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적인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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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이거나 훈련입니다.

예외적인 어린이

2025년 3월 17일

MBN이 오는 3월 31일 첫 편성 예정인 오디션 프로그램, 〈언더피프틴〉이 논란입니다. K-POP 아이돌을 발굴한다는 취지의 오디션 프로그램인데, 만 15세 이하의 소녀들을 모아 걸 그룹 데뷔를 놓고 경쟁을 시킨다는 겁니다. 티져 영상에는 짙은 화장, 짧은 상의 등으로 치장한 참가자들의 모습이 담겼고요.

비판적인 기사들이 쏟아집니다. 해외 K-POP 팬들의 소셜 미디어 코멘트를 따와 소개하는 식인데, 주로 어린이를 성적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비난 여론입니다. 소위 ‘업계 관계자’의 의견이라며, 해외에서는 어린 나이에 연습생으로 시작해 오랫동안 훈련받고 데뷔하는 한국의 시스템을 낯설게 여긴다는 우려도 제기합니다.

미성년자가 주로 출연하는 프로그램인 만큼 출연자 보호를 위한 장치는 아무리 단단해도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다만, 그와는 별개로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프로그램에 당황하는 이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정당한가요?
제작사는 이 프로그램을 ‘만 15세 이하 K-POP 신동 발굴 프로젝트’로 홍보하고 있습니다. 출처: 크레아 스튜디오
성적 대상화

어쩌면 짙은 화장이나 옷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2019년, 배스킨라빈스의 ‘핑크 스타’ 광고 논란입니다. 진한 핑크색 립컬러를 바른 아역 모델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입니다. 문제는 모델의 입을 ‘과도하게’ 클로즈업한 장면이었습니다. 아동을 향한 성적 대상화가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결국 방송심의위원회는 광고를 편성한 방송국 7곳에 제재를 내렸죠.

심의위원들의 제재 이유를 보면, “어린이는 어린이로 내버려둬야 한다”, “평이한 의상이라고 적었으나 실질적으로 어린이를 성적 대상화한 의상”이라는 의견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심의위원의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출처: 유튜브
저는 개인적으로 광고 제작사가 정말 아역 모델을 ‘성적 대상화’할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배스킨라빈스는 아이스크림 브랜드입니다. 부모가 지갑을 열어야 장사가 됩니다. 전국의 아빠, 엄마를 적으로 돌릴 광고를 할 만큼 2019년의 배스킨라빈스가 도전적이지는 않았고요. ‘제2의 배스킨라빈스 소녀’를 만들어야겠다는 욕심 정도는 있었겠지만요. 그러니까, 방송심의위원회의 시각은 시청자에 따라 판단이 꽤 갈릴 수 있는 부분이었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다만, 이 광고에 등장한 아역 모델은 어른처럼 화장하고, 어른처럼 입었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어설프거나 귀엽다는 느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이가 아이‘답지’ 않았습니다. 답지 않음은 우리를 종종 당황하게 하죠.

아이다움

아이다움이란 무엇일까요? 2011년 출간된 유은실 작가의 동화, 〈나는 편식할 거야〉는 초등학교 1학년생인 정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정이는 뭐든 잘 먹어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지만, 허약하고 편식을 하는 오빠만 장조림 반찬을 먹게 되자 “나도 이제 편식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쁜 우리 딸, 아무거나 잘 먹는 우리 딸”이 되기를 거부한 겁니다.

아무거나 잘 먹으니 예쁘다는 것은 어른의 시선입니다. 어른이 바라는 아이의 모습 말입니다. 정이가 예쁜 까닭은 먹성 때문이 아니잖아요. 동화 속 어머니는 정이에게 엄마의 마음을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정이는 보편적인 어린이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정이는 정이이기 때문에 소중하지요.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좀 다릅니다. 요즘 꽤 많은 아이가 어른들이 설정한 ‘아이다움’을 판매하고 있거든요. 키즈 유튜브에 출연하며 수많은 랜선 삼촌, 이모들에게 행복을 주는 아이들 얘깁니다. 어른들이 보고 싶어 하는 아이다운 천진함을 뽐내면 아이들은 그 대가로 ‘좋아요’와 댓글을 받습니다. 부모의 기뻐하는 얼굴은 덤이고요.

