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t Of Living
트럼프가 이겼습니다. 미국의 주류 언론 대부분이, 그리고 그 언론사의 기사를 받아쓰는 한국의 언론 대부분이 예상치 못했던 결과입니다. 하지만 현지 분위기는 좀 달랐습니다. 세계 최대 베팅사이트인 ‘폴리마켓(Polymarket)’이 점친 트럼프의 승리 가능성은 56퍼센트였습니다. 압승까지 예측하진 못했지만, 언론사 주관 여론조사나 선거 결과 예측치보다는 훨씬 정확도가 높았죠. 내 돈 걸고 하는 도박에서 사람들은 솔직해졌습니다. 트럼프가 이길 것 같다고 말입니다.
이유는 먹고사니즘입니다. 먹고 살기 팍팍해졌고, 때문에 미국의 시민들은 변화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용 시장은 좋았습니다. 실업률은 사상 최저치를 찍었고, 사실상 완전 고용에 가까운 수준까지도 떨어졌죠. 문제는 물가였습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생활비(cost of living) 압력이 너무 강해졌습니다.
무디스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평균적인 가구 월 지출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했던 2021년 1월 대비 1120달러 증가했습니다. 사치를 부려서가 아닙니다. 당시와 동일한 상품, 서비스를 구매한다는 가정하의 이야깁니다. 물론 임금도 올랐습니다. 소득도 거의 같은 수준으로 올랐거든요. 그럼 나아지진 않았어도 나빠지진 않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건 중간은 가는 집의 얘깁니다. 물가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오릅니다. 소득 증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한 채 궁핍해졌을 겁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임금 상승이 물가 상승을 따라잡지 못한 지역에서 승리했습니다. 예를 들면
펜실베이니아 같은 곳 말입니다.
20! 50! 100 percent!
1980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연임에 실패했습니다. 경제는 불황인데 물가도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죠. 스태그플레이션이었습니다.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이 모두 10퍼센트를 넘어섰습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레이건 전 대통령입니다. “인플레이션은 노상강도처럼 폭력적이고, 저격수처럼 치명적이다”는 발언과 함께 취임한 레이건은 80년대를 풍요의 시대로 포장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아주 많은 미국인이 당시를 그리워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인플레이션을 잡고, 레이건 신화를 다시 쓸 수 있을까요. 트럼프의 경제 정책은 세 가지 축을 기반으로 합니다. 세금 감면, 규제 완화, 관세 인상입니다. 이 중 관세 인상이 레이건 대통령과 차이를 보입니다. 레이거노믹스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유무역을 지향했습니다. 무역 확대가 경제 성장에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장벽을 낮춘 것입니다. 트럼프는 생각이 다릅니다. 외국 물건을 사들여오는 것보다는 미국에서 만들어 쓰는 것이 좋다고 보는 것이죠. 보호무역주의, 고립주의입니다.
트럼프가 당선되지는 않을 것으로 예측했던, 혹은 희망했던 언론사들은, 이 때문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합니다. 트럼프는 유세 과정에서 관세를 두고 ‘아름답다(beautiful)’는 형용사를 썼죠. 적대국이든 우방국이든 트럼프에게는 관계없습니다. 모든 제품에 10~20퍼센트에 관세를 부과할 것이며 중국산 제품에는 60퍼센트, 멕시코산 자동차에는 500퍼센트에 달하는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가능할까 싶지만, 의외로 어느 정도는 가능합니다. 설령 주변에서 트럼프를 말린다 해도 말입니다. 미국의 법이 그렇습니다. 관세율은 의회가 정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통상법 232조는 대통령의 권한으로 관세율을 높이거나 수입 물량을 제한할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물론, 조건이 있습니다. 외국산 수입 제품이 미국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경우의 얘기입니다. 하지만 지난 2018년, 트럼프는 외국산 철강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며 수입 철강 제품에 25퍼센트, 알루미늄에는 10퍼센트의 관세를 부과했습니다. 중국을 겨냥한 조치였지만, 당시 우리나라도
긴박하게 움직여야 했죠.
이렇게 관세를 높이면 수입 물가는 상승하고, 이는 인플레이션을 더욱 심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1000원에 수입하던 철강을 1600원에 수입하면 가격은 당연히 높아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정말 그런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트럼프는 가격을 올리기 위해 관세를 높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산 쓰지 말고 미국에서 생산된 ‘MADE IN USA’를 쓰자는 것입니다. 수입하지 말자는 얘기죠.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1930년대 미국의 스무트-홀리 관세법입니다. 당시 미국은 2만 개가 넘는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했고, 곧 전 세계도 이에 대해 보복 관세를 부과하면서 무역 장벽이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당연히 국제 교역량도 급감했고요. 임금이 하락했습니다. 그리고 물가도 떨어졌습니다. 디플레이션입니다.
관세 인상이 반드시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라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디플레이션을 유발했던 역사가 있는 겁니다. 경제 현상은 다양한 변수에 따라 흔들립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발발한 직후, 국제 유가의 급등이 예상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았죠. 중국 경제 성장이 둔화하면서 수요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전기차도 증가하고 있고요.
