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기술

bkjn review

네덜란드에는 ‘닉센’이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잠시 게으름뱅이가 되는 시간이죠.

몰입의 기술

2024년 12월 19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나요? 개인적인 것이라면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하실 수도 있겠고, 업무에 관련된 것이라면 상사에게 보고할 수도 있겠지요. 워드나 파워포인트 같은 프로그램으로 문서 형태로 정리해 팀원들과 공유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요즘엔 슬랙으로 간단히 공유하는 것이 트렌드일 테고요. 그런데 이 회사에서는 좀 다릅니다. 직접 펜을 들어 종이에 자기 생각을 맥락 있는 글로 적어야 합니다. 그다음 준비가 되면 함께 모여 글을 읽고 메모한 다음 토론합니다. 이 아날로그적인 회사의 정체는 바로 아마존입니다.

이러한 아마존의 문서 작성 과정을 자랑스럽게 소개한 사람은 다름 아닌 AWS(아마존 웹 서비스)의 CTO(기술 총책임자), 버너 보겔스입니다. 보겔스는 매년 12월, 다음 해의 기술 예측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꽤 잘 들어맞아 업계에서는 보겔스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죠. 2023년에는 생성형 AI가 인간의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게 되고, AI 어시스턴트가 개발자의 생산성을 새롭게 정의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관련된 발표가 구글과 오픈AI, 앤트로픽 등에서 올 4분기 쏟아져 나왔죠. 2022년에는 맞춤형 반도체의 시대를, 2021년에는 AI 지원 소프트웨어 개발 등을 예상했습니다.

그렇다면 2025년의 기술은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가게 될까요. 보겔스는 소형 모듈식 원자로(SMR) 기술을 중심으로 한 에너지 혁신, AI의 힘을 빌린 가짜 뉴스의 무력화, 재난에 대비하기 위한 분산형 시스템, 업무를 통한 사회적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새로운 세대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좀 생뚱맞은 이야기도 내놨어요. 이북 리더기나 mp3 플레이어와 같은, ‘첨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단순한 디바이스 쪽으로 기술 트렌드가 이동한다는 겁니다. 소비자의 몰입을 돕는 기술이 부상한다는 전망입니다.
mp3 플레이어라는 단어에 이 영상 생각난 분 계신가요? 출처: 유튜브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펜으로 직접 글을 쓰고, 그 글을 돌려보며 토론하는 과정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몰입의 상태로 안내합니다. 회의 도중 스마트폰을 들어 이메일을 확인할 일도, 동료의 이야기를 들으며 소셜 미디어의 새로운 피드를 흘끗거리는 일도 없을 테니까요. 보겔스는 더 많은 조직에서 비슷한 전략을 채택할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깊은 사유와 비판적 사고를 촉진할 수 있도록 말이죠.

마음 챙김 음모론

한때 ‘마음 챙김(Mindfulness)’이라는 단어가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내 마음, 내가 챙기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모두 명상에 관심을 두고 마음 건강에 관한 지식을 쌓았죠.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수많은 마음 챙김 강사들이 화려하게 포장하여 소비자들에게 팔고 있는 명상과 수행의 과정들을 한 꺼풀 벗겨보면, 그저 기본적인 집중 훈련일 뿐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을 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 시스템 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불균형에서 찾는 것이 과연 문제의 해결책이 되겠느냐는 비판도 있었죠.

마음 챙김은 문제의 원인이 우리의 내면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개인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교묘한 알고리즘과 끊임없는 푸시 알림으로 우리의 주의를 끌어 돈을 벌고 있는 존재들이 분명 있잖아요. 구글, 페이스북(지금의 메타), 트위터(지금의 X), 애플과 같은 기업들 말입니다. 이런 기업들이 문제는 아닐까요?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 경영학과의 로널드 퍼서 교수는 마음 챙김 열풍이 이런 논의를 막아서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진짜 문제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린다는 거예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한술 더 뜹니다. 마음 챙김이 “글로벌 자본주의 패권을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겁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제 역할을 하면서도, 정신이 멀쩡한 척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요즘의 트렌드는 좀 달라졌습니다. 지금 혁신가들은 ‘Flow’를 이야기합니다. 흐름을 탄 상태, 몰입입니다. 몰입을 통해 생산성을 얼마나 극대화할 수 있는지, 몰입을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책상을 배치하거나 업무 시간표를 짜야 하는지 강의하기도 하죠.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마음 챙김이든, 몰입이든 정말 중요한 것은 스마트폰을 치워버리는 일이라는 것을요. 우리의 집중력을 도둑질해 가는 디바이스 말이죠.

디지털 Y2K?

2009년부터 2022년 사이 10대 청소년의 소셜 미디어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정신 건강 문제가 불거졌죠. 틱톡은 사용자가 35분 만에 플랫폼에 중독될 수 있다는 내부 연구 결과를 폭로당한 일도 있습니다. 때문에 스마트폰을 금지하는 학교가 늘고 있고, ‘디지털 디톡스’라는 문화도 생겨났죠. 보겔스는 이러한 경향에 주목했습니다. 기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소비자의 욕구가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본 겁니다. 사용자의 주의를 끄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의도를 실현하는 ‘목적 중심의 디바이스’의 도래입니다.

보겔스는 아주 기본적인 통화와 문자 기능을 중심으로 한 ‘미니멀 폰(The Minimal Phone)’을 예로 들었습니다. e-ink 흑백 디스플레이와 쿼티 키보드를 탑재한 단정한 모습의 이 제품은, 디지털 과부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단순함’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또, 킨들(Kindle)과 같은 이북 리더기, 잡다한 기능 없이 촬영에만 집중할 수 있는 하이엔드 카메라, 메시지나 소셜 미디어의 푸시 알림에 방해받지 않고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기기 등도 언급했죠. 이 모든 디바이스, 2005년쯤 제 가방 속에 있던 것들입니다. 카시오의 저렴한 디카, 아이리버의 mp3 플레이어, 당시 큰맘 먹고 직구했던 킨들까지. 물론 당시 제 휴대폰은 오로지 통화와 문자만 이용 가능한 피쳐폰이었죠.

정말 2025년에는 아이패드와 아이폰이 지고 이북 리더기와 mp3 플레이어가 부활할까요?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새로운 기계가 등장할 겁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신제품 출시를 기다려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겔스는 일주일에 하루, 오후 시간 내내 스마트폰을 꺼 둔다고 합니다. 학술 논문을 읽거나 새로운 AWS 서비스를 구상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죠.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도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라 인지 능력을 높이기 위해 기상 후 한 시간 동안은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습관은 유서 깊은 전통입니다. 네덜란드에는 닉센(niksen)이라는 문화가 있습니다. 잠시 게으름뱅이가 되는 시간이죠. 가만히 앉아 창 밖을 바라봐도 좋고 누워서 천장의 무늬를 쫓아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면 됩니다. 비슷한 것으로 덴마크에는 ‘휘게’가 있고 스웨덴에는 ‘라곰’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멍때리기’가 있고요. 인류는 원래 몰입의 기술을 잘 알고 있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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