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지금 정치적으로 혼란합니다. 평화로운 듯 일상은 계속되지만, 한 발짝만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매일 같이 사상 초유의 사건을 맞이하고 있죠. 지난 1월 19일 새벽에 발생한 서울서부지방법원 소요 사태도 그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오랜만에 사적인 물리력이 공적인 영역을 파괴하는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의 폭력은 어떻게 정당화되었고 실행되었을까요. 그들만의 세계관을 만든 것은 그들만의 언어입니다.
소외
여러분께서는 투표장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한 표를 행사하시나요? 저는 여러 번, 투표용지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저 자신을 발견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차악을 선택하기도 했고, 때로는 사표가 될 것을 알면서 한 표를 행사하기도 했죠. 우리 사회는 지금 ‘2지 선다형’입니다. 둘 중 정답은 없습니다. 1번과 2번 중, 나의 신념과 판단에 그나마 가까운 쪽을 택할 뿐입니다.
그런데 1번으로부터, 그리고 2번으로부터 나의 신념과 삶을 완전히 부정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트럼프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던 미국 북동부와 중서부 지역의 ‘러스트 벨트’ 같은 곳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지역의 노동자 계층은 한때 강력한 민주당 지지층이었습니다. 제조업의 중심지에 들어선 단단한 노동조합은 당연히 보수 성향의 공화당이 아니라 진보 성향의 민주당과 손을 잡았으니까요. 그런데 이곳에 녹이 슬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제조업 기반이 흔들리고 일자리가 줄면서 노동조합의 힘도 예전같지 않아졌습니다. 게다가 민주당은 환경과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며 노동자들의 삶과 점차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1번도, 2번도 이들을 대변할 수 없게 되죠. 결국 완전히 새로운 세력이 러스트 벨트를 차지합니다. 바로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트럼프는 이번 대선 기간 지지자들의 분노를 향해 ‘당신이 맞다’며 이민자들이 미국을 침략하고, 미국 시민의 일자리와 혜택을 빼앗고, 고양이와 개를 잡아먹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무소속의 버니 샌더스 상원 의원은
질문합니다. “이것은 미친 설명(crazy explanation)이지만, 설명이긴 합니다. 자, 이제 민주당의 설명은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미국에서만 관찰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럽에서 점차 강해지고 있는 극우 정당의 기세도 대안적인 정치 세력을 찾는 사람들의 지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극우 정당은 친환경 정책에 밀려난 농민들의 분노로 세를 키우기 시작했죠. 프랑스에서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이민자에 일자리와 복지 혜택을 빼앗긴다고 믿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극우 정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가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하기는커녕, 자신의 신념과 삶을 부정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선택지 밖의 세력을 선택합니다. 극우 세력이 부상하고 있습니다.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에겐 국민의힘도, 이른바 ‘조·중·동’도 우리 편이 아닙니다.
발견과 소속
누구나 선을 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을 넘을 때는 일종의 ‘각오’나 ‘비용’이 필요하니까요. 법원 유리창을 깨고 판사실 문을 부수고 돌아다닐 정도로 선을 넘으려면 ‘광신’에 가까운 믿음이 필요합니다. 뒤따를 사법적 책임이나 사회경제적 비용 등을 생각하면 말이죠.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광신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기자이자 언어학자인 어맨다 몬텔은 저서 《
컬티시》에서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나 사기, 음모론에 빠져드는 과정을 언어라는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이른바 ‘극우 유튜버’의 콘텐츠도 비슷한 틀로 분석해 볼 수 있겠습니다.
몬텔이 이야기하는 ‘컬트적’ 언어의 첫 번째 핵심 요소는 우리와 저들을 가르는 이분법입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갈라치기’라는 단어에 해당하겠지요. 우리끼리 사용하는 은어나 약어는 물론이고, 상대방을 향한 악의적인 멸칭도 포함됩니다. 한국 극우 유튜버들의 경우 우리 편을 지칭하는 언어는 ‘애국 시민’, ‘자유 우파’입니다. 반면, 저들을 지칭할 때는 ‘빨갱이’, ‘종북 좌파’, ‘민노총’, ‘페미’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어떤 명사, 어떤 동사 앞에도 붙일 수 있습니다. 명사 앞에 붙이면 멸칭이 되고, 행위 앞에 붙이면 불의의 상징이 됩니다.
1978년, 90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던 사이비 종교단체 인민사원(People's Temple)의 지도자 짐 존스는 순종적인 지지자들을 ‘나의 아이들’이라 불렀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불리고 싶어 했죠. 존스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외부 세력’이었으며 ‘배신자’는 처단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와 저들의 이름이 달라지면 소속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정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확실한 프레임이 생깁니다.
유도적 언어
편이 갈리고 우리만의 언어가 자리 잡게 되면 중급 코스가 필요합니다. 다음으로 습득할 것은 ‘유도적 언어(loaded language)’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방에게 신랄한 폭언과 선동적인 별명을 붙이곤 하죠. 팟캐스트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거침이 없으면서 딱히 어려운 말이나 현학적인 근거를 들이대지 않습니다. 기억하기 어려운 데이터 같은 것도 없어요. 트럼프가 이야기하는 숫자는 늘 딱 떨어집니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말이죠.
그 결과 지지자들의 머릿속에는 몇몇 단어가 남습니다. 민주당 소속의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조롱하는 ‘뉴스컴[NewScum, 뉴섬과 인간쓰레기(scum)를 합친 말]’이라는 별명이나 ‘개나 고양이를 잡아먹는’ 이민자, ‘20! 50! 100 percent!’라며 외친 관세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언어는 정서적으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개나 고양이’라는 말만 들어도 이민자에 대한 혐오가 떠오르는 식으로 말이죠.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유도적 언어라고 합니다.
한국의 극우 유튜브 콘텐츠에서는 ‘중국’, ‘적화 통일’, ‘부정 선거’ 등이 이에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여당과 야당의 지지율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당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할 것입니까, 아니면 중국식 사회주의로 갈 것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식입니다. 다만, 이는 새로운 세력이 만들어 낸 용어는 아니지요. 특정 집단이 시대적, 사회적 배경에 의해 이미 유도적 언어로 학습하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 커뮤니티 등을 통해 중국 교포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담론에 노출된 세대 등을 짐작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들이
반복 재생되면 분노가 차곡차곡 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