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라비의 쿠르드인

bkjn review

일본은 ‘가이진’과 이웃이 될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혐오가 자라나기 딱 좋은 환경입니다.

와라비의 쿠르드인

2025년 2월 19일

일본의 사이타마현은 우리로 치면 경기도쯤 됩니다. 도쿄와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죠. 베드타운도 있고, 상업 지구도 발달해 있습니다. 그 중 와라비시(市)는 베드타운에 속합니다. 평범하고 조용한, 전형적인 일본의 주택가로 채워져 있죠. 그런데 이곳이 최근 몇 년간 점점 시끄러워지고 있습니다. 시위 때문입니다. 쿠르드족 난민을 향한 혐오를 외치는 시위입니다.

쿠르드족은 주로 튀르키예,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리적으로 멀고 먼 일본까지 와 난민 신청을 하고 있고요.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상태지만, 도쿄 인근에 위치한 와라비시를 비롯해 곳곳에 공동체를 형성해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철거 현장 등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갑니다. 인구 감소로 일손이 부족한 일본 사회에서 일정 역할을 찾아가고 있죠. 하지만 한쪽에서는 그들을 향한 혐오가 자라났고, 결국 커다란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일이지만, 어딘지 남 일 같지 않아 보입니다.
2014년,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H&M의 광고 이미지가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출처: X.com
총을 들어야 존중받는 사람들

2014년, 글로벌 패션 브랜드 H&M이 입길에 올랐습니다. 새로 내놓은 점프슈트 제품 때문이었는데요, 디자인이 문제였습니다. 전장에 나선 쿠르드족 여성들의 전투복을 흉내 냈다는 비난이 빗발친 겁니다.

당시 IS에 대항하던 시리아 지역의 쿠르드 인민수비대(YPG)는 병력도 모자라고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했습니다. 쿠르드족 여성들이 전장에 뛰어들게 된 이유입니다. 시리아 쿠르드족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낮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실력과 계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죠. 가정 내에서 억압받던 여성이 전장에서는 남성을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IS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순교’하더라도 여성의 총에 맞으면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언론에는 이색적인 풍경이었습니다. IS에 대항하는 젊은 여성은 ‘그림’이 되는 기삿거리였지요. 실상은 잔인했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총을 들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다가 궁지에 몰리면 자결하기도 했습니다. 중년 여성들의 손에는 수류탄이 쥐어졌습니다. 이들 중에는 IS를 향해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누군가에겐 일상도 비극입니다. 이들은 총을 들어야 존중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운명은 쿠르드족 여성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쿠르드족이라는 민족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이후, 쿠르드족은 누군가의 용병이 되어야만 역사 속에서 주어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곧 사라지기를 반복했죠.

국가가 되지 못한 민족

쿠르드족은 3000만~3800만 규모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의 70퍼센트 수준입니다. 이렇게 인구수가 많은데도 국가를 세우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지구의 미아’, ‘중동의 집시’라는 별명은 그래서 붙었습니다. 성경에도 등장할 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고,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들도 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오일 머니 때문에 그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죠. 전쟁 당시 쿠르드족은 영국을 도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공을 세웁니다. 전쟁이 끝나면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국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말입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지역에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국경선을 그었고, 설상가상으로 쿠르드족이 몰려 살던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모술과 키르쿠크에서 석유가 솟아나면서 셈법이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결국 쿠르드족은 버림받고 중동 국가들의 국경선 위에 남겨집니다.

어떤 민족이든, 어떤 국가든 역사 속에서 희생자이기도 하며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쿠르드족도 마찬가지이고요. 다만, 쿠르드족은 국가를 세우겠다는, 분리 독립을 하겠다는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늘 누군가의 용병이 되었다가 배신당하는 역사를 반복해서 써 왔습니다. 20세기에는 튀르키예를 대신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참여했고, 21세기에는 미국을 대신해 IS(이슬람 국가) 세력, 시리아 정부군과 맞섰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죠.

