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2021년 기준 독일의 전력 생산에서 천연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15퍼센트였습니다. 그중 절반을 러시아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천연가스 통과국
1991년 소련이 붕괴합니다.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이 국제 사회에 등장하면서 천연가스 공급망이 복잡해집니다. 러시아에서 독일로 향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같은 독립국을 지나게 됩니다. 과거에는 다 소련 땅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이제 남의 나라 땅을 지나게 된 겁니다. 천연가스 수출국(소련)과 수입국(독일 등 유럽 국가)만 있던 관계에 파이프라인 통과국이 끼게 되죠.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가치가 상승합니다. 당시 러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의 70~80퍼센트가 우크라이나를 거쳤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파이프라인을 지나가게 해주는 대가로 천연가스를 다른 국가보다 싸게 쓰고, 러시아로부터 통행료도 받았습니다. 가스 요금과 통행료 협상 과정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자주 충돌했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가스를 중간에서 빼돌린다는 의혹도 제기합니다.
그러다 2004년 11월 우크라이나에서 오렌지 혁명이 일어납니다.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친러 성향의 여당 후보가 당선됐는데, 부정 선거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오렌지색 깃발을 흔들며 재선거를 촉구했습니다. 결국 재선거가 치러졌고 친서방 정권이 들어섭니다. 새 정권이 나토 가입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합니다.
그러자 푸틴은 천연가스를 무기로 활용합니다. 2005년 연말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는 천연가스 가격을 새해부터 1000세제곱미터당 50달러에서 230달러로 올리겠다고 통보합니다. 우크라이나는 강하게 반발하면서도 80달러선까지는 수용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2006년 1월 1일부터 천연가스 공급을 끊어 버립니다. 1월 4일 95달러로 협상이 타결되며 공급이 재개됐죠.
그해 겨울은 유독 추웠습니다. 우크라이나도 곤혹스러웠겠지만, 이 파이프라인을 통해 가스를 공급받는 서유럽 국가들도 사흘간 난리가 났습니다. 이 사태를 계기로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같은 파이프라인 통과국의 갈등이 에너지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노르트스트림
독일은 우크라이나를 거치지 않고 러시아에서 직접 가스를 들여오는 신규 가스 공급 노선을 구상하게 됩니다. 발트해 해저에 1200킬로미터가 넘는 파이프라인을 설치해서 러시아에서 독일로 직접 가스를 공급하는 노르트스트림(Nord stream) 프로젝트입니다. 노르트스트림은 파이프라인 두 개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파이프라인이 수송하는 가스는 연간 550억 세제곱미터입니다. 연간 유럽 천연가스 수요의 4분의 1에 달합니다.
노르트스트림 프로젝트를 주도한 독일 총리가 게르하르트 슈뢰더(1998~2005년 재임)입니다. 당시 사민당은 녹색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녹색당의 정책을 수용해 단계적인 탈원전 계획을 수립합니다. 독일은 원전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나라였습니다. 원전을 대체할 에너지원이 필요했고, 그게 바로 천연가스였습니다.
노르트스트림 프로젝트는 탈원전 정책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슈뢰더의 사심 가득한 개인 프로젝트이기도 했습니다. 푸틴은 슈뢰더에게 형님 대접을 했는데, 슈뢰더가 절친 푸틴에게 큰 선물을 줬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사실상 러시아의 로비스트처럼 행동했던 슈뢰더는 2005년 총리 퇴임 이후에는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러시아 국영 가스 회사 가스프롬의 관계사에 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연간 수십억 원을 받습니다. 노르트스트림은 2011년 완공됩니다.
