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궁금한 것이 생기면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시나요? 일단 구글 검색부터 시작하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를 이용하실 수도 있겠고, 챗GPT나 퍼플렉시티 같은 AI 서비스에 질문하실 수도 있겠네요. 대개 쉽고 간단하게, 단 몇 초 만에 답을 얻으셨을 겁니다. 책장에서 두꺼운 백과사전을 꺼내어보던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지식 접근성입니다.
언뜻 생각해도 백과사전은 21세기에 어울리는 물건이 아닙니다. 지식을 한데 모아놓은 책이라니, 언제든 원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는 가치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한 백과사전 브랜드가 기업공개(IPO)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기업가치를 10억 달러로 평가받는 것이 목표입니다. 바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입니다.
좀 엉뚱한 소식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브리태니커는 이미 AI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환골탈태한 것이 아닙니다. 브리태니커는 착실히 시대에 적응해 왔습니다. 가죽 양장본에 금박으로 제목이 적힌, 호사스러운 모습의 백과사전 전집은 이미 2012년을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습니다. 대신 웹사이트를 통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메리엄-웹스터 사전》을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학교나 도서관 등을 대상으로 교육 소프트웨어도 판매하고 있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리 잡기도 한참 전인 지난 2000년, 이스라엘 기반의 AI 기업인 ‘멜린고(Melingo)’를 인수했습니다. 자연어 처리와 머신 러닝에 강점이 있다고 합니다. 현재 브리태니커는 시카고와 텔아비브에 각각 AI 기술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직접 사용해 보면 브리태니커의 AI는 꽤 쓸만합니다. 무엇보다,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답변의 출처가 다름 아닌 ‘브리태니커’니까요. 브랜드가 갖는 권위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항목마다 표시되는 저자의 이름과 브리태니커 에디터가 팩트 체크를 수행했다는 안내가 결정적입니다. 전형적인 백과사전의 문법이죠.
시대를 정의한 사전
브리태니커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백과사전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많은 학자가 1751년 처음으로 출간된 프랑스의 《백과전서(L’Encyclopédie)》를 꼽을 테니까요. 실제로 《백과전서》는 대단한 책이었습니다. 장장 22년 동안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고, 당시 숙련된 장인의 일 년 치 수입과 맞먹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숫자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은 단출했습니다. 돈을 좀 벌어볼 심산으로 번역서를 내자는 것이었죠. 1727년 영국에서 발간된 에프라임 체임버스의 《백과사전(Cyclopaedia)》이 꽤 잘 팔렸습니다. 그냥 잘 팔린 수준이 아니라 소위 ‘대박’을 쳤습니다. 발간된 지 15년이 지난 후에도 네 번째 판을 찍을 정도였으니까요. 이걸 한 출판사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해 출판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번역을 감수하기 위해 고용된 책임자가 장 르 롱 달랑베르와 드니 디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디드로에게는 욕심이 좀 생겼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디드로에게 체임버스의 《백과사전》은 좀 지루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업혁명 시기를 맞이하면서 쏟아져나온 새로운 분야와 지식, 정보를 소개하는 책이었거든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백과사전의 역할에 충실했죠. 그런데 디드로는 그런 책에 만족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디드로는 판을 뒤집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그런 시대였습니다. 국왕의 권한은 신이 내린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에 반기를 드는 시대 말입니다. 종교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이단아들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디드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죠. 조심스럽지만, 명백하게 《백과전서》에도 새로운 시대를 향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담겼습니다.
예를 들어 ‘
무지(ignorance)’ 항목을 살펴보죠. 《백과전서》는 무지의 원인을 인간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사유가 부족하기 때문에, 사유 간의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충분히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무지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즉, 무지란 인간이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뜻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과거의 믿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철학적’ 정의입니다. 디드로와 각 항목의 저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지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 청사진을 그렸습니다.
지식을 세일즈한 사전
똑같은 단어 하나를 두고 어제와 오늘의 정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백과전서》는 적나라하게 보여줬습니다. 새로운 기술에 관한 설명 또한 아주 자세히 풀어내었습니다. 어제에는 없던, 미래를 만드는 기술입니다. 현재의 신념을, 권위를 의심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쌓이고 쌓여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결심이 되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반면, 1768년부터 출간을 시작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소박한 목표를 세웠습니다. 프랑스의 《백과전서》의 성과에 고무되어 제작에 착수하기는 했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판을 뒤집겠다는 야망과는 거리가 멀었죠. 편찬자 스콧 윌리엄 스멜리는 독학으로 지식을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스멜리에게 백과사전의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유용성은 모든 출판물의 주된 의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 책이나 저자들은 인류의 인정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스멜리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세상을 바꾸려는 의도로 출판된 책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도록 실용성을 극대화했죠. 초판이 나쁘지 않은 판매 실적을 보였고, 내용을 보강한 두 번째 판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대영 제국’의 자긍심을 한껏 담은 ‘브리태니커’라는 이름은 미국에 해적판으로 소개되기에 이릅니다. 잘 팔리니 투자도 늘어났죠. 선순환을 거듭하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시대의 지식인들로부터 찬사를 받게 됩니다. 20세기 과학계의 거장으로 꼽히는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도 브리태니커의 팬이었다고 하죠.
하지만 브리태니커가 우리의 뇌리가 오래 남는 브랜드로 자리 잡은 까닭은 특유의 세일즈 기법 때문입니다. 바로 ‘방문 판매’ 전략인데요, 동네 서점에서 구입하기에는 덩치도 금액도 무거웠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방문 판매원들의 활약으로 급속히 보급됩니다. 판매원들은 따로 월급을 받지 않았고, 판매 수수료만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일단 집에 들어간다’는 원칙에 따라 때로는 비굴하게, 때로는 강압적으로 백과사전을 홍보했습니다. ‘이 정도는 갖고 있어야 당신의 자녀가 뛰어난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설득부터 ‘이 거실 책장에 브리태니커가 꽂혀 있어야 이 집안의 품격이 드러난다’는 식의 지적 허영 자극까지 총동원되었죠.
덕분에 브리태니커는 20세기 중산층의 상징과 같은 책이 되었습니다. 그 대부분은 인테리어 소품으로서의 소임에 충실했겠지만, 일부는 어느 평범한 가족과 이 세계의 지식을 이어주는 선으로 작동했습니다. 프랑스의 《백과전서》는 두 번째 판이 출간될 수 없었지만, 브리태니커는 판을 거듭하고 거듭했죠. 지식을 상품으로 포장했고, 적극적으로 판매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브리태니커야말로 지식을 ‘소비자’에게 돌려준 백과사전일지 모릅니다. 어떤 소임 때문이 아니라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동기로, 소비자의 시대를 잘 읽어낸 결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