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천연가스와 독일 정치의 50년사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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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프 숄츠 연립 정부가 무너졌습니다. 독일이 직면한 정치 위기의 연원을 따라가면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있습니다.

러시아 천연가스와 독일 정치의 50년사 ①

2025년 1월 6일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세운 1961년, 빌리 브란트는 서베를린 시장이었습니다. 베를린을 동서로 가르는 장벽은 처음에는 철조망이었습니다. 며칠 뒤 벽돌담이 세워졌고, 몇 달 뒤에는 3.6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이 들어섰습니다. 감시탑을 지키는 동독 경비병은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장벽을 넘는 사람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동서 교류와 화합을 외쳤던 브란트는 장벽 건설을 좌절 속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브란트가 속했던 사회민주당(사민당, SPD)은 만년 야당이었습니다. 집권당은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이끄는 기독교민주연합(기민련, CDU)이었죠.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아데나워는 동독을 포함한 공산권을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동독과 수교한 국가와는 외교 관계를 끊겠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공식화했습니다. 그러나 브란트는 아데나워의 강경책이 동독과 소련을 자극해 전쟁 위험을 높인다고 봤죠.
1961년경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있는 동독 군인. 출처: Hellebardius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1960년대 베를린은 미·소 냉전의 최전선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동쪽에는 소련이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양측 탱크가 베를린 도심에서 대치하는 사건도 벌어졌죠. 상황이 험악했지만, 아데나워 총리는 공산주의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협상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할슈타인 원칙을 스스로 지킨 셈입니다. 총리는 손 놓고 있고 오히려 시장이었던 브란트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지도자와 만나 베를린 위기를 해결하려 합니다.

1963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서베를린을 방문해 쇠네베르크 시청 앞에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역사적인 연설을 합니다. 당시 케네디를 보러 40만 인파가 운집해 있었는데, 케네디 옆에 브란트가 있었습니다. 브란트는 엄청난 후광 효과를 입게 되죠. 실제로 브란트는 케네디의 인기를 의식해 사민당 당수 선거에서 자신을 “독일의 케네디”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둘은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이듬해인 1964년 브란트는 사민당 당수로 선출되고, 1969년 마침내 서독 총리에 오릅니다.

총리가 된 브란트는 동독, 폴란드, 소련 등 동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화해하는 ‘동방 정책’을 추진합니다. 폴란드 바르샤바를 방문해서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합니다. 브란트는 접근을 통한 변화를 꾀했습니다. 동독과 소련을 고립시키기보다는 교류·협력해서 경제적 상호 의존성이 커지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이러한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키우는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천연가스 수입이었습니다. 소련은 천연가스 매장량 세계 1위 국가였습니다. 전 세계 천연가스의 33퍼센트가 소련 영토 아래에 깔려 있었습니다. 1970년 서독은 소련과 천연가스 공급 계약을 맺습니다. 서독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자금을 대출해 주고, 소련이 대출금을 천연가스로 상환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서로 손해 볼 게 없는 장사

천연가스는 저장 방법에 따라 세 종류로 나뉩니다. LNG, CNG, PNG입니다. LNG는 기체 상태인 천연가스를 영하 161도에서 냉각해 액체로 만든 것입니다. CNG는 천연가스를 압축해 부피를 줄인 것입니다. PNG는 가스전에서 소비 지역까지 파이프라인을 설치해 기체 상태 그대로 공급하는 것입니다. PNG의 P가 파이프라인(Pipeline)입니다.

서독이 소련에서 들여온 천연가스는 PNG였습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에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깔아 뒀는데, 이걸 서쪽으로 연장해 서독과 오스트리아 등에 천연가스를 수출하기로 한 겁니다. PNG는 파이프라인을 설치해야 해서 초기 비용이 들지만, 한번 인프라를 건설하고 나면 LNG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LNG는 기체를 액체로 바꾸고 배에다 실어 운반해야 하지만, PNG는 기체 상태 그대로 보내면 되니까요.

서독은 소련산 천연가스를 저가에 이용할 수 있었고, 소련은 가스 채굴 기술을 배우고 외화도 벌 수 있어 양측 모두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습니다. 소련산 천연가스는 독일을 거쳐 서유럽 국가들에까지 흘러들었는데, 안정적인 가스 교역을 위해서는 파이프라인이 통과하는 국가들 사이에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산 천연가스 수입은 유럽의 경제 통합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이 열어젖힌 1970년대는 데탕트의 시대였습니다. 1971년 미국 백악관 안보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고,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서 마오쩌둥 국가주석을 만납니다. 국제적인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남한과 북한도 1972년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죠. 브란트는 서유럽과 동유럽을 화해의 길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노벨 평화상을 받습니다.
1973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주유소에 기름이 떨어졌다. 출처: AP

오일 쇼크 이후

그러다 1973년 오일 쇼크가 일어납니다. 4차 중동 전쟁에서 서방 국가들이 이스라엘의 편을 들자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금수 조치를 선언해 국제 유가가 4배 넘게 오릅니다. 오일 쇼크를 겪으며 서유럽 국가들은 에너지가 국가 경제와 안보에 직결되는 전략적 자원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갖게 됩니다.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원을 다변화하기로 합니다.

프랑스는 원전 비중을 크게 늘리기로 합니다. 오일 쇼크 당시 프랑스 전력 생산에서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8퍼센트에 불과했지만, 이후 원전을 대폭 확대해 현재 원자력 비중은 70퍼센트 가까이 됩니다. 한편 독일은 중동산 석유 일변도에서 벗어나 원자력, 천연가스, 재생에너지 등을 혼합해 사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자연히 소련산 천연가스 수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제 정세에 따라 공급과 가격이 널뛰는 중동산 석유보다 공산주의 정권이긴 해도 공급이 안정적인 소련산 천연가스가 더 믿을 만했으니까요.

빌리 브란트 이후 취임한 서독 총리들은 동방 정책을 이어 갑니다. 사민당 정권은 물론이고 기민련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동방 정책의 큰 틀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특히 에너지 정책에선 소련과 점점 밀착했는데, 산업 구조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습니다. 독일은 자동차, 기계, 화학, 철강 등 에너지 집약적인 제조업 분야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이 산업들은 에너지를 안정적이고 저렴하게 공급받아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서독은 값싼 소련산 천연가스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1980년대 초반에 서독은 이미 유럽 최대의 소련산 천연가스 수입국이 됩니다. 천연가스 소비량의 20~25퍼센트를 소련에서 들여오죠. 1990년대가 되자 이 비중이 25~30퍼센트까지 올라갑니다. 소련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 심화를 우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 초반과 후반에 두 개의 대형 사건이 터집니다. 1991년 소련의 붕괴, 1998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집권입니다.


* 〈러시아 천연가스와 독일 정치의 50년사 ②〉로 이어집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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