그렇다면 키즈 유튜브 동영상 속에서 아이들은 정말 ‘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정익중 교수팀이 2020년 한국 유튜브 시청 100위권에 포함된 키즈 채널을 분석했는데요, 아동 놀이의 충족 조건 네 가지(아동 주도성, 무목적성, 놀이 촉진성, 적절한 시간과 장소)를 모두 갖춘 경우는 전체 788개 중 0개였습니다. 이 아이들은 놀이가 아닌 ‘노동’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돈을 버는 아이들

인상주의 화가인 에드가 드가는 발레리나로 무대에 서는 소녀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한껏 치장하고 기쁜 표정으로 춤을 선보이는 소녀의 얼굴 뒤에는 늘 검은 정장 차림을 한 중년 남성의 모습이 흘깃 보입니다. 19세기 발레의 주도권을 러시아에 빼앗겨 재정적으로 빈곤해졌던 프랑스 발레계에서 횡행하던 문화입니다. 이른바 ‘후원자’들이 ‘통행증’을 구매해 무대 뒤편으로 어린 발레리나를 탐색하러 오는 겁니다.

발레리나는 당시 프랑스 빈곤층 가정의 ‘살림 밑천’이었습니다. 농장에서도 공장에서도 벌 수 없는 거금을, 발레 공연 뒤에는 벌 수 있었죠. 공연자로 명성을 얻어서가 아니라, 돈 많은 상류 계급 남성의 눈에 들어 ‘후원’이라는 이름의 성매매로 몰려서입니다.

드가의 발레리나는 여신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땀을 흘리고 있고, 빠르게 움직이는 탓인지 이목구비가 뭉그러져 있기도 하죠. 드가는 19세기의 발레를 그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그려낸 화가입니다. 가계를 짊어지고 무대에 선 어린 노동자들을, 그들이 원치 않아도 내몰리게 될 해피 엔딩을 솔직하게 포착했습니다.

20세기, 21세기엔 달라졌습니다. 야만의 시대는 끝났으니까요. 그래도 여전히 발레는 어린 나이에 시작해야 하는 예술입니다. 뼈가 굳기 전에 시작하지 않고는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만화가 바스티앙 비베스의 그래픽 노블, 《폴리나》는 한 발레리나의 삶을 건조하게 묘사합니다. 표지에는 6살의 폴리나가 ‘훈련’을 받는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선생님은 더는 휘어지지 않는 폴리나의 허리를 힘으로 젖힙니다. 어린 폴리나는 그 순간 무엇을 위해 그 고통을 감당했을까요. 더 잘하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더 칭찬받고 싶었을지도요. 어느 쪽이든 폴리나는 그 순간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스스로 결정한 것이죠.

불편한 감각

다시 〈언더피프틴〉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이거나 훈련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아동노동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역 배우같이 예외적일 때에는 고용노동부의 인허가를 받게 되어 있고요. 그러니까, 이들은 원래 해서는 안 되는, 아동노동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결과 수익 창출을 위해 방송에 필요한 콘셉트나 외향을 요구받게 됩니다. 티져에 드러난 것처럼 짙은 화장이나 노출이 있는 옷일 수도 있겠지요.

아이들은 특정 캐릭터나 행동 등을 요구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칭찬에도 ‘나다움’이 흔들릴 수 있는 나이의 아이들이 ‘아이다움’을 넘어 ‘연예인다움’까지 몸에 익혀야 한다면, 그 또한 가혹한 노동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무대를 원할 수도 있고, 성공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화장도, 의상도 그 누구보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일지 모르죠. 그런데 정말 그런지 관객은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경쟁하게 될 아이들을 보며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바로 이 지점일 겁니다. 이들이 ‘소비’되고 있다는 감각 말입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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