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편이 바뀌면

bkjn review

미국과 러시아가 밀착하고 있습니다. 80년간 이어져 온 세계 질서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편이 바뀌면

2025년 3월 13일

지난달 28일 트럼프는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 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당신은 카드가 없다”는 말을 여섯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동석했던 부통령 밴스는 젤렌스키에게 “무례하다”며 면박을 줬습니다. 예정된 공동 회견이 취소되면서 젤렌스키는 쫓겨나듯 백악관을 떠났습니다.

세계 각국 언론은 파국으로 끝난 정상 회담을 보도하면서 주로 우크라이나 홀대를 지적했습니다. 두 정상의 공개 설전이 워낙 파격적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우크라이나 홀대는 달리 말하면 러시아 우대입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회담 자리에서 우방국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를 두둔하는 발언을 했죠.

여기서 우리는 지난 80년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미국이 편을 바꾸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트럼프의 미국은 러시아와 밀착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두 나라는 냉전을 벌이며 한 번도 가까웠던 적이 없습니다. 미국은 지금 최대 위협인 중국과는 가까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 때 키신저 국무장관은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중국을 포용하는 전략을 썼죠. 지금 미국은 역(逆)키신저 전략에 나서고 있습니다.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러시아를 포용하는 전략입니다.

트럼프의 러시아 피벗(pivot)은 미국이 80년간 구축한 세계 질서의 두 축을 위협합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핵확산금지조약(NPT)입니다. 냉전 초기에 동유럽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공산화되자, 1949년 미국과 영국 등 서방 국가는 공산권에 맞서는 집단 방위 체제를 만듭니다. 나토입니다. 미국은 유럽의 나토 회원국이 적국의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핵무기를 써서라도 방어할 것이라고 보장했죠.

나토 체제 아래에서 이론상 유럽 국가들은 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국제 사회가 어디 신뢰로만 작동하나요. 돈도 있고 기술력도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안보 보장에도 불구하고 독자 핵무장에 나섭니다. 당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드골 프랑스 대통령에게 핵 개발 중단을 요구하자, 드골이 이렇게 물었다죠. “파리를 위해 뉴욕을 희생할 수 있나?” 미국의 약속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결국 미국은 핵 도미노를 막기 위해 1968년에 또 하나의 프레임워크를 만듭니다. NPT입니다. 이 조약이 만들어지기 전에 핵실험을 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은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지만, 그 외 국가에는 핵무기 제조를 금지하는 내용입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핵보유국들은 핵무기 감축을 논의할 테니, 비보유국들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로 하면 결국 집단적 비핵 안보가 달성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국이 80년간 공들여 구축한 나토와 NPT, 두 틀이 붕괴하기 직전입니다. 트럼프 때문이죠. 유럽에서는 이미 미국이 없는 나토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독일 차기 총리가 유력한 메르츠는 “안보 체계를 개편해 미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럽의 핵보유국인 프랑스, 영국과 핵을 공유해야 한다는 거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유럽 자체 핵우산 구축을 주장합니다. 트럼프의 미국이 국방비 부담을 이유로 나토를 이탈할 조짐을 보이니, 프랑스의 핵 억지력을 유럽 전체로 확장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프랑스와 영국의 핵우산이 미국의 핵우산만큼 든든할까요?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무기를 갖고 있습니다. 5889기입니다. 그다음으로 많은 나라가 미국(5244기)입니다. 그 뒤를 중국(410기), 프랑스(290기), 영국(225기)이 따릅니다. 일단 숫자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만약 마린 르펜이 차기 프랑스 대통령이 된다면 “프랑스의 핵은 프랑스의 것”이라고 말하겠죠.

푸틴이 우크라이나에서 승리한다면 다음 타깃은 폴란드, 몰도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이 주도하는 유럽 핵우산은 러시아의 확장 억제에 도움이 되긴 할 겁니다. 그러나 미국이 제공하던 것만큼은 아니죠. 게다가 유럽 국가들이 프랑스, 영국의 핵 공유를 믿을지도 의문입니다. 워싱턴은 믿을 수 없는데, 파리와 런던을 믿을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결국 핵보유국의 위협을 받는 나라들은 핵 개발에 나설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움직일 나라는 우크라이나,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 국가들일 겁니다. 독일에선 이미 원내 2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자체 핵무장을 주장하고 있죠. 다음 주자는 중국의 위협을 받는 대만이 될 겁니다. 그다음은 북핵을 이고 있는 한국이 될 수 있고요. 한국이 핵무장을 한다면 아마 일본이 뒤를 따르겠죠. 다음은 호주입니다.

NPT를 탈퇴하면 국제 사회에서 왕따가 되는 건 바이든 때까지 통하던 얘기입니다. 트럼프는 모든 걸 거래의 대상으로 삼으니까요. 게다가 트럼프의 안보 책사인 엘브리지 콜비 미국 국방부 정책 차관 후보자는 핵 비확산보다 지정학을 중시합니다. 콜비는 지난해 국내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이 핵무장을 하지 않는 대안을 훨씬 선호하지만, 모든 선택지를 테이블에 올려놓을 필요는 있다. 한국의 핵무장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지정학이 핵 비확산보다 중요하다. 우리의 적이 핵무기를 가지는데, 우리가 동맹의 핵무장을 막는다면 그게 비확산 정책의 승리인가? (…) 미국이 북한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 도시 여러 개를 잃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콜비는 드골의 말을 그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트럼프와 푸틴이 사실상의 동맹을 맺으면 80년간 구축된 세계 질서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미국이 편을 바꾸면 우크라이나가 패배합니다. 우크라이나가 패배하면 핵무기가 전 세계로 확산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의 다음 카드가 무엇인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핵 확산을 막아 온 심리적 장벽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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