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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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라는 제도 자체에 결함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연금 게임

2025년 3월 25일

1억 8000만 원을 투자하면 은퇴 후 3억 1000만 원으로 돌려주는 금융 상품이 있다고 가정해 보죠. 여러분이라면 가입하시겠어요? 일시납 아닙니다. 매달 조금씩 나누어 내면 됩니다. 40년 동안 납입하고 25년 동안 나누어 수령합니다. 가입만 할 수 있다면 수익률이 70퍼센트 넘게 나오는 셈이죠. 장기 상품이란 점을 감안해도 꽤 괜찮습니다.

이 상품의 이름은 국민연금입니다. 사실, 우리 중 많은 숫자가 좋든 싫든 이미 가입해 돈을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죠. 꽤 고수익 상품에 국가가 운영하니 안정성도 높습니다. 그런데 국민연금을 둘러싸고는 논란이 끊이질 않죠. 숫자 계산을 아무리 거듭해도 누구 하나 만족하지 못합니다. 오랜 논의 끝에 겨우 성사된 이번 개혁안에도 반발이 거셉니다.

이번 개혁안의 골자는 ‘더 내고 더 받기’입니다. 내는 돈을 소득의 13퍼센트까지 올립니다. 지금 9퍼센트씩 내고 있는데, 이걸 매년 0.5퍼센트 포인트씩 8년 동안 올립니다. 소득대체율도 40퍼센트에서 43퍼센트로 올립니다. 이건 바로 내년부터 적용됩니다. 당장 청년 세대를 상대로 한 ‘폰지 사기’라는 비판이 쏟아집니다. ‘더 내기’를 책임지는 것은 청년 세대인데 ‘더 받기’를 누리는 것은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라는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하지만 이번 개혁안은 오랜 숙의 끝에 통과된 것입니다. 여야가 합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논의와 계산이 있었습니다. 국민연금 기금은 2055년 바닥날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번 개혁으로 고갈 시점이 9년 늦춰졌습니다. 어떻게든 국민연금의 생명을 연장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번 개혁안 통과로 행복해진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안도하는 사람도 없어 보이고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국민연금이라는 제도 자체에 결함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정치 게임

국민연금의 첫 번째 결함은 이 제도가 정치의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수학이거나 경제학, 적어도 사회학쯤 되어야 할 것 같지만, 제도의 모양과 숫자를 정하는 주체가 국회인 이상 정치학일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란 숙의와 합의여야 합니다. 하지만 자주 다수결의 함정으로 전락하곤 하죠.

연금은 연령에 따라 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가르는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는 어느 연령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까요? 50대입니다. 전체 국민의 16.76퍼센트를 차지합니다. 가장 큰 유권자 집단이죠. 60대와 40대가 그 뒤를 잇습니다. 각각 15.18퍼센트, 14.93퍼센트입니다.

국민연금을 두고 한때는 진보와 보수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진보는 소득대체율, 즉 받는 돈을 높여 복지 사각지대를 메워야 한다고 주장했죠. 반면 보수는 포퓰리즘과 기금의 재정 안정성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둘의 경계가 흐릿해집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진보든 보수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덜 내고 더 받고 싶어 하니까요. 그래서 정치는 그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1998년 이후 보험료율, 즉 소득 대비 내는 돈은 동결되었습니다. 98년도의 20대, 30대가 낼 돈을 올릴 수 없었던 겁니다. 2025년, 그들은 이제 50대와 60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곧 수급자가 됩니다. 지금까지는 보험료율을 못 올리는데 수급자는 늘어나니 2007년부터 소득 대체율도 같이 줄여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개혁으로 소득 대체율이 다시 상승합니다. 얄궂은 타이밍입니다.
대학생들이 국민연금 개혁안에 대응하기 위한 공식 기구도 출범했습니다. ‘국민연금 개혁 대응 전국 대학 총학생회 공동행동’ 발족 기자회견에서는 “고통은 청년에, 혜택은 기성세대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출처: 한국일보
시민과 마피아 게임

연금이 노후를 부족하지 않게 보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는 선합니다. 문제는 국민연금이 모두의 노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국민연금의 두 번째 결함입니다.

