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는 파운드리의 길을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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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 맞서기 위해 돈을 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그 어떤 방송사도 아닌, CJ와 SK입니다.

SBS는 파운드리의 길을 갑니다

2025년 1월 2일

지난 연말 국내 주식 시장에서 조용히 급상승한 종목이 있습니다. AI나 조선업 관련 주가 아닙니다. 전형적인 20세기 산업, 방송국이 튀었습니다. 바로 SBS입니다. 2024년 12월 19일 SBS 주가는 1만 5390원으로 거래를 마쳤습니다. 2024년 3월 이후 완만한 우하향 기조를 이어 가는 중이었죠. 느리지만 분명한 하락세였습니다. 모회사인 태영건설 사태가 마무리되면서 방송 업계의 전반적인 상황이 주가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다음 날인 12월 20일, 이상 기류가 감지됩니다. 갑자기 2만 원으로 뛰어오른 겁니다. 그리고 이날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SBS가 넷플릭스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기로 한 것입니다. 주말이 지난 후, 12월 23일에는 2만 6000원까지 급등했습니다.

올해부터 6년 동안 SBS가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공급합니다. 물론 지금도 SBS의 드라마, 예능 일부를 넷플릭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규모가 다릅니다. 일단 지금까지 SBS가 방영해 온 거의 모든 콘텐츠가 한국 넷플릭스에 공급됩니다. 당장 새해 첫날부터 1995년 방영되었던 드라마 〈모래시계〉가 풀렸습니다. 앞으로 방영될 신규 콘텐츠도 대상입니다. 외주 제작사와의 IP 문제가 걸리는 일부 신작 드라마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프로그램이 넷플릭스에 걸릴 수 있습니다. SBS 편성 전체를 넷플릭스가 서비스한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SBS는 이번 파트너십으로 어느 정도 규모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일까요? 구체적인 액수는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웨이브나 디즈니 플러스 같은 OTT 플랫폼에서의 실적을 바탕으로 한 증권가의 추정치를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국내 서비스의 경우 6년간 최소 3000억 원 정도의 매출이 예상됩니다. 이 부분은 SBS가 만든 콘텐츠를 단순 판매하는 개념에 해당합니다.

신규 콘텐츠 일부의 경우 넷플릭스가 투자에 나서게 됩니다. 전 세계 동시 공개,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급으로 공급될 수 있습니다. SBS가 〈낭만닥터 김사부 3〉를 디즈니 플러스에 독점 공급하면서 올린 매출이 18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6년간 드라마, 교양, 예능까지 SBS가 제작할 프로그램들을 꼽아 보면 넷플릭스의 투자금은 최소 6000억 원은 될 전망입니다. 1조 원에 달하는 현금이 SBS에 유입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순탄하게 간다면 시총 1조 원 달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평가입니다. 현재 SBS의 시총은 3700억 원 수준입니다.

1200만 OTT의 가능성

이런 소식에 ‘K-콘텐츠의 쾌거’ 같은 단어를 꺼낸다면 시장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얘기가 될 겁니다. SBS 주가는 날았지만, 업계는 당황하고 있습니다. 특히 CJ ENM은 표정 관리가 안 됩니다. 2024년 안에는 어떻게든 마무리가 될 줄 알았던 웨이브와 티빙의 합병이 어그러질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두 플랫폼 모두 위기입니다. 넷플릭스에만 있는 콘텐츠는 많아도 티빙이나 웨이브에만 있는 콘텐츠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드라마는 넷플릭스에 판매하지 않고는 아예 손익을 맞출 수 없습니다. 예능이나 교양도 수익성을 담보하려면 팔 수 있을 때 팔아야 합니다. 지상파는 물론이고 CJ ENM, 종합편성채널 등에서 방영되는 모든 드라마와 많은 수의 예능 프로그램을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국산 OTT라 해서 차별화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 플랫폼의 합병이 주목받습니다. 2024년 9월 기준 MAU(월간 활성 사용자, Monthly active users)는 티빙이 787만 명, 웨이브가 427만 명입니다. 넷플릭스의 1167만 명에 비하면 게임이 안 되지만,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 법인이 출범할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MAU를 단순 합산하면 1214만 명. 넷플릭스를 근소하게 앞지릅니다. 물론, 티빙과 웨이브를 동시 구독하는 인원이 분명히 있을 테니 어느 정도 숫자는 줄어들겠지요. 그러나 그 감소분을 감안하더라도 해볼 만한 게임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가능성 있는 콘텐츠의 한계는 플랫폼의 크기가 만듭니다. 출처: Wavve
예를 들어, 웨이브의 자체제작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피의 게임〉 시리즈는 꽤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잠재 시청자가 400만 명인 것과 1200만 명인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1200만 명과 1억 명은 또 다르고요.  수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콘텐츠는 언급될수록 가치가 올라갑니다. 내 친구 중에 〈피의 게임〉 팬이 있다면 저도 한 번 클릭해 볼 수 있습니다. 세간의 입길에 오르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으면 소외된 느낌까지 들죠. 전형적인 네트워크 효과입니다.

