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들어야 존중받는 사람들
2014년, 글로벌 패션 브랜드 H&M이
입길에 올랐습니다. 새로 내놓은 점프슈트 제품 때문이었는데요, 디자인이 문제였습니다. 전장에 나선 쿠르드족 여성들의 전투복을 흉내 냈다는 비난이 빗발친 겁니다.
당시 IS에 대항하던 시리아 지역의 쿠르드 인민수비대(YPG)는 병력도 모자라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했습니다. 쿠르드족 여성들이 전장에 뛰어들게 된 이유입니다. 시리아 쿠르드족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낮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실력과 계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죠. 가정 내에서 억압받던 여성이 전장에서는 남성을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IS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순교’하더라도 여성의 총에 맞으면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언론에는 이색적인 풍경이었습니다. IS에 대항하는 젊은 여성은 ‘
그림’이 되는 기삿거리였지요. 실상은 잔인했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총을 들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가 궁지에 몰리면 자결하기도 했습니다. 중년 여성들의 손에는 수류탄이 쥐어졌습니다. 이들 중에는 IS를 향해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누군가에겐 일상도 비극입니다. 이들은 총을 들어야 존중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명은 쿠르드족 여성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쿠르드족이라는 민족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이후, 쿠르드족은 누군가의 용병이 되어야만 역사 속에서 주어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곧 사라지기를 반복했죠.
국가가 되지 못한 민족
쿠르드족은 3000만~3800만 규모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의 70퍼센트 수준입니다. 이렇게 인구수가 많은데도 국가를 세우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지구의 미아’, ‘중동의 집시’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었습니다. 성경에도 등장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고,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들도 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오일 머니 때문에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죠. 전쟁 당시 쿠르드족은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웁니다. 전쟁이 끝나면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국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말입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지역에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국경선을 그었고, 설상가상으로 쿠르드족이 몰려 살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모술과 키르쿠크에서 석유가 솟아나면서 셈법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결국 쿠르드족은 버림받고 중동 국가들의 국경선 위에 남겨집니다.
어떤 민족이든, 어떤 국가든 역사 속에서 희생자이기도 하며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쿠르드족도 마찬가지이고요. 다만, 쿠르드족은 국가를 세우겠다는, 분리 독립을 하겠다는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늘 누군가의 용병이 되었다가 배신당하는 역사를 반복해서 써 왔습니다. 20세기에는 튀르키예를 대신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참여했고, 21세기에는 미국을 대신해 IS(이슬람 국가) 세력, 시리아 정부군과 맞섰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죠.
난민을 택하는 삶
쿠르드족 전체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3000만이 넘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의 납작한 이야기로 치환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쿠르드족 중 누군가는 정착하여 터키인의 정체성, 이라크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합니다. 성공한 삶을 사는 일도 있겠죠. 하지만 쿠르드족이라는 이름으로 살기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쿠르드족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열망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도 있고요.
튀르키예 인구의 15~20퍼센트가 쿠르드족입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독립을 요구해 왔죠. 요구는 싸움이 되고 폭력이 되었습니다. 쿠르드 노동자당(PKK)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세력화하고, 1984년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 투쟁에도 나섰습니다. 2013년, 튀르키예 정부와 잠시 평화 협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죠.
만약 쿠르드족이 분리 독립에 성공한다면 튀르키예의 패권은 상당히 약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민족 말살 정책’을 폅니다. 쿠르드족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쿠르드식 이름도 금지합니다. 네,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튀르키예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떠났습니다. 목적지 중에는 일본도 있었죠. 일본과 튀르키예 사이에 무비자 협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터키 국적으로 일본 땅을 밟은 후 난민 신청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아 임시로나마 일본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렸습니다. 도쿄와 가까워 일거리를 찾기 쉽고, 이란계 쿠르드인이 이미 정착해 있던 사이타마의
와라비시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난민에게 열려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처럼 ‘단일 민족’ 신화가 공고한 곳이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열려있지 않죠. 1990년대부터 일본으로 망명해 온 튀르키예의 쿠르드족 난민은 2000명이 넘는 규모의 커뮤니티를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일본 정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