슈뢰더의 사민당 이후 독일 정권은 다시 기민련이 잡습니다. 앙겔라 메르켈(2005~2021년 재임)이 총리가 됩니다. 우리에게 메르켈은 원전 폐쇄 정책으로 잘 알려졌지만, 사실 메르켈은 집권 초기에 이전 사민당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재검토합니다. 제조업계가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기 요금이 싼 원전을 계속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2010년 가을 메르켈은 원전 17기의 수명을 연장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합니다. 후쿠시마 사고가 발생하고 보름 뒤에 치러진 독일 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지사 선거에서 녹색당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납니다. 기민련은 이 지역에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주지사 자리를 한 번도 뺏긴 적이 없었습니다. 후쿠시마 사고로 원전 폐쇄를 주장하는 녹색당의 지지율이 급등한 것이었죠.
결국 메르켈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탈원전 정책으로 돌아섭니다. 2022년 말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하죠. 즉 메르켈은 원래부터 원전에 반대한 게 아니라, 대중이 지지하는 탈원전 정책을 녹색당이 주도해 기민련 표를 다 가져가기 전에 태도를 바꿨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당시 독일 전력 생산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18퍼센트였습니다. 재생 에너지원을 늘린다 해도 부족분을 다 메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석탄 발전을 늘릴 수도 없었죠. 대안은 역시 천연가스였습니다. 2012년 메르켈 정부는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를 추진합니다. 기존의 노르트스트림1 바로 옆에 파이프라인을 추가로 설치해 수송량을 두 배로 늘리는 사업입니다.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는 2021년에 완공됩니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 제조업에 저비용 에너지를 제공하고, 러시아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가스 거래 계약을 맺었다고 말합니다. 노르트스트림1과 2의 파이프라인은 러시아 서부 비보르크에서 시작해 발트해 해저를 지나 독일 북부 그라이프스발트에 닿는데, 공교롭게도 이 지역은 메르켈의 선거구입니다.
독일과 러시아가 노르트스트림 건설을 논의할 때 우크라이나는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독일과 러시아를 직접 연결하는 파이프라인이 개통되면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파이프라인의 역할이 줄어들 것이고, 결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프랑스와 함께 EU의 중심축인 독일이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하게 되면 EU 차원의 대러 제재에 한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진다고 주장했죠. 그러나 독일과 러시아는 순수하게 경제적인 프로젝트라며 사업을 밀어붙입니다.
러시아의 덫에 걸린 독일
우크라이나의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계속 추진하자 2021년 11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합니다.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위기가 고조됩니다. 주요 언론은 각국 정보기관을 인용해 개전일을 예상하는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 러시아에 전례 없는 제재를 가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런데 천연가스를 인질로 잡힌 독일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2021년 기준 독일의 전력 생산에서 천연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15퍼센트였습니다. 그중 절반을 러시아에서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제재에 동참했다가 러시아가 보복으로 파이프라인을 잠그기라도 하면 당장 독일 공장들이 멈출 수 있습니다. 독일은 일단 ‘신중 모드’를 택합니다.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합니다. 그러나 독일은 살상 무기는 수출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무기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2022년 1월에는 우크라이나가 ‘방어용’ 무기 제공을 요청하자 이마저도 거부하고 대신 헬멧 5000개를 보내 구설에 오르기도 합니다. 미국과 프랑스가 러시아를 국제 금융 거래망에서 퇴출하자고 했을 때도 독일 정치권에선 반대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경제적으로 러시아와 깊이 얽혀 있어 독일도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반면 독일과 함께 EU를 이끄는 쌍두마차인 프랑스는 전력 생산에서 원전 비중이 70퍼센트입니다. 러시아 제재에 거칠 것이 없었죠.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에 강력한 제재를 경고하면서도 푸틴, 바이든과 전화 통화를 하며 위기 중재에 나섭니다. 그런데 EU의 또 다른 축인 독일이 러시아 제재에 소극적으로 나오다 보니, 독일이 나토의 고리를 약하게 만든다는 비판이 제기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독일도 태도를 바꾸기는 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틀 전인 2022년 2월 22일 독일은 노르트스트림2 사업을 중단하기로 합니다. 침공 이후인 2월 27일에는 숄츠 총리가 ‘시대 전환(Zeitenwende)’을 약속합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지해 온 독일의 방위 정책을 대전환하기로 합니다. 1000억 유로의 특별방위기금을 만들고, GDP의 2퍼센트 이상을 국방에 투입하겠다고 했죠.
