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②

bkjn review

판단의 근거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여야 합니다.

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②

2025년 2월 18일

* 〈미국을 다시 건강하게 ①〉에서 이어집니다.

이제 미국은 완전히 새로운 보건 의료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라는 문제적 인물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취임했고, 대표 정책 ‘MAHA(Make America Healthy Again)’가 미국 보건 행정의 새로운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식 당일 대통령 직속 ‘MAHA 위원회’ 설립 행정명령에 서명했고요. 위원회는 앞으로 100일 동안 만성질환 관련 치료 및 연구에 대한 평가를 진행합니다.

제약 회사가 타깃입니다. 케네디 장관은 우울증 치료제로 잘 알려진 ‘프로작’을 비롯해,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노보 노디스크의 ‘위고비’ 등의 비만 치료제가 과다 처방되고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의료 시스템이 기업의 배를 불리기 위한 쪽으로 짜여 있다는 겁니다. 백신에 대한 안전 평가도 강화될 수 있습니다. 청문회 과정에서 자신은 백신 반대론자, 음모론자가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누가 뭐래도 케네디는 백신 반대 운동으로 거물급 정치인이 된 사람입니다. 청문회장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답변했던 것처럼, 케네디 장관은 아무리 세련된 정치적 수사로 포장해 봤자 백신의 안전성에 관해서는 “불가지론자”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타격이 뻔히 보이는데 제약업계에서 별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우려를 표하거나 반박하지 않는 겁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의료계의 침묵

미국 의료 산업의 규모는 4조 달러에 육박합니다. 거물급 제약 회사는 물론이고, 막대한 로비 자금을 손에 쥔 이익 단체들이 존재하죠. 워싱턴의 큰 돈줄 중 하나인 ‘미국 제약협회’ 같은 곳입니다. 케네디 장관은 이들을 정면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기 혐의로 제약업계를 고소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업계는 조용합니다.

전문가 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에게 백신을 접종하면 자폐증 위험이 커진다는 케네디 장관의 주장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 소아과 학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미국 의사협회도 입장을 내지 않았죠. 백신 반대 운동의 아이콘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는 동안 이들은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전국 간호사 연합 등의 의료 노조와 비영리 의료기관 몇 정도입니다. 가톨릭 의료 기관인 ‘프로비던스 헬스’의 에릭 웩슬러 CEO는 백신 접종률이 떨어지면 환자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응급실에 부담을 주는 ‘국가 안보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모두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 몸을 사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죠. 먼저 입을 열어 눈에 띄는 타깃이 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의료 산업은 의료보험 재정을 쥐고 있는 행정부와 손발을 맞춰야 하니까요. 보건 분야 수장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의료 정책과 건강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케네디 장관은 일종의 ‘인플루언서’입니다. 잡음을 만들수록 인플루언서는 더 주목받기 마련이죠. 이들은 MAHA 운동이 더 주목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MAHA 운동이 지금 당장 노리는 곳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식품업계입니다.

나쁜 음식의 고리

제약 산업과 의료계의 문제는 명확합니다. 음모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죠. 선택하면 됩니다. 케네디 장관이 주장하는 기업과 보건 당국의 유착 문제는 조사와 수사로 밝히면 되는 문제고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식품업계의 경우엔 이게 애매합니다.

지난 대선 기간 막바지, 케네디 장관은 TV 토론보다 영향력 있다는 조 로건의 팟캐스트에 출연했습니다. 트럼프 2기가 시작되면 보건복지부, 질병통제예방센터, FDA(식품의약처), 국립보건원(NIH) 등을 ‘통제’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언급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농무부’입니다.

MAHA 운동은 살충제 집약적 농업과 종자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이 소비하는 음식 사슬에 문제가 있는데, 그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살충제가 나쁜 것은 다 아는 사실이죠. 농약 범벅인 토마토를 먹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요. 종자유의 경우에는 고개를 갸웃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우리가 식용유로 흔히 쓰는 옥수수유, 콩기름, 카놀라유, 포도씨유 등이 전부 포함되니까요. 그런데 건강한 먹거리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요즘 유튜브나 틱톡, 인스타그램 등에 종자유가 암을 유발한다는 콘텐츠가 넘쳐나거든요.
인류는 언제나 더 안전하고 몸에 좋은 먹거리를 찾았습니다. 출처: 닥터딩요
이걸 정말 금지한다면 농부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옥수수유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게 되면, 당장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을 갈아엎어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살충제 없이 농사를 지으려면 엄청난 투자와 생산량 감소를 동시에 감당해야 할 테고요. 그런데 이건 백신 반대와는 결이 다릅니다. 약간 애매한 구석은 있지만, 건강한 먹거리를 원하는 보편적인 욕구와 맞아떨어집니다. 100퍼센트 음모론의 영역이라고 할 수도 없고요.

음식이 아닌 음식

일부 전문가 집단에서는 케네디 장관을 환영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됩니다. 주로 초가공식품(ultra-processed food, UPF)의 위험성을 경고해 온 학자들과 관련 단체들입니다.
 
“(화학적) 식품 첨가물을 면밀히 조사하겠습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인준된 후 케네디 장관이 내놓은 발언입니다. MAHA는 ‘만성 질환 전염병’ 퇴치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환경 오염을 줄이고 식품 첨가물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리고 식품 첨가물은 초가공식품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공식품을 먹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한 세상입니다. 몸에는 썩 좋지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초가공식품에 대한 경고와 관심이 매우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비교적 최근 정립되었습니다. 2010년, 브라질 과학자인 카를로스 몬테이루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이 시작이었죠. 연구팀은 식품을 네 그룹으로 나눕니다. ‘미가공 혹은 최소가공식품’, ‘가공된 요리용 재료’, ‘가공식품’, ‘초가공식품’ 등입니다.

