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불신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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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는 신뢰를 잃고 새롭게 등장한 뉴스 크리에이터는 신뢰를 얻었습니다.

언론 불신의 이유

2025년 3월 6일

지난 2월 28일, 세기의 정상 회담이 있었습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모욕과 면박을 당한 겁니다.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중계되었습니다. 공격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J. D. 밴스 부통령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군복 차림으로 백악관을 방문한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당신 양복 있느냐”라며 조롱 섞인 질문을 던지고 훈계를 늘어놓은 기자도 있었죠.

한 나라의 대통령에게 ‘예의’를 운운한 이 기자는 〈리얼아메리카보이스〉라는 극우 성향 채널 소속의 브라이언 글렌입니다. 평범한 기자는 아닙니다. 이른바 ‘셀럽’이죠. MAGA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방송 경력은 짧지 않지만, 비교적 최근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2015년 설립된 〈RSBN(Right Side Broadcasting Network)〉을 통해서였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집회, MAGA 시위 현장 등을 유튜브와 럼블 채널에서 생중계하며 180만 명의 구독자를 확보한 채널입니다.

글렌의 현 직장, 〈리얼아메리카보이스〉도 비슷한 스트리밍 채널을 기반으로 합니다. 코로나19에 관한 가짜 뉴스, 대통령 선거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음모론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세를 키웠습니다. 백악관은 〈리얼아메리카보이스〉에 문을 열었고, 글렌을 정상 회담 풀기자단에 포함했습니다. 헤프닝이 아닙니다. 저널리즘과 수용자의 관계 설정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가능한 파격입니다.

트럼프의 새로운 미디어 정책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팟캐스트 진행자,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 등의 뉴미디어에도 백악관 브리핑룸을 개방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여기까지는 파격이었죠. 정치적 편향의 문제를 모두 예상했지만, 새로운 매체에까지 취재의 기회를 열어둔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으로 내놓은 정책은 논란이었습니다. ‘공동취재단(풀기자단)’을 백악관이 직접 선정하겠다는 방침이었죠. 풀기자단은 백악관의 주요 행사에 대통령과 동행하며 취재하게 됩니다. 언론사 전체가 대통령을 따라다닐 수는 없습니다. 장소의 제약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율적으로 각각의 이벤트마다 풀기자단을 선정하고, 취재 내용을 공유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언론사들이 아닌, 백악관이 주요 행사를 취재할 기자와 매체를 정하겠다는 선언이 나온 겁니다.

언론사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백악관이 입맛에 맞는 매체만 골라서 풀기자단을 구성하면,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논조의 매체는 자연스럽게 취재 경쟁력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큰 그림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중요한 행사 현장에 ‘내 편’을 세워 두면 그 자리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죠. 내 편이 발언권을 갖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 풀기자단으로 백악관이 선정한 방송 매체는 CNN과 〈리얼아메리카보이스〉였습니다. 아무도 그 자리에 CNN이 있었다는 것은 신경 쓰지 않죠. 그러나 글렌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에 남았습니다. 팬들은 열광하고 트럼프는 결국 젤렌스키 대통령의 무릎을 꿇렸습니다.

능력, 선의, 무결성

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이라면, 백악관도 이렇게 나올 수는 없었겠지요. 잘했다는 옹호의 목소리도 크기 때문에 가능한 행보입니다. 실제로 〈폭스뉴스〉의 재키 하인리히 기자가 X를 통해 “이번 조치는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백악관에 권력을 주는 것”이라 설명해 봤지만, 다수의 댓글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기자단이 특권을 잃었을 뿐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매체의 크리에이터들은 전통적인 방송의 형식을 차용해도 전달하는 방식과 내용이 다릅니다. 사실과 의견이 혼재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개인의 캐릭터가 도드라집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평론가들의 방담과 비슷합니다. 출처: Real America's Voice
즉, 미국의 누군가에게 CNN은 가짜 뉴스를 전하는 ‘믿을 수 없는 매체’이며 기성 권력입니다. 브라이언 글렌이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인이고요. 이번 정상회담에서 글렌이 던진 질문은 지금까지 기존 언론사들이 회피해 왔던, 그러나 던져야 했던 질문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언론사는 신뢰를 잃고 새롭게 등장한 뉴스 크리에이터는 신뢰를 얻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탐사 보도 전문 기자인 줄리아 앵윈이 최근 미국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쇼렌스타인 센터를 통해 게재한 논문을 살펴보죠. 앵윈은 문헌 연구를 통해 언론에 대한 신뢰는 ‘능력, 선의, 무결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형성된다고 제시합니다.

