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정의의 탄생
현대적인 의미의 대안적 정의를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을 꼽자면 1978년 첫 범행 이후 18년 동안 정체를 숨긴 채 대학(University)과 항공사(Airline)를 대상으로 폭탄 테러를 지속해 온 유나바머(Unabomber)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유나바머가 보낸 폭탄 소포에 손을 잃고, 발을 잃고, 시력을 잃었죠. 사망자도 발생했습니다. 유나바머는 1995년 언론사에 편지를 보냅니다. 자신의 글을 《워싱턴포스트》나 《뉴욕타임스》 중 한 곳에 개재하라는 요구였고, 분량이 3만 5000여 단어에 이르는 긴 글이었습니다. 테러범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수사 원칙을 깨고, 범인의 글이 인쇄되어 발행됐습니다. 유나바머, 본명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선언문, 《산업사회와 그 미래》입니다.
선언문을 통해 카진스키가 무엇을 향해 폭탄 테러를 벌여 왔는지가 드러났습니다. 현대 산업 기술 문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향해 폭탄을 보내왔던 것입니다. 카진스키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역할은 축소되고 기술 시스템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죠. 기계 문명을 기반으로 한 현대 사회의 시스템은 우리 욕구를 대부분 충족해 줍니다. 저렴한 공산품, 쾌적한 생활 같은 것 말입니다. 동시에 시스템은 우리를 통제하기도 하고요.
그 결과 우리가 탐닉하게 되는 것이 ‘가짜 목표’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외면한 채 취미나 오락, 단순한 여가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죠. 1995년의 카진스키는 이러한 가짜 목표를 공급하는 것이 ‘미디어’라고 주장합니다. 개인의 사고는 미디어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되며, 미디어를 통해 본 왜곡된 현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 결과, 기술 문명의 위험이라는 본질적 문제는 외면당합니다.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입니다.
보이지 않는 가해자의 정체
트럼프는 화려한 사람입니다. 쇼 비즈니스의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 경험과 노하우로 정치적 영향력을 쌓아 왔죠. 이 때문에 자신의 집권 1기 취임식 당시 몰렸던 인파가 2009년 오바마 취임식 때보다 훨씬 적어 보이는 사진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션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은 “어느 때보다 많은 군중이 왔다”라고
발언했죠. 거짓말이었습니다. 논란이 일었습니다. 백악관은 스파이서가 ‘대안적 진실(alternative truth)’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믿음을 부정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권위 있는 전문가나 명성을 쌓은 언론으로부터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라고 부정당한다면 우길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적어도 20세기까지는 말이죠.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도 나와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 혼자서는 우길 수 없어도 함께라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힘이 있는 누군가가 당신의 믿음이야말로 대안적인 진실이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그 믿음은 더욱 강해질 겁니다. 대안적 진실은 ‘권위의 전복’이라는 특성을 가집니다.
‘대안적 정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스템을 의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 세계는 너무나도 복잡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기술을 그저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불의’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가해자가 누구인지 가려내기 힘듭니다. 만조니 입장에서 가해자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최저 시급에 가까운 급여를 받고 있을 보험 회사 콜센터 상담원은 아닐 겁니다. 콜센터 직원 뒤로 보이지 않게 숨겨진 시스템이 진짜 가해자입니다. 그 시스템을 전복시키기 위해 만조니는 총을 쐈습니다.
당신을 밀어내는 정의
만조니는 유나바머에게서 꽤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독서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 굿리드(Goodread) 사이트에는 만조니가 《산업사회와 그 미래》에 달아 둔 별점과 평이 남아 있습니다. 5점 만점에 4점. 당시만 해도 만조니는 카진스키가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한 폭력적인 사람이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 사회에 대한 그의 예측 상당 부분이 매우 선지적이었다’는 점 또한 강조했습니다.
만조니 입장에서 유나바머는 이 세계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했던 사람입니다. 대안적 정의를 실현한 만조니 본인처럼 말이죠. 실제로 만조니는 선언문에서 자신의 행동을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이라며 정당화합니다. 또, 스스로를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선, ‘유일하게 진실한 인물’이라 평가합니다. 대안적 정의를 실현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단단히 여물지 않은 정의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불의가 되기 십상입니다. 피해자 브라이언 톰슨은 두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톰슨의 가족에게 이 사건은 불의입니다. 톰슨의 사망으로 유나이티드 헬스케어 보험 부문 업무에 차질이 생겨 고객에게까지 피해가 미치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그 또한 불의였을 것입니다. 유나바머의 타깃은 지식 권력과 첨단 산업이었지만, 피해자 중에는 비서나 배달원, 평범한 컴퓨터 상점 주인이 있었습니다. 대안적 정의는 권력의 전복이지만, ‘우리’를 위한 정의일 뿐입니다. ‘당신’을 위한 정의인지는 치밀하게 고려되지 않아 불분명합니다.
매머드가 멸종하는 때
문제는 대안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요즘 자주 보인다는 점입니다. 2021년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을 점거했던 사람들처럼 말이죠. 2020년 미 대선이 부정 선거였다며 음모론을 주장하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선거는 정의롭지 않았습니다. 헌법 질서를 흔들지언정, 국회를 점거한 자신들이야말로 정의였습니다.
이번 미국 대선 기간에 발생했던 트럼프 피격 사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거라는 시스템을 통해 트럼프의 집권을 막을 수 없다면, 총이라도 쏴야 한다는 논리가 대안적 정의입니다. 그 총알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어 버린다 할지라도 말이죠. 시스템의 전복을 꿈꾸는 대안적 정의는 이렇게 우리와 당신의 경계를 가르고 선언하며 선동합니다. 그리고 전복의 대상을 향한 공격이라면 폭력이라도 정당화합니다.
만조니는 미국의 ‘안티히어로’로 등극했습니다. 만조니 버전의 DDD 굿즈까지 판매되고 있을 정도니까요. 대안적 정의가 힘을 얻는 과정을 우리는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꿀 것은 서둘러 바꿔야 합니다. 시스템의 무게와 크기에 압도되어 우물쭈물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기후가 바뀌었습니다. 언 땅이 녹고 본 적 없는 것들이 들에서, 강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절망이 오래 묵어 썩어버리면, 그 땅에서 대안적 정의가 자라나는 시대가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