 모두 적입니다. 이런 생각의 전제는 성장 전보다 성장 후가 나을 거라는 믿음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낫고, 현재보다 미래가 나을 거라는 믿음이죠. 바꿔 말하면 과거의 것은 보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이런 말을 했죠. “보수주의자는 앉아서 생각만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보주주의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의심이 들면 할머니와 상의하는 것이다.” 윌슨이 민주당 출신이라 보수를 박하게 평가한 면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보수(保守)의 정의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보존하여 지키는 것이죠. 이런 기준에 비춰 볼 때 기술 낙관주의자는 보수와 상극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트럼프와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 리버럴 세력은 미국 민주당의 주류가 됐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iness·PC)을 지지합니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을 거치면서 PC는 미국 사회의 스탠더드가 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종교가 없는 사람이나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불편해할 수 있으니 가치 중립적인 ‘해피 홀리데이’를 써야 했죠.

보수주의자들도 처음에는 PC에 큰 반감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높이자는 취지 자체에는 공감했죠. 그러나 PC 운동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자 불편함을 느낍니다. 백인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여론도 생깁니다. 과도한 PC주의에 반발한 보수주의자들은 PC 사상을 ‘워키즘(wokeism, 깨어 있음)’이라 부르며 조롱하기 시작하죠. 보수주의자는 종교적, 사회적, 전통적 질서에 금이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LGBTQ를 싫어하는 이유 역시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해체하기 때문입니다.

기술 낙관주의자들도 과도한 PC주의를 거부합니다. 그런데 보수주의자와는 이유가 다릅니다. 실리콘밸리에는 다양한 인종, 성별, 배경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실리콘밸리가 다른 지역보다 사회적 포용성이 커서가 아닙니다. 피부색이 어떻든, 출신 지역이 어디든, 이슬람교를 믿든 힌두교를 믿든 상관없이 개인을 능력으로만 평가하는 능력주의(meritocracy) 때문입니다.

그런데 PC주의가 심화하면서 2010년대 중반에는 캘리포니아주에 여성과 소수자 임원을 의무화하는 법안이 생깁니다. 기술 낙관주의자에게 PC는 개인의 능력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성장과 무관한 가치에 불필요한 투자를 하게 하고, 그로 인해 성장을 늦추는 걸림돌입니다. 그들이 숭배하는 진보를 저해하는 거죠. 이들에게 낡은 것을 바꾸려 하지 않는 전통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적입니다. 동시에 ‘깨어 있는’ 좌파도 적입니다.

행동주의 펀드 퍼싱스퀘어의 회장 빌 애크먼은 오랜 민주당 지지자였습니다. ‘리틀 버핏’이라 불리는 금융계 거물입니다. 애크먼은 ESG에도 열심이었고, 이민자를 위한 장학 사업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최근 입장이 확 달라졌습니다.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 능력주의를 훼손하고 숨막히게 한다며 트럼프 지지를 선언했죠.
2024년 7월 17일 공화당 전당 대회에서 JD 밴스가 공화당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하고 있다. 출처: C-SPAN

지적 능력의 차이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을 계량화해 평가하고 보상을 차등화합니다. 능력주의에서 ‘능력(merit)’은 IQ와 노력의 합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거죠.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JD 밴스가 대표적입니다. 밴스는 러스트 벨트 흙수저 출신입니다. 부모는 어릴적 이혼했고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였습니다. ‘힐빌리’ 밴스는 각고의 노력 끝에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의 벤처 사업가로 성공하고, 부통령 후보에까지 오릅니다.

IQ를 중시하는 능력주의는 생물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스티븐 핑거는 《빈 서판(blank slate)》에서 인간은 백지(white paper)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지적 능력은 물론이고 성격 차이까지 상당 부분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타고난 능력 차이를 인정해야 교육 제도, 사회 제도를 더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앤드리슨은 핑거와 거의 똑같은 주장을 되풀이합니다. “지능이 진보의 궁극적인 엔진”이라면서 “똑똑한 사람과 사회는 덜 똑똑한 사람과 사회보다 거의 모든 지표에서 성과가 좋다”고 주장하죠. 이 말의 전제는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과 덜 똑똑한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기술 낙관주의자에게 평등은 “공로에 대한 반대이며, 야망에 대한 반대이며, 노력에 대한 반대이며, 성취에 대한 반대이며, 위대함에 대한 반대”입니다. 평등을 중시하는 좌파보다, 위계와 권위를 중시하는 우파를 이들이 선택한 이유입니다.

기술 낙관주의자의 지능에 대한 집착은 트랜스 휴머니즘과 AI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집니다. 지능이 진보의 궁극적인 엔진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인간을 능가하는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일반 인공지능)를 만들겠다거나, 뇌에 칩을 넣어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종하도록 하겠다거나 하는 시도들은 인간 지능을 증강하고자 하는 기술 낙관주의자의 징표와 같습니다.