난민을 택하는 삶

쿠르드족 전체를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3000만이 넘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의 납작한 이야기로 치환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쿠르드족 중 누군가는 정착하여 터키인의 정체성, 이라크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합니다. 성공한 삶을 사는 일도 있겠죠. 하지만 쿠르드족이라는 이름으로 살기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쿠르드족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열망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도 있고요.

튀르키예 인구의 15~20퍼센트가 쿠르드족입니다. 이들 중 많은 수는 독립을 요구해 왔죠. 요구는 싸움이 되고 폭력이 되었습니다. 쿠르드 노동자당(PKK)이라는 이름으로 정치세력화하고, 1984년부터 분리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 투쟁에도 나섰습니다. 2013년, 튀르키예 정부와 잠시 평화 협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죠.

만약 쿠르드족이 분리 독립에 성공한다면 튀르키예의 패권은 상당히 약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종의 ‘민족 말살 정책’을 폅니다. 쿠르드족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게 하고, 쿠르드식 이름도 금지합니다. 네,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튀르키예의 탄압을 견디지 못한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떠났습니다. 목적지 중에는 일본도 있었죠. 일본과 튀르키예 사이에 무비자 협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터키 국적으로 일본 땅을 밟은 후 난민 신청을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아 임시로나마 일본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꾸렸습니다. 도쿄와 가까워 일거리를 찾기 쉽고, 이란계 쿠르드인이 이미 정착해 있던 사이타마의 와라비시로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난민에게 열려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처럼 ‘단일 민족’ 신화가 공고한 곳이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열려있지 않죠. 1990년대부터 일본으로 망명해 온 튀르키예의 쿠르드족 난민은 2000명이 넘는 규모의 커뮤니티를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일본 정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뮤직비디오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출처: 유튜브
콜롬버스

최근 일본의 인기 록 밴드 Mrs. Green Apple이 신곡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가 황급히 삭제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음악이 아니라 뮤직비디오의 내용이 문제였는데요, 콜럼버스와 동료로 분장한 밴드 멤버가 유인원 무리를 만나게 되고, 그 유인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모험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졌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분명한 것은, 일본도 한국만큼이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무엇이 인종차별이며 혐오인지 논의하고 정립할 기회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일본에서 외국인을 부르는 표현 중에 ‘가이진(外人)’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외부의 사람. 나(私)의 범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품고 있죠.

지역 공동체의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쿠르드인은 종종 ‘가이진’이 되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공사 현장에서 철거를 마친 이후에는 트럭에 현장 쓰레기를 규정보다 많이 실어 날랐죠. 더럽고 위험한 이웃이었습니다.

범죄도 발생했습니다. 터키에서 온 사람들과 패싸움도 났고, 쿠르드족 커뮤니티 안에서도 싸움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한 쿠르드족 남성이 일본인 청소년을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공분이 커졌습니다. 

아직 법정에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이 범행이 사실이라면 용의자는 범죄자입니다.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겠지요. 하지만 한 범죄자가 쿠르드족 출신이라고 쿠르드족 전체를 비난하는 일은 논리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비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열기에 휩싸입니다. 혐오라는 감정이 이를 부추기지요.

우리도 그들이다

지금 일본의 쿠르드족 혐오 시위가 낯설지 않은 까닭은 한 때 재일 한국인도 혐오 시위의 타깃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지만, 혐오의 주요 타깃은 한국인에서 중국인으로, 그리고 이번에는 쿠르드족으로 옮겨갔습니다.

특히 2024년 6월 발효된 개정 이민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난민 신청자 중 많은 수가 쿠르드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의 화살이 방향이 본격적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한때 ‘Native Lives Matter’라는 소셜 미디어 게시물이 돌았을 정도입니다.

혐오 시위를 주도하는 사람도 있고, 그 분위기에 휩쓸려 참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민 중에는 조용히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쿠르드족 난민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본인의 생각과 행동도 제각각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일본은 ‘가이진’과 이웃이 될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제와는 다른 이웃을 맞기 위한 사회적인 의식 제고나 합의 과정이 없었습니다. 혐오가 자라나기 딱 좋은 환경입니다.

지금 일본의 모습은 몇 년 전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쿠르드족의 자리에는 한 때 재일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편협함을 탓하기보다는 우리에게도 닥친 숙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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