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사’로 흔히 불리는 결혼정보회사. 우리 사회가 일종의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음을, 한 사람이 결혼 시장에서는 상품으로서 가격이 매겨질 수 있음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자본주의와 결혼 제도가 만나 발생한 사업 형태라고 할 수 있겠죠. 데이트 앱이 사용자의 외모나 취향을 기준으로 매칭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결정사는 여기에 직업과 자산 규모 등을 더합니다.
최근에 등장한 ‘원결회’라는 이름의 모임은 결정사의 좀 다른 형태입니다. ‘반포 원베일리 결혼정보회’의 준말인데,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래미안 원베일리’ 아파트 단지 내에 결성된 모임입니다. 원베일리 아파트 입주민과 서초, 강남, 반포 지역 주민만 가입할 수 있습니다. 2024년 4월에 만들어졌는데, 벌써 두 쌍의 커플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원베일리는 ‘국민평수’에 해당하는 80㎡ 평형의 매물 가격이 40억 원 전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손에 꼽히는 고가 아파트 단지라는 얘깁니다. ‘그들만의 리그’에는 곱지 않은 시선이 따라붙기 마련이죠. 주거에 따라 계급을 가르는 문화를 상징하거나, 부추긴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하지만 연애와 결혼의 역사를 따져 보면, 원결회는 지극히 합리적인 모임입니다.
결혼정보회사
우리는 ‘데이트’라는 문화가 인류의 탄생부터 당연히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데이트에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죠. 개인적인 여가 시간, 그리고 집 밖에서 두 남녀가 만날 자유 말입니다. 미국에서 두 전제가 모두 성립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무렵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구애, 요즘 말로 ‘플러팅’은 있었죠. 사교 댄스파티 등에서 상대를 골라 점찍은 뒤, 남성이 여성의 집에 방문해 부모님 앞에서 만남을 갖는 식이었습니다. 소설 《작은 아씨들》에 묘사된 내용이 참고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회가 변화했습니다. 연애의 방식도 달라졌죠. 하버드대학교의 모이라 와이글 비교문학과 교수는 저서 《
사랑은 노동》에서 산업 혁명과 함께 발생한 이농 현상을 변화의 원인으로 꼽습니다. 1880년대부터 농촌에서 도시로 일하러 온 여성들이 가정과 마을의 울타리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이들이 살던 집은 하숙이나 공동 주택의 형태였습니다. 때문에 집 바깥에서 여성과 남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이트 문화가 발생했다는 것이죠.
공간의 힘이란 참 무섭습니다. 만남의 장소가 개인의 영역이 아닌 공공의 영역으로 변화하면서 결혼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으니까요. 가문의 일이 아니라 개인의 일이 된 겁니다. 여기에 산업화로 인한 ‘임금 노동’이 보편화하면서 개인이 가문을 벗어나 재산을 축적할 수 있게 되고,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한몫했겠지요. 와이글 교수는 데이트 문화의 형성을 계기로 결혼 시장의 상품이 가문에서 개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사랑과 결혼 사이
물론, 20세기가 되기 이전부터 사랑은 결혼의 전제였습니다. 적어도 유럽 사회에서는 그런 믿음이나 환상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역사가 오래된 것은 아닙니다. 낭만적 사랑과 그 결실로서의 결혼은 17세기 이후에서나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개념으로 부상했으니까요. 인간, 즉 ‘개인’의 존재에 주목하는 르네상스의 영향입니다.
그 이전에는 결혼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너무 냉정한 시선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결혼은 아주 실용적인 목적으로 개발된 사회적 규약입니다. 먼 옛날, 인간이 수렵과 채집 생활을 멈추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는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갖게 됩니다. 바로 ‘잉여 생산물’입니다. 요즘 말로 번역하면 ‘자산’에 가깝겠죠. 주로 무력을 가진 남성이 소유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을 ‘나’의 유전적 후계자에게 상속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 제도와 가부장적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입니다. 즉, 결혼이란 경제적 동기에 따른 경제적 계약이었죠.
사랑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일인데 당연하지요. 다만, 사랑보다 우선시되는 가치가 많았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요. 어딘가에서는 사람보다 신이 중요했고, 또 어딘가에서는 유교적 규율이 개인의 의지보다 중요했습니다. 무엇보다, 먹고사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과정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노동력 확보에 가까웠고요.
결혼이라는 위험
시대에 따라 결혼과 사랑 간의 관계도, 결혼이 개인에게 갖는 의미도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결혼은 1990년대와, 1970년대와 다른 무언가일 겁니다.
지금 청년들이 사회적으로 결혼과 출산의 압력을 받으면서도 결혼하지 않는 까닭을 살펴보면 거울처럼 결혼이라는 제도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겠지요. 《시사IN》의 2023년 설문 조사
결과입니다. 스스로를 상위층이라고 인식하는 비혼 응답자의 경우 70퍼센트 넘게 결혼 의사가 있다고 답했습니다. 반면, 스스로를 중하위층이나 최하위층으로 여길 경우 결혼 의사가 있는 비율이 50퍼센트가량이었고요. 왜 그런지는 다른 문항에 대한 답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결혼 의향이 없는 비혼 응답자는 결혼 의사가 있는 응답자에 비해 결혼에 따른 불안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간이나 돈에 있어 자유도가 떨어질까, 경력에 악영향을 미칠까 불안하다는 겁니다. 즉, 누군가에게 결혼은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내하고 감수하며 고생하면 아주 높은 확률로 오늘보다 더 잘사는 내일이 오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오히려 추락하지 않기 위해 외줄 타기를 해야 합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대기업 관리직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 그 자녀 중 누군가는 취업 시장에서 밀려나고 부모 세대와 함께 누렸던 계급에서 한 단계, 두 단계 추락합니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은 호사스럽습니다. 우리는 각 계급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소비하고 있으니까요. 〈좋좋소〉나 〈05학번 이즈 히어〉, 〈휴먼다큐 자식이 좋다〉 등은 수면 위로 드러난 아주 일부일 뿐입니다. 내 친구의 씀씀이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생중계된 지 15년째이니 말입니다. 잠깐 발을 잘못 디디면 그 실패의 대가가 어떤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든 그 아래로 추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