한때 경제 관련 방송 프로그램이나 신문 기사에 자주 등장했던 주제가 바로 전업주부의 국민연금 납부 방법이었습니다. 배우자가 공적 연금에 가입되어 있다면, 전업주부는 국민연금 의무가입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계에 경제적 여유가 있어 납입할 수 있다면 임의가입으로 국민연금을 부어두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에 유용한 노후 대비 재테크 기법으로 국민연금이 자주 소개되곤 했던 것이죠. 뒤집어 말하면, 전업주부의 노후는 따로 가입해야 챙겨준다는 얘깁니다.

국민연금은 의료보험과 다릅니다. 돈을 많이, 오래 내야 연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노동 시장의 불균형이 고스란히 연금 불균형으로 옮아갑니다. 2023년 11월 기준, 남성 노령연금 수급자의 평균 수령액은 75만 원 수준이었습니다. 여성은 약 39만 원이었고요. 60대가 평생 겪어온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명징한 금액으로 찍혀나온 겁니다.

실직이나 휴직 등으로 소득이 끊기면 국민연금 납부 예외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못 낼 사정이 생기면 안 내도 된다는 겁니다. 다만 그 경우 가입 기간이 줄어듭니다. 국민연금을 수급할 때는 내가 낸 만큼 받는 ‘비례 급여’에 ‘균등 급여’라는 것을 더해 받게 됩니다. 소득 재분배 장치인데, 이 균등 급여는 가입 기간이 길 수록 많아집니다. 즉, 평생 고용 불안정에 시달린 가입자일수록 가입 기간이 짧아져 연금 수령액이 줄어드는 겁니다.

국민연금은 모든 국민을 위한 연금이 아닙니다. ‘모범 시민’을 위한 연금입니다. 80세 이상의 극빈층 노인은 한창 돈을 벌 때 제도 자체가 없었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청년이나 경력 단절 여성에게도 불리한 제도입니다. 저소득층의 가입 비율은 40퍼센트 수준이고요. 안전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국민연금은 충분히 너그럽지 못합니다.

마이너스 게임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든든한 노후보장이 되어준다면 국민연금의 존재 가치는 충분할 겁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현재의 20대, 30대 청년 계층도 납부한 연금을 아예 떼일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고요. 그럼에도 국민연금은 여전히 미래 세대에게는 마이너스 게임입니다. 너무 많은 돈을 묶어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결함입니다.

2024년 기준으로 국민연금의 적립금은 1213조 원입니다. 실질 GDP 추정치는 약 2289조 원이고요. 우리나라 GDP의 절반 넘는 돈이 국민연금 기금으로 적립된 겁니다. 이 돈은 국내외 투자시장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돈으로 돈을 불려야만 하는 숙명을 지고 있으니까요.

만약 이 돈이 우리 내수 시장에 풀린다고 가정해 보죠. 돈은 시장에서 돌아야 추가적인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우리 동네 백반집을 키우고, 중소기업을 키우고, 다시 우리의 월급을 올리죠. 우리가 고갈 시점을 조금이라도 늦추고자 조바심 내는 국민연금의 적립금은, 미래 세대의 경제 성장 가능성을 빌려와 쌓아 둔 것입니다. 현재 세대의 노후를 대비할 목적으로요.

국민연금이 처음 시작되었던 때에는 일하는 사람이 많았고 기대 수명도 짧았습니다. 게다가 고성장이 이어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맞춰 설계된 제도입니다.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인구 구조가 급변했고 성장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노동 시장의 구조도 파편화하면서 소득 안정성도 떨어졌죠. 연금 제도를 먼저 시작한 유럽의 몇몇 국가는 이미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 연금을 지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청년 세대에게 걷어 수급자 세대에게 지급하는 ‘세대 간 계약’ 시스템으로 이미 넘어간 겁니다. 그래서 연금 제도를 의심해 볼 때가 되었습니다. ‘개혁’으로는 부족합니다. 고쳐 쓰기엔 결함이 너무 많고 큽니다. 어쩌면 완전히 새로운 대안을 논의해야 할 시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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