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8일, 세기의 정상 회담이 있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모욕과 면박을 당한 겁니다.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중계되었습니다. 공격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J. D. 밴스 부통령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군복 차림으로 백악관을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당신 양복 있느냐”라며 조롱 섞인 질문을 던지고 훈계를 늘어놓은 기자도 있었죠.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예의’를 운운한 이 기자는 〈리얼아메리카보이스〉라는 극우 성향 채널 소속의 브라이언 글렌입니다. 평범한 기자는 아닙니다. 이른바 ‘
셀럽’이죠. MAGA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방송 경력은 짧지 않지만, 비교적 최근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2015년 설립된 〈RSBN(Right Side Broadcasting Network)〉을 통해서였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회, MAGA 시위 현장 등을 유튜브와 럼블 채널에서 생중계하며 180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채널입니다.
글렌의 현 직장, 〈리얼아메리카보이스〉도 비슷한 스트리밍 채널을 기반으로 합니다. 코로나19에 관한 가짜 뉴스, 대통령 선거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음모론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세를 키웠습니다. 백악관은 〈리얼아메리카보이스〉에 문을 열었고, 글렌을 정상 회담 풀기자단에 포함했습니다. 헤프닝이 아닙니다. 저널리즘과 수용자의 관계 설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가능한 파격입니다.
트럼프의 새로운 미디어 정책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팟캐스트 진행자,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 등의 뉴미디어에도 백악관 브리핑룸을 개방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파격이었죠. 정치적 편향의 문제를 모두 예상했지만, 새로운 매체에까지 취재의 기회를 열어둔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으로 내놓은 정책은 논란이었습니다. ‘공동취재단(풀기자단)’을 백악관이 직접 선정하겠다는 방침이었죠. 풀기자단은 백악관의 주요 행사에 대통령과 동행하며 취재하게 됩니다. 언론사 전체가 대통령을 따라다닐 수는 없습니다. 장소의 제약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율적으로 각각의 이벤트마다 풀기자단을 선정하고, 취재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언론사들이 아닌, 백악관이 주요 행사를 취재할 기자와 매체를 정하겠다는 선언이 나온 겁니다.
언론사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백악관이 입맛에 맞는 매체만 골라서 풀기자단을 구성하면,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논조의 매체는 자연스럽게 취재 경쟁력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큰 그림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중요한 행사 현장에 ‘내 편’을 세워 두면 그 자리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죠. 내 편이 발언권을 갖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 풀기자단으로 백악관이 선정한 방송 매체는 CNN과 〈리얼아메리카보이스〉였습니다. 아무도 그 자리에 CNN이 있었다는 것은 신경 쓰지 않죠. 그러나 글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에 남았습니다. 팬들은 열광하고 트럼프는 결국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릎을 꿇렸습니다.
능력, 선의, 무결성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이라면, 백악관도 이렇게 나올 수는 없었겠지요. 잘했다는 옹호의 목소리도 크기 때문에 가능한 행보입니다. 실제로 〈폭스뉴스〉의 재키 하인리히 기자가 X를 통해 “이번 조치는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백악관에 권력을 주는 것”이라
설명해 봤지만, 다수의 댓글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기자단이 특권을 잃었을 뿐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