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는 먼로주의를 부활시켜 서반구에서 미국의 이익을 재확인하려고 합니다. 관세는 그 일부일 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4일부터 캐나다와 멕시코산 제품에 부과하기로 했던 25퍼센트 관세를 한 달 유예했습니다. 관세 부과의 명목은 미국과 국경을 맞댄 캐나다와 멕시코가 불법 이민과 마약 유입을 제대로 막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두 나라는 국경 안보 강화를 약속해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트럼프의 기준에 못 미치면 관세 위협이 재개될 수 있습니다.
트럼프는 취임하자마자 관세 위협으로 콜롬비아, 멕시코, 캐나다, 파나마 등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무역 협상이나 이민 문제로 포장되고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서반구에서의 미국 통제권 회복’이라는 먼로주의적 발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대외 정책이 다시 20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죠.
건국 초기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갓 독립했으니 다른 나라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죠. 건국 당시 미국의 인구는 250만 명 수준이었습니다. ― 이 무렵 조선 인구가 1800만 명입니다. ― 미국이 독립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사실 미국이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지원이 컸고, 무엇보다 영국이 그 직전에 프랑스와 7년 전쟁을 치르느라 힘이 빠져 있었죠.
유럽은 미국 일에 (제발 좀) 간섭하지 말아 달라던 고립주의는 제임스 먼로 대통령 시기에 이르러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확대됩니다. 1823년 먼로 대통령은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지 않고 신생 독립국에 간섭하지 않아야 하며, 미국 역시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먼로 독트린은 강제할 수단이 없는 이상주의적 선언에 불과했습니다. 힘없는 나라 미국의 외교 정책을 유럽 열강이 따를 이유가 없었죠. 미국이 그러거나 말거나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토를 계속 늘립니다. 러시아가 알래스카의 영유권을 확보했던 것도 이 무렵입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남북 전쟁을 끝내고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를 맞습니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통합을 이루면서 국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19세기 후반이 됐을 때 지금 우리가 아는 강대국 미국이 완성됐죠. 유럽 각국이 유럽 대륙의 정치 혼란으로 식민지 건설에 힘이 빠져 있던 그 무렵부터, 미국은 자연히 시선을 밖으로 돌리게 됩니다. 시작은 미국과 인접한 중남미였습니다.
미국의 팽창적 고립주의는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마침내 말뿐이던 먼로주의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은 알래스카를 매입하고, 중미 대서양 운하 건설에 공을 들입니다. 푸에르토리코와 쿠바를 정복하고, 버진아일랜드를 매입합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미국과 인접해 있습니다. 식민지를 찾아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넌 유럽 열강과 달리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 거죠.
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미국의 시선은 대서양 건너 구대륙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의 남단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칠레와 과테말라 쿠데타에 개입해 친미 독재 정권을 세우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공 게릴라의 상륙 작전을 지원합니다.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의 내전에도 개입했죠. 모두 미국의 뒷마당(backyard)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20세 후반 들어 먼로주의는 폐기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결정적 장면은 1978년 지미 카터가 미국이 갖고 있던 파나마 운하 운영권을 파나마에 넘긴 것이었죠.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운하는 인류 역사에 기록될 공학적 성취였습니다. 동시에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이 끝나자 미국 외교 정책의 엘리트들은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오점으로 지적되는 중남미 개입을 줄이기로 합니다. 그러고는 눈을 돌린 곳이 중동과 아시아·태평양입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벌였고, 이슬람 테러 조직과도 싸웠습니다.
그러는 사이 중남미 국가들은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 정권을 수립했지만, 정치 혼란은 여전했습니다. 미국은 중남미의 정치적 불안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뒷마당의 혼란이 미국의 안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남미는 원래 그런 지역이니까 계속 낙후돼 있도록 내버려 두고 미국은 중동과 아시아에 집중했습니다.
미국이 뒷마당을 방치하는 동안, 2000년대 들어 떠오르는 강대국 중국이 서반구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과 유럽의 자본 시장 경색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중국은 중남미 국가들에 대규모 투자와 대출을 제공해 통제력을 키웠습니다.
지금 중국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등 중남미 주요 국가에서 미국을 제치고 최대 역외 무역 상대국으로 올라섰습니다. 파나마 운하 운영의 통제권도 상당 부분이 중국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미국에서 불과 14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쿠바에는 중국의 도청 기지가 들어섰고, 브라질은 중국과 브릭스(BRICS) 동맹으로 경제, 외교, 군사, 안보 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다시 트럼프의 관세 정책으로 돌아가자면, 트럼프의 관세를 단순히 관세로만 볼 수 없습니다. 트럼프는 워싱턴의 시선을 다시 중남미로 옮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먼로주의를 부활시켜 서반구에서 미국의 이익을 재확인하려고 합니다. 관세는 그 일부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