AI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기점이라는 ‘특이점’에는 기술만 있고 인간이 없습니다. 특이점 전도사 레이 커즈와일과 구글 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AG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AI와 인간 두뇌가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는 거죠. 그들에게 ‘인간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뛰어난 지능만이 중요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우생학의 연장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펜타닐에 중독된 샌프란시스코. 출처: BBC News

도시의 질서


1970년대 인터넷의 초기를 이끌었던 실리콘밸리의 괴짜들은 인터넷을 사이버 유토피아로 생각했습니다. 정부 따위 필요없이 개인과 개인이 자유롭게 연결되는 세상, 특권과 편견 없이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1996년 사이버 운동가 존 페리 바를로가 올린 ‘사이버 스페이스 독립 선언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가 뽑은 정부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때 그들은 실리콘밸리의 급속한 성장이 그 지역의 대학, 연구소, 도로, 주택, 수도, 전기 같은 훌륭한 인프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대 서부 해안의 기술 낙관주의자들은 그걸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서 무정부주의적 혼란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 목격하고 있습니다. 과거 실리콘밸리의 역동성은 너무 당연해 눈에 띄지 않았던 사회 질서 속에서 싹틀 수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2024년 7월 15일 미국 공화당 전당 대회 첫날, 페이팔 마피아 데이비드 삭스는 트럼프 지지 연설을 했습니다. 민주당 집권기 동안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거리가 노숙자 캠프와 마약과 오물 구덩이로 바뀌었다면서 질서(order)를 강조했습니다. “우리 도시에는 질서가 필요하고, 국경에는 질서가 필요하고, 불타는 세상에 질서가 회복돼야 한다.” 전형적인 강경 보수주의자의 워딩입니다.

일반적으로 우파는 권위적인 정부와 질서를 중시하고, 좌파는 자유로운 사회를 중시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술 낙관주의자들은 또 한 번 우파와 공통점을 갖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를 옹호하기도 합니다. 기술 혁신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으니까요. 예컨대 미국이나 한국에서 기업이 시민의 생체 데이터를 수집해 뭔가를 개발하려 한다면 허가를 받기 힘들 겁니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권위주의 체제인 중국과 북한이 오히려 신기술 발전에 최적화된 토양을 갖춘 나라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에서부터 전 세계 반도체 경쟁, 공급망 붕괴, 유럽의 반독점 규제 강화까지 이제 실리콘밸리의 기술 혁신과 성장은 국가라는 보호막 없이는 달성하기 어렵습니다. 성장과 진보는 강력한 정부, 질서 있는 사회 속에서 가능합니다. 지금의 바이든, 해리슨보다 트럼프를 지지할 수밖에 없겠죠. 다시 말하지만 이들은 트럼프와 공화당이 좋아서 지지하는 게 아닙니다. 진보의 극대화를 돕는 도구로서 더 적합한 정부를 선택한 겁니다.
스페이스X가 공개한 인류의 화성 이주 미션. 출처: 스페이스X

선출되지 않은 권력


기술 낙관주의자들은 수십 년 내에 인류가 뇌를 복제해 영생을 누리고, 다행성 종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비전을 팔고 있습니다. SF 영화에나 나올 법한 멋진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과도한 합리주의와 기술 낙관주의는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시급한 문제들에 눈을 감게 합니다. 기후 위기를 내버려두고, 세계 각지의 전쟁을 외면하고, 국경을 넘는 이민자를 무시하고, 미래 인류를 화성에 데려가겠다니요. 다른 종류의 허무주의입니다.

기술 낙관주의자들은 똑똑한 사람들이 편견 없이 이성만으로 데이터를 분석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앤드리슨은 자연이 만든 문제든, 기술이 만든 문제든 “더 많은 기술을 이용하면 해결할 수 없는 물질적 문제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 논리의 전제는 모든 문제에 답이 있고, 기술로 답을 더 빨리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학 문제 풀이라면 적합한 방법이겠지만, 숙의 민주주의에는 맞지 않는 방법입니다. 어떤 문제는 답이 없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문제는 답보다 답을 찾는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목적론적이지 않았습니다. 다윈에게 진화는 진보가 아니고, 목적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기술 낙관주의자들이 말하는 진화는 다윈의 것보다 라마르크의 것에 가깝습니다. 진화에 일정한 방향이 있다는 겁니다. 기술 낙관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 진화는 목적지가 있고, 그 방향성은 그들의 신념을 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1970년대 실리콘밸리의 괴짜들이 연구실 안에 틀어박혀 세상과 담을 쌓고 기이한 기술을 개발했다면, 2020년대 괴짜들은 연구실 밖으로 나와 대중을 상대하는 사업가이자 연예인이자 정치인이 됐습니다.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르면 일론 머스크라고 답하는 시대입니다. 이들은 막대한 경제력, 기술적 영향력, 문화적 파급력, 정치적 영향력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들은 정치 무대의 전면에 모습을 더 자주 드러낼 겁니다. 정당의 공식 행사에서부터 유튜브, 팟캐스트, TV 토크쇼, 신문 칼럼에 이르기까지 기술 혁신과 성장에 관해 더 자주 자신의 신념을 표출할 겁니다. 그리고 그 신념은 공론장에서가 아니라 소수 테크 기업의 이사회가 열리는 작은 방에서 만들어집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좌우하게 됩니다. 테크노 리버럴의 정치 참여가 그 자체로 위험한 이유입니다.
 
이연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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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시리즈는 정치와 국제 관계, 힘의 문제를 다루는 피처 라이팅입니다. 정치 이슈는 정치 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레이트 게임’은 국내외 정치 이슈와 힘의 문제에 주목합니다. 누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 권력을 이용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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