한국 플랫폼 시장을 짊어진 것은

한국 OTT 시장의 지형 변화를 기대했던 이번 합병은, SBS와 넷플릭스의 파트너십 소식과 함께 향후 전망이 불투명해졌습니다. SBS를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다면 산술적으로 웨이브의 효용성 3분의 1이 사라지는 셈이니까요. SBS는 자의든 타의든 뒤통수를 친 겁니다. 

누가 뒤통수를 맞았을 까요. 티빙의 주인은 CJ ENM입니다. 지분의 절반을 갖고 있습니다. 중앙그룹의 SLL도 지분 13퍼센트를 들고 있어 영향력이 있습니다. 웨이브는 SK그룹과 지상파 방송국이 주인입니다. SK텔레콤의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가 지분의 40퍼센트를, 지상파 3사(KBS, MBC, SBS)가 각각 지분 20퍼센트씩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리스크는 SK 측이 짊어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플랫폼이 잘 되든, 되지 않든 방송국은 프로그램을 제작해 웨이브에 공급하면 돈을 받습니다. SBS가 웨이브로부터 벌어들이는 매출은 연평균 400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심지어 업계에서는 SBS가 웨이브에서 지분을 아예 빼버리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돌고 있습니다.

결국, 지상파에서 케이블로, IPTV로, 그리고 OTT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영상 플랫폼 시장에서 넷플릭스에 맞서기 위해 돈을 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방송사도 아닌, SK와 CJ입니다. 실제로 합병을 앞두고 ‘투자’ 명목으로 돈을 태워 2500억 원의 웨이브 빚을 갚은 것은 SK스퀘어와 CJ ENM이었죠. 

콘텐츠 업계의 폭스콘

물론, SBS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SBS에서 일하는 PD 입장이었다면 두 손 들고 환영했을 겁니다. 당장의 급여 인상이나 보너스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플랫폼을 막론하고 우리나라의 방송사들은 ‘다운사이징’ 중입니다. 드라마 제작 편수만 봐도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매일 방영되는 일일드라마를 제외하고 보면, 각 방송사별로 주말드라마 1편 정도가 편성되고 있습니다. 많아도 주중 드라마 한 편 정도가 더 있고요.

제작비가 비싸도 방송국의 간판 프로그램 역할을 했던 드라마가 줄어든 것은 긴축 경영 기조가 방송계에 표준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광고 수익 파이는 줄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덜 만들고 해외 로케 다큐멘터리를 편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수익 감소세가 더 빨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제작진으로서는 새로운 시도, 의미 있는 도전의 기회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투자가 담보된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돈이 좀 많이 들어도 대하 사극 기획을 다시 들이밀어 볼 수 있겠죠. BBC 같은 웰메이드 다큐멘터리도 도전할 수 있을 겁니다. 실현 가능성과는 별개로,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콘텐츠 투자의 길이 열렸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결국, SBS의 이번 결정은 방송 사업자가 아닌 콘텐츠 공급자로서의 진로를 확실히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스튜디오 드래곤도, SLL도, SBS도 넷플릭스의 투자 덕분에 제작 포트폴리오를 충실히 쌓아 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폭스콘이 애플과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 콘텐츠 업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지도요. 한마디로, 이번 파트너십은 넷플릭스의 외주 스튜디오 대열에 SBS가 합류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2019년 SK텔레콤의 oksusu와 지상파 3사의 pooq이 합병하면서 웨이브가 탄생했습니다. 당시 관련 서류들을 살펴보니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당시 공정거래위원회는 이 결합이 일종의 시장 독점이나 경쟁 제한으로 이어지지 않을지를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전 세계 미디어 시장이 합종연횡을 통해 몸집을 키워 살아남기 위한 투쟁에 들어간 시기였는데 말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2018년 기준, 넷플릭스의 MAU는 44만 명, oksusu와 pooq의 MAU는 각각 329만 명, 85만 명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겁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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