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스에 모인 사람들은 전 세계 유수 기업의 최고 경영진이며, 각 국가의 지도자입니다. 트럼프는 그들을 향해 대놓고 ‘협박’을 했습니다. 이제 체면을 차리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규칙은 깨지고 실험이 용인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 실험은 미국이 시작했고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와 기업은 보복을 당하게 될 겁니다. 작게는 관세로, 크게는 제재로 말이죠.
트럼프의 연설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죠. 먼저, 전 세계 기업을 향해 이야기했습니다. ‘미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세율을 적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기까지는 제안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관세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는 얘기는 협박입니다. 트럼프는 수천억 달러, 심지어 수조 달러를 미국 재무부에 납부하게 될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가 완성되면서 관세는 경제에 해롭다는 인식이
경제학의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등장하면서 변화가 감지됩니다. 예를 들어,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CEO는 “관세가 ‘적당히’ 작동한다면 기업이 감당해야 할 규제 부담이 낮아져 관세 부담을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또, JP 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CEO는 국가 안보에 도움이 된다면 인플레이션은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죠.
게다가 트럼프는 권력의 크기를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OPEC을 향해서는 유가를 낮춰달라고 이야기했고, 연준을 향해서는 금리 인하를 요구할 것이라 선포했습니다. 미국의 행정부는 OPEC에게도, 연준에게도 지시할 권리가 없습니다. OPEC 국가들은 주권국이며, 금리 결정 과정에 정치적 목소리가 개입하면 금융 시장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트럼프는 마치 원래부터 미국 대통령에게 그럴 권리가 있었던 것처럼 당당히 이야기했죠.
올해 다보스 포럼은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정치 및 경제 질서의 변곡점’으로 봐야 한다는 경제학자들의
전망을 내놨습니다. 분석에 참여한 학자 중 61퍼센트가 트럼프 2기는 이 세계에 장기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봤죠. 정치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주류 경제 이론을 대놓고 비난했습니다. “모든 글로벌 리더들이 각본에서 벗어나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번 포럼에서 지난 25년간 유럽은 경제 성장을 세계 무역의 증가세와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에 의존해 왔다면서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AI: 시간과의 경쟁
새로운 시대의 충격파를 정면으로 맞은 올해 다보스 포럼, 정작 주제인 ‘지능형 시대를 위한 협력(Collaboration for the Intelligent Age)’에 관해서는 관심이 크지 않았던 것 같은 인상입니다. 트럼프라는 씬 스틸러가 워낙에 강력하기도 했고, 프론티어 AI 기업의 수장들이 트럼프의 취임식에 참석하느라 다보스까지 날아오지 못한 탓도 있었죠. 하지만 여전히 AI는 다보스에서도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단, 이 시대를 ‘지능형 시대’라고 정의했다는 점에서 엿보이듯, AI는 이제 변수가 아니라 상수였습니다.
샘 올트먼이나 젠슨 황 같은 록스타는 없었지만, 구글 딥마인드의 데미스 허사비스,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AI의 대부’로 불리는 요슈아 벤지오 등 생성형 AI 시대를 직접 설계한 사람들이 다보스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메타의 AI 수석 과학자로 오픈소스 AI 계를 이끌고 있는 얀 르쿤의 발언입니다.
얀 르쿤은 향후 3년에서 5년 사이,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해 행동할 수 있는 AI가 등장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사실, 글로 세계를 배운 AI 모델이 인간의 몫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기란 힘들 겁니다. 제한된 영역에서 전문성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요. DeepSeek의 R1 모델이나 오픈AI의 o1, o3 모델은 추론 시간을 늘려 성능 개선을 꾀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얀 르쿤의 생각입니다. 물리적인 세계를 기억하고, 기억을 지속하며 이를 바탕으로 추론하고, 복잡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차세대 AI는 현재 생성형 AI 모델의 근간이 되는 트랜스포머 아키텍처로는 실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완전히 새로운 AI의 등장이 필연적이라는 얘기죠. 그리고 그제야 진정한 AI 에이전트 시대가 열린다는 겁니다.
다만, 마냥 낙관하기만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요슈아 벤지오 교수는 AI 에이전트의 위험성을 강조했습니다. AGI나 초지능과 관련된 모든 부정적인 시나리오는 에이전트가 있을 때 발생한다는 것이지요. 쉬이 납득이 가는 주장입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AI 에이전트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외주화하는 꼴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처음에는 반복적이고 간단한 일일 겁니다. 쇼핑 리스트를 짜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그 범위는 자연스럽게 확장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핵미사일의 스위치를 누를 것인가까지 AI가 결정하게 되는 이야기도 현실화할 가능성이 있죠.
다보스: 우리는 죄를 지었다
다보스 포럼은 1971년, 제네바 대학교의 클라우스 슈밥 교수가 주축이 된 ‘유럽 경영 포럼’으로 출발했습니다. 이후 세계경제포럼을 이끌어 온 슈밥 교수는 2012년 폭탄선언을 합니다. “현재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죄를 지었다.”
2008년 금융 위기를 기점으로 자본주의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균열은 지금 민주주의까지 위협하고 있죠. 그 결과가 올해 다보스 포럼에서 트럼프가 선언한 새로운 시대의 경제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보스에는 기업인과 정치인이 모였습니다. 이들에게 AI는 과학적 진보가 아니라 기업과 국가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생산성 폭발로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기반까지 다시 단단히 다져 줄 구원자여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기술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AI를 실무에 활용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죠. AI 에이전트야말로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궁극의 도구입니다. 다만, 또 다른 미래의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면 자세히 들여다보고 따져봐야 하겠죠. 석학의 경고를 그저 지나쳐서는 안 될 겁니다.
뵈르게 브렌데 다보스 포럼 총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아 세계를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 방법을 논의했다”라고 폐회사에서 밝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시대가 얼마나 불확실한지, 어떻게 불확실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포럼이었다고 평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