전통적인 언론사는 취재원을 찾아내고 정보를 검증하며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기사체 글쓰기 능력을 내재화하고 있습니다. 엄격한 기준에 따라 기자를 선발해 훈련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뉴스 수용자에게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언론사도 의도적으로 숨깁니다. 반면 크리에이터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경력, 학력 등을 총동원해 전문성을 끊임없이 언급합니다. 수용자가 이들의 능력을 믿을 수 있도록 근거를 제공하는 겁니다.

전통적인 언론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전한다는 사명을 내세웁니다. 이것이 실현되든 그렇지 않든 말이죠. 그러나 많은 수용자가 이를 의심합니다. 소유주를 위해, 광고주를 위해, 매체가 지지하는 정치 세력을 위해 보도가 왜곡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겁니다. 반면, 크리에이터는 수용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진심’을 증명할 기회를 가집니다. ‘댓글 창에 의견 남겨 주시면’ 원하는 콘텐츠를 선보이는 문화 등이 대표적이죠. 그들이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그들의 ‘선의’를 의심할 이유는 없습니다.

때로 사람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기자도 마찬가지고요.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오보를 내거나 부적절한 편견이 들어간 기사를 작성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론사는 이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데에 비교적 경직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말하지 않으면 독자들의 기억에서 쉬이 잊힐 가능성이 높은 데다 업계 관행으로 동종 업계의 실수를 적나라하게 보도하지 않는 문화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크리에이터는 대놓고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거나 ‘잘 모르지만’이라며 책임을 유연하게 피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수하더라도 수용자에게서 지적을 받으면 그에 바로 반응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죠. 설명을 내놓기도 하고 논쟁을 벌이는가 하면, 인정과 사과로 답하기도 합니다.

믿을만한 사람

결국, 트럼프가 불러들인 ‘새로운 매체’들은 기존의 공고한 언론 권력을 뒤흔들 ‘메기’가 아닙니다. 조직 논리와 경로 의존성으로 허약해진 언론사를 포식해 나갈 외래종 ‘바스’에 가깝습니다. 같은 뉴미디어라도 〈악시오스〉나 〈폴리티코〉는 언론사의 이름값을 쌓아나가는 매체죠. 조직이 크고 기자는 작거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얼아메리카보이스〉같은 채널은 크리에이터 개인의 명성이 강조되는, 전형적인 ‘유튜브 매체’입니다. 매체보다 크리에이터의 명성이 더 큽니다.

아는 사람이 전하는 소문보다는 큰 언론사가 전하는 뉴스가 믿음직한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이 여러 개인 ‘대안적 진실’의 시대에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믿을 수 있는 뉴스 매체가 됩니다. 크리에이터가 수용자와 어떻게 관계를 쌓아나가느냐에 따라 매체력이 결정되는 겁니다.

언론의 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보도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받아쓰기 기사, 따옴표 저널리즘 등을 넘어서야 한다고요. 하지만, 지금 당장의 문제는 신뢰 회복입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 사이에서 답을 찾지 못한 독자들이 유튜브 채널에 뉴스를 의존하게 되는 현상의 실체입니다. 언론사에 당장 필요한 것은 AI가 뉴스를 읽어주는 신기한 기능이 아니라, 자신들의 보도가 왜 믿을만하며 가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작업일 겁니다. 물론, 개인 대 개인이라는 동등한 높이에서 말이죠.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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