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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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가 일주일째 불타고 있습니다. 황망한 상황 앞에서 누군가는 원망할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①

2025년 1월 14일

미국은 지금 자연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텍사스와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남부에는 이례적인 한파와 겨울 폭풍이 몰아치고 있고, 워싱턴DC를 포함한 동부와 중부 지역은 폭설로 도시가 마비됐습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는 일주일째 불타고 있습니다. 산불입니다. 산불은 강풍을 타고 숲을 태우며 도심으로 밀고 내려와 1만 2000채가 넘는 건물을 삼켰습니다. 서울시 4분의 1이 넘는 면적이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불은 우리에게 생각해 볼 지점을 여럿 남기고 있습니다.

수도관

바싹 마른 숲과 초목을 따라 도시로 내려온 산불을, 소방관들은 어떻게든 막아내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죠. 물이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LA는 대도시입니다. 상수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소화전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고요. 그러나 이 시스템은 백 년도 더 전에 설계된 것입니다. 몇 채의 집을 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몇백 채, 몇천 채의 집을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지역 곳곳에 설치된 물탱크는 빠르게 비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수도관이 터져 귀한 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백 년 전에는 이런 산불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925년에 비해 섭씨 1.3도 정도 더 더운 지구에 살고 있으니까요. 

방화범

그렇다면 누가 이 불을 시작했을까요. 모호한 주장들이 뒤섞입니다. 새해를 맞아 쏘아 올린 폭죽으로 발생했던 불씨가 그 시작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폭죽을 쏘아 올린다고 이런 화재가 발생하진 않죠. 불씨를 화재로, 화재를 산불로, 산불을 재난으로 키운 것은 기후 위기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당연히 나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가 이번 산불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아직 학문적으로 규명하고 증명해야 할 과정들이 많고, 그 과정이 끝나야 이번 산불의 범인이 지구 온난화 때문이라고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짐작해 볼 지점들은 있습니다. LA 지역의 강수량이 널을 뛰었다는 점입니다. 2022년에서 2023년 사이의 겨울에, 그리고 그 이듬해인 2023년에서 2024년 사이의 겨울에는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그 결과 초목이 우거지게 됩니다. 그런데 2024년부터는 역대급 가뭄이 시작됐습니다. 2024년 11월부터 3개월 동안 비가 단 한 차례 내린 곳도 있습니다. 이번 겨울, LA의 강수량은 평년 대비 200분의 1 수준이었습니다. 무성했던 수풀이 바싹 말라 산불의 연료가 되었습니다.

‘수문 기후 변동성(Hydroclimate volatility)’이 증가하는 겁니다. 수문 기후 변동성은 극단적으로 건조한 상태와 매우 습한 상태가 번갈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도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기후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작년과 올해, 지난달과 이번 달, 어제와 오늘 날씨가 극과 극을 달리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기후학자들의 연구 결과, 온난화로 인해 이러한 변동성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온도가 높아져 바닷물이 더 많이 증발하면, 대기가 예전보다 더 많은 수증기를 품게 되면서 전체적인 물순환 시스템, 기후 현상이 뒤틀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홍수와 가뭄, 산사태와 산불 등의 규모가 지금까지와는 달라집니다. 인간이 적응하고 대비했던 규모를 훨씬 넘어서게 됩니다.

5피트 규칙

황망한 상황 앞에서 누군가는 원망할 대상을 찾기 마련입니다. 부유한 이웃에게 책임을 돌리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 피해를 크게 입은 지역 중 하나인 팰리세이즈는 비교적 최근 개발된 지역입니다. 해변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 멋진 저택이 들어서 있습니다. 숲과 바다를 한눈에 즐길 수 있는 절경을 품은 고급 주택이니, 집값이 만만치 않습니다. 당연히 유명인과 부유한 사람들이 찾아들었죠. 그런데 이 멋진 집들이 화재를 키웠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캘리포니아는 주 건축법으로 건물 가장자리부터 최대 100피트(약 30미터)까지 초목을 깎거나 제거하도록 규제하고 있습니다.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 최근에는 주택 바로 주변 5피트 이내에는 모든 가연성 물질을 제거하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고요. 하지만 팰리세이즈의 고급 주택들이 이러한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떤 집은 주변에 키 큰 나무를 빽빽하게 심고 생울타리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산불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그 어떤 초록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

나라 밖에서 재난의 이유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음모론자로 유명한 극우 인플루언서, 알렉스 존스 같은 사람들입니다. 존스는 LA 소방관들이 우크라이나에 장비를 기증하는 바람에 여성용 핸드백을 양동이로 사용해 산불을 진압하고 있다는 내용을 X 계정에 게시했습니다. 이 게시물은 조회 수가 90만 회를 넘겼고요. 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 존스가 말한 여성용 핸드백은 소방관들이 원래 사용하던 캔버스 물주머니입니다. LA 소방국은 화마뿐만 아니라 거짓말과도 싸우고 있습니다.

존슨의 거짓말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는 열성적인 트럼프 지지자로, 가장 민주당스러운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는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극도로 혐오합니다. 주 정부의 실책은 트럼프의 영광이고, 강력한 차기 대선 후보의 경력에 오점이 될 겁니다. 존슨의 동영상을 보면 한국의 어떤 유튜브 채널들이 떠오릅니다. 후원자들을 향해 의심스러운 제품을 홍보하며 도파민 샘솟는 음모론을 늘어놓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존슨은 한몫 챙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챙기는 것 없이 즐거움을 위해 거짓을 퍼트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듯한 거짓말이 너무 쉬워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이미지 같은 것 말입니다.
거짓말보다 거짓 이미지가 더 쉬워진 시대입니다. 출처: ABC 10 News
관심받기 딱 좋은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거짓입니다. LA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꼽히는 게티 미술관도 화마에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요, 이 또한 거짓입니다. 가진 자원을 총동원해 대응해도 모자랄 재난 앞에 누군가는 소소한 관심을 받기 위해,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거짓을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무례합니다. 피해자의 절망과 소방관의 사투를 허무하게 구겨버립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생성형 AI로 거짓을 사실처럼 포장하는 일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낙서보다 간단하게 조회 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죠. 거짓이 퍼져나가기에 딱 좋은 시기이기도 하고요. 게다가 안타깝게도 재난은 기회입니다. 사람들이 겁에 질리고 절망했을 때야말로 쉽게 그 마음을 쥐고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말이죠. 도널드 트럼프, 일론 머스크도 이 상황을 기회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 ②〉로 이어집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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