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①

bkjn review

케네디 주니어라는 인물을 거물급 정치인으로 키운 것은 팬데믹이었습니다.

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①

2025년 2월 17일

“포장 식품(packaged food)은 전 세계에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먹을거리를 제공합니다. 음식물 쓰레기도 줄여줍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로랑 프레이세 네슬레 CEO의 발언입니다. 얼마 전 실적 발표 자리에서 한 이야긴데요, 뜬금없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습니다. 시대에 좀 뒤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식품 대기업의 CEO라는 발언자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좀 하나 마나 한 얘기 같기도 하지요. 그런데 굳이 이런 코멘트를 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트럼프 행정부의 문제적 인물 때문입니다.

요즘 일론 머스크가 뉴스를 독식하고 있죠. 하지만 머스크를 능가할지도 모르는 인물이 입각했습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Robert F. Kennedy Jr.) 보건복지부 장관입니다. 백신 반대론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죠. 자리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아니, 자리를 맡기에는 좀 위험해 보이죠. 아이들에게 백신을 접종해서는 안 된다니, 이런 사람이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는 상황이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케네디는 헤프닝이나 농담에 머물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어쩌면 머스크보다 더 극적인 변화를 몰고 올지도 모르는 사람이죠.

인정 욕구

1963년 11월 암살로 세상을 떠난 존 F. 케네디는 케네디 장관의 큰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인 로버트 케네디 또한 형 못지않은 거물급 정치인이었는데요, 법무부 장관, 뉴욕주 연방 상원의원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1968년, 로버트 케네디 역시 암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열네 살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케네디 주니어는 엇나갔습니다.

청소년기에는 마리화나 등의 마약 문제로 여러 차례 전학을 다녀야 했습니다. 집안의 전통대로 하버드에 진학했고, 아버지처럼 버지니아대 로스쿨에 진학했지만, 중독 문제는 점점 심해졌습니다. 학업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헤로인 소지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으며 비행기에서 정신을 잃기도 했죠. 이후 케네디는 스스로가 마약 중독자였음을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너무 버거웠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문의 이름도, 아버지의 유산도 말입니다. 자서전 《American Values》에서 케네디 주니어는 어머니에게 사과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버지의 이상과 어머니의 이상, 그리고 스스로의 이상에 미치지 못한 점”에 관해 용서를 구했다는 겁니다.
로버트 F. 케네디의 사망은 미 전역을 충격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출처: CBS
반백신 투사의 탄생

방황을 끝낸 케네디 주니어는 야심가로 거듭납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환경 변호사로서 입지를 다지게 되는데요, 언론의 주목도 받게 되죠. 2007년에는 글로벌 대기업 듀폰을 상대로 3억 8200만 달러의 배상 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듀폰의 공장으로 인해 웨스트버지니아주 주민들이 중금속에 노출된 사건이었습니다.

경력이 탄탄해지면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TV쇼에도 얼굴을 비추고 강연도 적극적으로 다닙니다. 정치인이 되기 위한 밑그림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영향력’에 대한 갈구가 있었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그러던 중, 2000년대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백신 음모론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백신은 방부제로 ‘티메로살’이라는 수은 화합물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데요, 이게 자폐를 유발한다는 겁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한 부모의 사례를 조사하면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근거가 없는 주장입니다. 다만, 케네디 주니어는 제약 업계와 보건 당국, 주류 언론 사이에 모종의 음모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영리 단체인 ‘어린이 건강 방어(Children’s Health Defense)’를 설립해 본격적인 백신 반대(Anti-Vaccination) 활동에 나섭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케네디 주니어는 팬데믹 당시 국립 감염병 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했던 앤서니 파우치 박사, 저개발 국가에 백신 보급 운동을 벌이고 있는 빌 게이츠 등을 대놓고 비난했습니다. 이들이 코로나19 백신을 홍보하기 위해 팬데믹을 과장했다고도 주장했죠. 또, 사석에서 코로나19가 백인과 흑인을 공격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일부 유대인과 중국인은 바이러스에 강한 면역력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엇나간 이야기나, 유명인이 음모론에 빠진 경우로 보였죠. 하지만 케네디 주니어에게는 서사가 있었습니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인종 차별과 같은, 그 시대의 통념에 맞섰던 정치인이었습니다. 사회가 모순을 안고 있고, 이를 개혁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결국 이루어냈죠. 자신에게도 그러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또, 케네디 주니어는 큰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도 음모가 개입되어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음모론적 세계관 안에서 FDA(미국 식품의약청)와 제약회사가 결탁되어 있다는 상상은 꽤 그럴듯합니다.

대안적 건강

문제는 미국에서 코로나19 백신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문제가 9대 1의 논의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우리보다 훨씬 첨예한 이슈였습니다. 백신 의무화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는 음모론에 대한 신봉과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 케네디 주니어는 믿을 수 없는 기성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 세력으로 떠올랐고요. 누군가는 그의 아버지나 큰아버지의 모습을 겹쳐보기도 했겠죠.

즉, 케네디 주니어라는 인물을 거물급 정치인으로 키운 것은 팬데믹이었습니다. 연방 정부가 백신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 제약 회사가 이익을 추구한다는 주장은 백신을 의심하는 부모들이 귀를 기울일 법한 것이었지만,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되자 모두의 문제가 되었던 겁니다. 어린이 건강 방어 웹사이트 트래픽이 치솟았고, 케네디 주니어는 관련 책을 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의미한 정치 세력이 되었습니다.

다만, 그가 태어날 때부터 들고 태어난 민주당 당적과는 결이 맞지 않았죠. 백신 음모론은 민주당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의제였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트럼프 당시 대통령과 그 지지 세력이 반길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처음에는 민주당 경선에 참여했지만, 중도 하차합니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대권에 도전하게 되죠. 양당제가 공고한 미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케네디 주니어가 얻은 지지율은 꽤 유의미했습니다. 한때 15퍼센트까지 기록했으니까요.

물론, 케네디 주니어는 판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트럼프 당시 후보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대선판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습니다. 결국, 케네디 주니어는 대권을 포기하고 트럼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합니다. 트럼프 캠프가 케네디 주니어에게 보건복지부 장관 자리를 약속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꽤 믿을 만했죠. 바로 자신이 믿는 ‘건강’과 ‘정의’를 향한 의제를 내놓았거든요. 이름하여 ‘MAHA(Make America Healthy Again)’입니다.
케네디 주니어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를 정치판으로 끌어들인 인물입니다. 출처: Robert F. Kennedy Jr.
트럼프는 승리했습니다. 케네디 주니어는 논란을 뚫고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었고요. FDA 인력 감축도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MAHA는 트럼프 2기의 공식적인 보건 정책입니다. 본격적인 ‘대안적 건강’의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약 회사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네슬레와 같은 식품 회사들이 잔뜩 긴장하고 있습니다.

* 〈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②〉로 이어집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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