그러나 독일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습니다. 2022년 3월 미국과 영국이 러시아산 가스와 석유의 수입 금지를 추진합니다. 러시아가 가스와 석유를 팔아 전쟁 자금을 확보하고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다른 건 몰라도 에너지 제재만큼은 동참하기 어렵다고 밝힙니다. 숄츠 총리는 대러 제재에서 러시아 에너지는 제외하자면서 “유럽의 에너지를 러시아 외 다른 방식으로 확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독일을 포함한 유럽이 사실상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인질이라는 말이 독일 총리 입에서 나온 겁니다.
신호등 연정 붕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다음 달이면 3년을 맞습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사이 독일은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덫을 벗어났습니다. 대신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유럽 내 파이프라인 수입을 늘렸고, 북해 연안에 LNG 터미널을 설치해 미국과 카타르 등에서 LNG를 들여오기로 했습니다. 러시아 의존도를 낮춘 대신 미국 의존도를 높이는 방향을 택한 것이죠.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했던 대가는 컸습니다.
숄츠 총리는 2021년 12월 신호등 연정을 꾸렸습니다. 슐츠 총리가 속한 사민당과 자민당, 녹색당이 손을 잡았습니다. 세 정당의 상징색인 빨강, 노랑, 초록에서 신호등 연정이란 말이 나왔죠. 신호등 연정은 초반에는 잘 굴러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러-우 전쟁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이 줄면서 저 멀리 미국에서 LNG를 받게 됩니다. 에너지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죠.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다른 공급처의 천연가스나 다른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면서 2019년 대비 전기 요금이 3배 올랐습니다. 우리나라보다 4배 정도 높습니다. 2023년 하반기 기준 독일의 가정용 전기 요금이 킬로와트시당 41.6센트로 EU 27개국 중 최고였습니다. EU 평균은 28.5센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산업용 전기입니다. 독일 경제의 심장은 제조업입니다. 제조업은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이라 에너지 가격이 올라가면 직격탄을 맞습니다. 독일 정부는 280억 유로를 투입해 2024~2027년 제조업의 전기 요금을 감면해 주기로 하지만, 역성장의 늪을 빠져나오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독일은 2023년과 2024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다시 ‘유럽의 병자’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중단으로 물가가 오르고 제조업 경쟁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독일 GDP의 5퍼센트와 수출의 15퍼센트를 차지하는 자동차 산업까지 어려워집니다. 중국 전기차 회사들이 급성장하면서 전통의 독일 회사들이 휘청거리게 됐죠. 중도 좌파 사민당 출신인 숄츠 총리는 자동차 회사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사회 복지 지출을 늘려서 경기 침체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중도 우파인 자민당 출신의 재무장관이 반대했죠. 국가 부채를 줄여야 할 판에 지출을 늘리는 게 말이 되냐는 주장이었습니다. 숄츠는 재무장관을 해임합니다.
그렇게 자민당이 신호등 연정에서 빠져나갑니다. 연정에 남은 사민당과 녹색당의 의석수를 합하면 절반이 되지 않습니다. 숄츠 총리는 자신에 대한 신임 투표를 의회에 요청했는데, 2024년 12월 16일 부결됩니다. 결국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을 건의합니다. 그렇게 신호등 연정은 무너졌습니다.
2025년 2월 23일 독일은 조기 총선을 치르게 됐습니다. 최근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사민당은 16퍼센트로 3위에 그치고 있습니다. 기민련이 31퍼센트로 1위이고, 반이민을 앞세운 극우 정당 독일대안당(AfD)이 19.5퍼센트로 2위입니다. 녹색당은 12.5퍼센트로 4위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금 독일 정치의 위기는 러시아산 천연가스에서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