예를 들어, ‘햇반’은 가공식품입니다. 공장에서 만들어졌지만, 누구나 햇반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그런데 초가공식품은 겉모습으로 재료나 맛을 가늠하기 힘듭니다. 그야말로 ‘초가공’ 했기 때문입니다. 기름은 정제하거나 수소화하고, 단백질은 가수분해하며 전분은 변성시킵니다. 조미료로는 설탕이나 소금처럼 자연에서 얻은 것 외에도 실험실에서 창조된 화학 첨가물이 사용됩니다. 발음하기도 낯선 이름의 첨가물입니다. 아이스크림, 소시지 등은 물론 프링글스 류의 스낵까지 우리 주변 먹을거리는 높은 확률로 초가공식품입니다. 포장지 뒷면에 우리에게 익숙치 않은 성분이 많이 나열되어 있으면 초가공식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원재료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말리고 갈아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공정은 저렴하게 만들어 많이 팔기 위한 것입니다. 사업의 기본이죠. 그런데 이게 ‘식품‘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렴하게 만들기 위해 단위 부피당 칼로리가 높아집니다. 많이 팔기 위해 우리의 혀와 뇌를 속입니다. 그 결과 이상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그 누구도 앉은 자리에서 물 2리터를 다 마시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콜라 한 통을 앉은 자리에서 다 마시는 사람들은 많죠. 아이스크림 한 통의 열량은 대략 1000Kcal 정도입니다. 자제력을 잃어버린다면 한 번에 다 먹을 수 있죠. 그런데 밥 세 공기를 앉은자리에서 다 먹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비슷한 칼로리인데 말이죠.

뇌가 중독되는 과정

이뿐만이 아닙니다. 의사이자 의학 전문 방송인인 크리스 반 툴레겐 박사는 스스로 초가공식품 위주의 식단을 섭취하면 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실험했습니다. 뇌스캔 결과, 식욕과 관련된 호르몬을 조절하는 영역과 욕망-보상 영역 사이의 연결이 늘어났습니다. ‘식품 중독’을 유발한다는 겁니다. 화학 성분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미 말리고 갈고 분해한 음식이니 흡수가 빨라 쾌락을 더 빠르고 강하게 느끼는 효과가 있습니다. 통제력을 잃고 필요 이상으로 먹게 됩니다. 의존하게 되기도 하고요.

한때는 지방이, 다음은 설탕이 비만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요즘엔 초가공식품이 지목됩니다. 따라서 이를 정조준하는 케네디 장관의 정책은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거대 기업과 정부의 횡포로부터 공공의 건강을 지키고자 하는 투사로 비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실제로 정부 규제에도 구멍이 있습니다. 식품 첨가물을 관리하는 부처는 FDA입니다. 제약업계에서는 FDA의 허가를 받는 일이 아주 중요합니다. 허가 없이는 의약품을 제조, 판매할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식품업계는 조금 다릅니다. 식품 첨가물 중 많은 수가 ‘GRAS(Generally Recognized As Safe)’라는 항목으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 소금이나 식초 같은 일반적인 성분을 규제 바깥에 두기 위해서 생긴 항목이지만 식품 공항이 발달하면서 수많은 성분이 별다른 검증 없이 GRAS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멍이 초가공식품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데에 기여했죠.

영웅의 정치는 위험하다

이번 기회에 식품 산업의 패러다임을 뒤집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입니다. 초가공식품은 강력한 마케팅과 저렴한 가격으로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에서 더 큰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시간과 돈이 부족할수록 초가공식품은 벗어날 수 없는 선택이 되지요. 케네디 장관의 정책이 이 불공평의 고리를 정말 끊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MAHA는 더욱 위험합니다. 이렇게 신뢰할 만하거나 약간 진보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보건의료 정책에 극단적이거나 음모론적인 정책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약과 독이 함께 섞여 있으니 약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결국 독은 독이지요. 예를 들면 생우유를 확대, 권장하자는 정책을 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저온 또는 고온 살균된 우유를 마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유를 마음 놓고 마실 수 있죠. 그런데 케네디 장관은 살균하지 않은 생우유가 염증을 없애고 면역력을 높인다고 주장합니다.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대체 의학입니다. 대다수의 전문가는 생우유가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이런 주장이 좀 더 극단적으로 발전하면 백신 반대 운동이 됩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훌륭한 사람의 주장은, 우리 편의 목표와 과정은 늘 정의롭다는 착각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더욱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구의 정책이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정책을 수립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건강에 관한 정책이라면 데이터와 과학에 근거해야겠죠.

단, 과학에 언제나 단 하나의 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늘 새로운 연구와 이론이 쏟아지고 어제의 결론이 오늘 뒤집히니까요. 그래서 ‘다양한 과학’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통념과는 다른 진짜 과학이 있다는 맥락의 용어입니다. ‘대안적 진실’의 변종입니다. 음모론의 시작이고요.

그래서 판단의 근거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여야 합니다. 백악관은 수천 명 규모의 보건복지부 인력 감축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FDA에서는 이미 정리가 시작되었고요.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반론을 제기할 행정부 내부의 목소리가 잘려 나가고 있는 겁니다. 영웅 서사를 쓰고자 하는 케네디 장관을 거스르기는 앞으로 더욱 힘들어질 겁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진짜 부패와 결탁, 정의롭지 못한 자본의 논리가 도려내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다른 무언가도 함께 도려져 나갈지 모르겠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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