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고 냄새 맡고 선물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음악입니다.
요즘 카세트테이프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띕니다. 카세트테이프와 플레이어를 빌려주는 카페도 입소문을 타고 있다 하고요. 옛것이 다시 관심을 받는다는 소식은, 특히나 청년층에게 인기 있다는 소식은 늘 좋은 소재가 됩니다. 트렌드 기사로서도 클릭을 부를뿐더러,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요즘 비슷한 소식이 꽤 많습니다. 종이로 된 다이어리 꾸미기부터 필사, 필름 카메라 같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소개됩니다.
어쩌다 이런 ‘예스러운’ 감각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것일까요? Y2K 유행이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도 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에 그리움을 느끼는 아네모이아(Anemoia) 현상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은 원래 물성을 선호한다고도 하죠. 저도 이 분석에 저만의 관점을 하나 얹어볼까 합니다. 새로운 인류가 복잡한 감각을 원하게 되었다는 분석입니다.
납작한 현실
독일의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는 지극히 객관적인 사진을 찍습니다. 관람객을 압도하는 크기의 사진에는 현대 인류의 삶이 켜켜이 쌓여있죠. 공장이나 아파트, 선물거래소와 같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물과 사람은 무질서한 동시에 질서 정연합니다.
수많은 수평선과 수직선이 끝없이 달리는 거스키의 사진은 들여다볼수록 묘합니다. 분명히 현실을 찍은 것인데 현실감이 없습니다. 서사나 캐릭터를 단조로운 프레임에 가두어버린 졸작을 만났을 때 ‘납작하다’라는 형용사를 쓰게 되는데요, 거스키의 사진이 그렇습니다. 장엄한 스케일의 사진을 들여다보는데, 뭔가 납작해진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비밀은 작업 방법에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소실점이 다른 사진들을 합성하여 렌즈의 왜곡을 감추는 방식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결코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넓은 화각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결벽증적 그리드로 재현해 내는 겁니다. 마치 스마트폰 화면을 무한정 스크롤 해도 같은 장면이 끝없이 생성되어 나올 것만 같은 감각이죠.
재미있는 경험이 있었는데요, 거스키의 사진을 여럿이서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모바일 네이티브’에 해당하는 연령대는 작품을 상대적으로 덜 어색하게 느꼈습니다. 세계를 시각적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매체 경험치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은 아닐지 짐작해 봅니다.
평면화
하루에 몇 시간이나 평평한 디지털 화면을 바라보시나요?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저의 경우는 자신 있게 10시간 이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일하지 않을 때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집어 드는 경우가 많으니, 아마 스크린 타임이 14시간을 넘기는 날도 적지 않을 겁니다.
깨어 있는 시간을 18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저는 입체로 된 현실 세계보다 유리 너머 숨겨진 픽셀을 바라보는 데에 인생의 대부분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거스키의 작품을 2007년 이전에 보았다면, 저도 조금은 다른 감상을 내놓았을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변형된 것은 우리의 시각뿐만이 아닐 겁니다. 요즘 우리는 세계와 소통할 때 시각과 청각 외의 다른 감각기관을 잘 이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죠. 예를 들어 예전에는 그림을 그릴 때 종이의 질감, 물감의 냄새, 붓 자국의 도톰한 입체감을 동시에 감각했습니다. 하지만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면 화면과 나 사이에는 강화유리 외에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컴퓨터 사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는 컴퓨터를 다루는 일이란 물리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카드에 구멍을 뚫어 데이터를 기록했고 복잡한 스위치를 조작했죠. 컴퓨터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고 시끄러운 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다 키보드를 통한 텍스트 입력에 이어 마우스로 커서를 조작하는 GUI의 시대가 왔습니다. 다음으로는 터치스크린이 도입되며 모든 경험이 평평해졌습니다.
가상에 잠식당한 삶
20세기 초,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은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탐구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창시했습니다. ‘현상학(Phenomenology)’입니다.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탐구했죠. 모토는 ‘사물 자체로 돌아가라(Zur ck zu den Sachen selbst)’입니다.
후설이 내놓은 개념 중에 생활세계(Lebenswelt, Life-world)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학이나 이론적 분석을 거치기 이전에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세계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컵’이라는 물건을 수학적 구조로 분석하여 보지 않죠. 단순히 손으로 집을 수 있고 액체를 따라 담을 수 있는 물건으로 경험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컵에는 개인의 맥락도 쌓이게 되죠. 감각, 감정, 문화, 역사 속에서 컵이라는 현실은 주관적으로 체험됩니다.
철학과 과학도 생활세계에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점차 객관적 모델을 강조하면서 원래의 경험적 의미를 잃고 모든 것을 추상화, 객관화합니다. 후설은 이를 ‘생활세계의 망각’이라 비판했고요. 하지만 2025년의 우리에게 생활세계는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화면 너머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만져보지 못하고 냄새 맡지 못한 것을 너무 많이 경험했습니다. 화면 너머로 말이죠. 여행 유튜버의 여행을 경험하고, 뉴스 인스타그램의 텍스트를 경험합니다.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으로 생활세계의 소리를 차단해 현실과 우리 자신을 분리한 뒤, 내가 원하는 세계만 재생되는 화면 속으로 빠져듭니다.
우리는 볼 수는 있으되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얻었습니다. 추상이 아닌데 추상이고, 개념이 아닌데 개념인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생활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네모이아
카세트테이프는 스포티파이의 환원된 경험을 생활세계로 매개하는 매개체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카세트테이프를 구입합니다. 만지고 냄새 맡고 선물할 수 있는 구체적인 현실의 음악입니다. 스마트폰 속에 몇만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지만,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지라는 핵심을 둘러싸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종이와 여백에 맥락이 깃들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저는 현실보다 가상이 삶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전복의 결과, 생활세계를 ‘체험’할 수 있는 물건들이 잘 팔리기 시작했다는 관점을 제안해 봅니다. 일종의 사치재로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일종의 아네모이아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험해 본 적 없는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 본 적 없는 생활세계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요. 이제, 현실을 돈 주고 체험하는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