Make our planet great again
트럼프의 당선으로 전기차의 미래가 부정적일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물론, 일부 기업에는 그럴 겁니다. 멕시코에서 이른바 ‘택갈이’를 해 미국 시장에 전기차를 팔고자 하는 중국 기업들 말이죠. 하지만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미국산 전기차에 일부러 페널티를 줄 이유는 없습니다. 트럼프는 미국의 제조업을 살리는 것을 자신에게 맡겨진 지상 과제로 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만, 내연차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을 ‘환경적 이유’로 진흥하지는 않을 겁니다. 벤스 부통령 당선자는 지난 2023년, 친환경 차 구매보조금 폐지안을 발의하기도 했으니까요.
트럼프의 재집권과 함께 미국의 파리 기후 협정 ‘재탈퇴’도 예상됩니다. 공약으로도 내세웠습니다.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는 약속이니 지킬 겁니다. 첫 번째 탈퇴 때엔 전 세계적인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다 함께 줄여야 할 탄소 배출량을 정해두고 함께 나누어 부담하자는 협정인데, 미국이 빠져버리면 나머지 국가들에 큰 부담이 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양의 탄소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기 때와는 상황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번 주에 열리는 제29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만 봐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회 위원장까지. 당연히 참석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인데 모두
불참입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말입니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신호등’ 연정 붕괴로 지지 기반을 잃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 조기 신임투표를 할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은 이미 지난 7월 치러진 조기 총선에 참패하며 극우파 총리와 불편한 이인삼각을 시작했죠. 독일도 프랑스도 탄소 걱정을 할 여력이 없습니다. 마크롱은 지난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 기후 협약 탈퇴를 선언한 직후 “우리 지구를 다시 위대하게(Make our planet great again)”라는 연설로 수많은 찬사를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트럼프 당선 확정 이후 축하 전화 통화에서는 탄소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죠. 즉, 환경 정책 후퇴는 트럼프 재집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구 대다수의 국가가 공범이 되어 환경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있을 뿐입니다.
트럼프는 화석 연료 예찬자가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가 인류의 탓이 아니라 늘 있었던 자연 현상의 일부라 생각할 뿐입니다. 즉,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화석 연료가 더 값이 싸다면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저렴한 에너지원으로 에너지 비용을 낮출 수 있다면 물가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인플레이션을 잡을 비책으로 화석연료가 꼽히는 이유입니다.
Not permitted under the law
트럼프는 화석 연료만 풀지 않을 겁니다. 돈도 풀 겁니다. 트럼프의 공약이 그대로 실현된다면, 향후 10년간 미국 연방 재정적자는 7조 5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인플레이션도 자극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미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낮추기 어려워질 겁니다. 지금보다 금리를 더 올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기준 금리를 결정할 권한은 연준에 있습니다. 그리고 파월 연준 의장은 트럼프의 해고 위협에도
의연한 모습이고요. 기자의 질문에도 ‘법적으로 (트럼프에게) 그럴 권리가 없다’며 단호했습니다. 그러니 트럼프가 금리를 아무리 내리라고 닦달해도 파월은 시장 상황에 맞게 대처할 겁니다. 트럼프로서는 ‘오히려 좋은’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안되면 파월 탓, 잘되면 내 덕분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죠. 다만 미국이 금리를 인하하지 않으면, 혹은 미국의 금리가 높아지면 전 세계가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만만치 않습니다.
미국 국채는 안전자산입니다. 여기 투자하면 이자를 더 쳐준다는데, 투자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달러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환율이 오르는 겁니다. 세계 경제 전망이 좋지 않으면 달러화가 오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달러화가 오르면 세계 경제가 주저앉기도 합니다. 2023년도에 발표된
IMF의 보고서에 따르면, 달러 가치가 연 10퍼센트 상승할 때 신흥국 생산량이 1.9퍼센트 포인트 감소합니다.
전 세계 무역 거래의 40퍼센트 이상이 달러화로 이루어집니다. 즉, 세계 경제의 운명이 트럼프 손에 달렸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 연준이 기준금리를 지난 9월과 이번 달인 11월 두 차례 인하했지만, 시장 금리는 거꾸로 오르고 있거든요. 시장은 이미 트럼프 시대의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을 예견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관세나 이민 정책, 탈탄소 후퇴 등도 영향력이 만만치 않겠지만, 무엇보다 아주 높은 확률로 닥쳐올 ‘강달러 시대’가 무섭습니다. 이걸 견뎌낼 체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The Second Trump's World
트럼프 2기는 훨씬 매워져서 돌아올 겁니다. 트럼프는 자신을 거역하지 않는 사람들만 주변에 두겠다고 약속했으며, 공화당은 트럼프의 사당으로 전락했죠. 트럼프를 막아설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1기 때와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트럼프를 승리로 이끈 것은 인플레이션입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트럼프는 무엇이든 할 겁니다. 물가를 잡지 못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소득을 늘려서라도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 물론, 미국의 먹고사는 문제 말입니다. 그 여파로 전 세계에 디플레이션이 덮쳐와도, 기후 정책이 후퇴해도, 신흥국의 생산량이 떨어져도 트럼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겁니다. 관심이 없으니까요. 트럼프가 실패할 것이라는 예상은 이제 소용없습니다. 트럼프가 몰고 올 미래를 냉정하게 바라볼 시간입니다. 태풍이 저 멀리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