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법이 될 때 사회는 진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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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재판관의 보충 의견은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깔끔하고 통쾌한’ 탄핵 주문에 사족을 달아 옥의 티였다는 의견이 더 많았죠. 

이름이 법이 될 때 사회는 진보합니다.

2024년 12월 17일

이름이 법이 될 때

이름이 법이 될 때 사회는 진보합니다. 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동안 국회에서 잠자던 법안의 처리가 급물살을 탑니다. 김용균법이 그랬고 구하라법이 그랬습니다. 민식이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고(故) 김민식 군의 부모는 말했습니다. “너의 이름으로 된 법으로 다른 아이들을 지킬 수 있게 됐어.” 그렇습니다. 법이 된 이름들이 이 사회를 지키고 구하고 있습니다.

구하는 법이 있다면 막는 법도 있습니다. ‘이인제 방지법’이 대표적입니다. 당내 경선에서 낙선한 공직 선거 후보자가 해당 지역구에는 출마할 수 없도록 규정한 공직선거법입니다. 제2의 이인제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법입니다. 1997년 대선에서 이인제 후보는 신한국당 경선에서 이회창 후보에게 패배하자 탈당하고는 신당을 만들어 대선에 출마합니다. 결국 영남 표가 분산되면서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죠.

이름이 법이 될 때 사회는 진보합니다. 사법은 어제를 심판하고, 입법은 내일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분노와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법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 한국에는 ‘윤석열 방지법’이 필요합니다. 개헌입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출처: YTN

보충 의견

12·3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은 7년 전에 막을 수 있었습니다. 2017년 3월 10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 대행이 주문을 선고했습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 장면을 아직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친 대목이 있습니다. 생중계된 21분짜리 영상의 말미에 이정미 권한 대행은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해 파면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안창호 재판관의 보충 의견 요지를 읽습니다.

안 재판관이 지적한 ‘정치적 폐습’은 탄핵 심판 결정문에 보충 의견으로 담겨 있습니다. 안 재판관은 “나는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imperial presidency)’로 비판되는 우리 헌법의 권력 구조가 이러한 헌법과 법률 위반 행위를 가능하게 한 필요조건이라고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현행 대통령제에서 국무총리를 포함한 국무위원은 “대통령의 의사 결정과 지시에 복종할 뿐, 대통령의 뜻과 다른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기 어렵다”고도 했습니다.

이 보충 의견은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깔끔하고 통쾌한’ 탄핵 주문에 사족을 달아 옥의 티였다는 의견이 더 많았죠. 2017년 봄의 탄핵 심판은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리는 데에만 관심이 쏠렸고, 사건 심판의 헌법적 의미를 살피거나 향후 헌법 개정의 방향을 모색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촛불은 승리했고,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7년 뒤 또 이 사달이 났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는 수명을 다했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 이후 8명의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그사이 3번의 탄핵 소추가 있었고, 3명의 대통령이 퇴임 후 감옥에 갔고, 1명은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8명 모두 측근 비리에 시달렸습니다. 대통령 개인의 부덕이나 일탈 때문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이 조직이 만약 사기업이었다면 외부 컨설팅을 받아 거버넌스부터 바꿨을 겁니다.

탄핵 심판의 헌법적 의미

안창호 재판관은 1987년 개헌으로 대통령의 권력 ‘형성’의 민주적 정당성 측면에서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대통령의 권력 ‘행사’의 민주적 정당성 측면에서는 과거 권위주의적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통령에게 법률안 제출권, 예산 편성·제출권, 광범위한 행정입법권 등 권한이 집중돼 있지만, 효과적인 견제 장치가 없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안 재판관은 “현행 헌법상 대통령 권력의 과도한 집중은 아직 청산되지 않은 하향식 의사 결정 문화와 정의적(情意的) 연고주의와 결합하여 대통령의 자의적 권력 행사의 문제점을 더욱 심각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이번 12·3 비상계엄 사태도 대통령의 ‘충암고 라인’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있죠.

안 재판관은 보충 의견에서 문제 지적에 그치지 않고 헌법 개정의 방향까지 제안합니다. 요약하자면 ①의원 내각제든 이원 집정부제든 책임 총리제 도입이든 국민의 선택에 따라 정부 형태를 변경해 과도하게 집중된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고, ②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해 주민 근거리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도의 결함이 윤 대통령의 잘못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탄핵 심판과 형사 재판은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앞으로 진행될 형사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합당한 처벌을 내리면 그만입니다. 탄핵 심판은 헌법적 의미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꼴좋다’ 하고 피청구인을 망신 주는 자리가 아니라 헌법적 의미를 고찰하는 기회가 돼야 합니다. 제2의 윤석열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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