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를 보며 생각한 것

bkjn review

교황과 정치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책 표지를 보며 생각한 것

2025년 3월 20일

대권 잠룡들의 출판 정치가 시작됐습니다. 유력 후보가 없는 보수 진영의 주자들이 출발을 끊었습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2월 26일 저서 《국민이 먼저입니다》를 냈는데, 예약 판매 기간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책이 서점에 깔리기도 전에 4만 권이 팔렸다는 보도도 있었죠.

오세훈 서울시장도 책을 냈습니다. 《다시 성장이다》입니다. 3월 14일 예약 판매를 개시했는데, 이 책 역시 주요 서점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홍준표 대구시장도 책 《꿈은 이루어진다》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 심판이 인용되면 여야 대권 주자의 책이 두어 권은 더 나올 겁니다.
좌: 한동훈의 《국민이 먼저입니다》, 우: 오세훈의 《다시 성장이다》
출마를 앞두고 발행되는 정치인의 책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책 표지에 본인 사진이 큼지막하게 들어간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작가 사진은 책 띠지에 넣습니다. 띠지는 광고판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얼굴이 알려진 작가라면 유명세를 활용해야죠. 하지만 표지에는 거의 넣지 않습니다. 전기나 평전이 아닌데도 표지에까지 얼굴 사진을 넣을 때는 둘 중 하나입니다. 저자가 교황이거나, 정치인이거나.

정치인의 나르시시즘은 한국적 현상이 아닙니다. 버락 오바마와 앙겔라 메르켈도 저서 표지에 자기 얼굴을 크게 넣었습니다. 정치인은 얼굴 자체가 브랜드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 그것도 가장 잘 나온 프사를 — 각인하고 싶어 하고, 출판사는 그의 팬덤에 어필해 책을 팔아야 하니, 정치인 책에는 얼굴 사진이 빠질 수가 없습니다.
좌: 오바마의 《The Audacity of Hope》, 우: 메르켈의 《Freedom》
그런데 저는 이 문법도 이제 바뀌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볼거리가 방송 3사 TV와 신문, 책밖에 없었을 때는 표지에 얼굴 사진을 싣는 게 정치적으로 확실히 유리했겠죠. 그런데 요즘처럼 즐길 거리와 디스플레이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 전략이 여전히 유효할까요? 성인 두 명 중 한 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시대인데 말입니다. 얼굴을 알리려면 책을 쓰기보다는 삼프로TV에 나가는 게 시간 투자 대비 효율 면에서 훨씬 낫습니다.

다른 책을 한번 볼까요? 일본의 디자인 거장 하라 켄야는 《백》에서 ‘비어 있음(emptiness)’의 철학을 이야기합니다. 표지 디자인은 말 그대로 ‘백’입니다. 파타고니아 창업자 이본 쉬나드는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서 파도가 칠 때는 직원들이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 서핑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표지에선 파도치는 바다를 보여 줍니다. 두 책은 다 읽고 나서 다시 표지를 보면 뭉클해지기까지 하죠. 좋은 책 표지는 책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좌: 하라 켄야의 《백》, 우: 이본 쉬나드의 《파타고니아,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
그런데 한동훈 전 대표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책은 — 앞으로 더 나올 대선 주자의 책 역시 그럴 겁니다. — 곧고 단정한 자세의 본인 사진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사진이 남겨 준 자리에는 우아하고 익숙한 서체로 제목과 저자 이름을 적습니다. 품격은 있지만, 내용이 없습니다. 표지만 봐서는 책에 담긴 핵심 메시지를 알 수 없습니다. 선거 포스터처럼 멀끔할 뿐입니다.

책은 책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영상과 이미지가 할 수 없는 걸 해야 다른 매체를 이길 수 있습니다. 책에서 저자는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메시지를 원하는 만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자의 얼굴이 아니라 저자가 지향하는 가치와 메시지를 강화하는 표지 디자인이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심벌, 타이포그래피 같은 그래픽 요소를 활용하는 거죠.

제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정치인 책 표지는 《혁명(Révolution)》입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2017년 대선을 앞두고 펴낸 책입니다. 프랑스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담았는데, 책 표지에 인물 사진 없이 저자 이름과 제목만 간결하게 적었습니다. 제목 하단에는 “이것은 프랑스를 위한 우리들의 투쟁이다”라고 썼죠.
마크롱의 《혁명(Révolution)》. 위의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뒤표지도 살짝 보입니다.
당시 정치 신인이었던 마크롱은 프랑스 국민을 향해 말했습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기존 정치에 맞서 민주 혁명을 일으키겠다. 이것은 프랑스를 위한 우리들의 투쟁이다.” 책 표지 디자인은 핵심 메시지에 꼭 들어맞습니다. 인물 사진 중심의 기존 문법을 파괴했으니까요. 그야말로 ‘혁명’이었습니다. 마크롱은 기존 정치인과 확실히 구분되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죠.

이 책은 여러모로 영리했습니다. 앞표지에선 출판계의 관행을 깼지만, 뒤표지에는 클로즈업한 마크롱 얼굴 사진을 꽉 차게 넣었거든요. 정치적 메시지 전달과 인지도·매력도 상승, 상업적 성공을 모두 고려해 적절한 균형점을 찾은 것 같습니다.

한동훈 전 대표 책은 ‘국민이 먼저’라고 하지만 표지만 보면 한 전 대표가 먼저입니다. 오세훈 서울시장 책은 앞표지, 뒤표지에 오 시장 사진을 넣었습니다. ‘다시 성장’이라고 하지만 표지만 보면 오 시장 화보집입니다. 이래서는 팬덤층을 제외하고는 선뜻 집어 들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핵심 메시지를 잘 드러낸 표지라면, 평소 관심이 없던 정치인이라도 그 사람의 생각을 더 알아보고 싶을 것 같은데,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한동훈 전 대표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책이 잘 팔려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 물론 몹시 부럽습니다. — 아까 말씀드렸듯 한국적 현상만도 아니고요. 그러나 정치는 미래를 제시하는 일입니다. 책 표지에도 그 미래 비전이 조금은 담겼으면 합니다. 얼굴 말고 철학과 사상을 보고 싶습니다. 미적 취향과 안목도 궁금하고요.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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