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앉은 불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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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불은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된 겁니다.

주저앉은 불곰

2025년 3월 26일

2025년의 봄은 산불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영남권 산불이 좀처럼 잡히지 않으면서 사망자가 26명까지 늘어났습니다. 사람이 낸 불입니다. 곳곳에서 예초기 사용 중에 튄 불씨가, 쓰레기 소각 현장이, 부모님 묘소에 올린 촛불이 이번 산불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산불 진화의 큰 축 중 하나가 바로 소방 헬기입니다. 최대 만 리터의 물을 한 번에 쏟아내 산불의 머리 부분을 진화합니다. 다음에는 산불의 줄기들을 끊어내 거대한 불덩어리를 잘게 쪼갭니다. 이후 지면 가까이 남은 잔불과 작은 불덩어리를 지상에서 사람이 직접 진화합니다.

이번 산불은 나흘 넘게 지속되면서 2만 7000명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산불 영향 구역은 1만 7534헥타르로, 여의도 면적의 60배가 넘습니다. 워낙 넓은 면적에서 불길이 치솟다 보니 전국 지자체의 소방 헬기가 총동원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산림청이 보유한 헬기 중 20퍼센트가 지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러시아산 헬기인데, 전쟁으로 부품을 수급하지 못해 사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불곰 작전

1992년 노태우 정부는 구소련에 빌려줬던 14억 7000만 달러 규모의 경제협력 차관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현금 대신 현물을 받게 됩니다. 주로 무기였는데, 일명 ‘불곰사업’입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산 헬기가 대량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됩니다. 당시 들여온 주요 기종이 카모프(KA-32) 기종인데, 현재 산림청, 해양경찰청, 소방청 등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카모프 헬기는 가격이 저렴한 편인데 힘은 좋습니다. 한 번에 3000리터 가량의 물을 퍼 나를 수 있죠. 동체를 작게 만드는 대신 물탱크를 달아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바람에도 버틸 수 있죠. 또, 비행기와 달리 헬리콥터는 한자리에 머물며 떠 있을 수 있는데, 이걸 호버링이라고 합니다. 카모프 기종의 호버링 시간은 30분 이상으로 꽤 좋은 편입니다. 6000미터 상공까지 상승할 수 있고요. 한마디로 소방헬기로서는 가성비 좋은 모델입니다.

단점도 있습니다. 점검 주기가 짧습니다. 보통 헬기 부품 점검 및 교체 주기는 1000시간대입니다. 그런데 카모프 헬기는 몇백 시간마다 점검이 필요합니다. 모든 헬기가 그렇듯 10년에 한 번씩은 기체를 나사 하나까지 완전히 분해하여 검사하는 오버홀(Overhaul)도 진행해야 합니다. 전문 업체가 청주 공항에 있어 러시아 기술자들과 함께 유지보수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수리용 부품을 들여올 방법이 막힌 겁니다. 2022년부터 시작된 대러시아 경제 제재 때문입니다. 카모프 기종의 주요 부품을 생산하는 곳이 러시아 군수 기업이라 제재 대상에서 제외할 방법이 없습니다. 냉전 종식의 상징과도 같았던 러시아산 헬리콥터가 신냉전의 도래로 날 수 없게 된 겁니다. 산림청은 현재 49대의 소방 헬기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중 29대를 차지하는 카모프가 주력 기종입니다. 10대는 이미 멈춰 섰고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헬기가 날 수 없게 됩니다.

달라진 산불

문제는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산불을 키운 것은 순간풍속 20미터 이상의 강한 바람이었습니다. 이런 강풍 속에서는 카모프 같은 중형급 헬기도 안정적으로 날기 힘듭니다. 소형급 헬기는 위험하기도 할뿐더러, 적은 양의 물을 뿌려봤자 강풍에 물이 흩어져 버립니다. 불의 머리와 맥을 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덩치가 더 큰 대형 헬기만 현장에 투입될 수 있습니다. 다만, 물 8000리터를 나를 수 있는 대형 헬기는 산림청에 5대뿐입니다. 그래서 봄철 산불에 대비해 해외에서 산불 전문 헬기를 빌려옵니다. 2024년에는 산불 진화 전문 헬기를 7대 빌려 썼습니다. 넉 달 빌려 쓰는데, 369억 원이 들었습니다. 올해는 2대를 겨우 빌렸습니다. 그나마 LA 산불 여파로 1대가 지난 14일에야 현장에 배치되었고, 나머지 1대는 이제 겨우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산불 진화용 헬기가 이렇게 부족할까요. 돈 때문입니다. 비싼 헬기를 잔뜩 사 두었는데 쓸 일이 없어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쓴다면 문제입니다. 소중한 세금을 낭비하는 꼴이죠. 우리나라에 대형 산불이 일상이 아니었던 때에는 헬기 도입이 사치였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느끼고 있듯, 봄철 산불은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갈수록 산불의 규모가 커지고 피해도 일파만파입니다. 봄이 더 덥고 건조해졌기 때문입니다. 2022년 유엔환경계획(UNEP)은 기후변화로 인해 산불이 2030년까지 14퍼센트, 2050년까지는 30퍼센트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습니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도 기온이 1.5도 오르면 산불 발생 가능성이 8.6퍼센트 상승한다고 밝혔고요.

위험만 커진 것이 아니라 기간도 늘어났습니다. 1990년대에는 산불 위험기간이 100일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 170일 가까이로 증가했고, 최근 5년간 수치는 200일에 육박합니다. 이제 산불은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 된 겁니다.

산불이 쉽게 나는 환경으로 변하고 있는데, 사람은 그에 맞춰 변화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산에서 쉽게 라이터를 켜고 논과 밭에서 부산물을 태웁니다. 시골에서는 쓰레기장이 너무 멀리 있어 거동이 불편한 노년층을 중심으로 쓰레기 불법 소각도 이루어집니다. 살던 대로 살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변화한 환경에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위험천만한 행동입니다.
산불 진화 중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하루빨리 이번 산불이 수습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 MBC
어디에 돈을 쓸까

환경은 변하고 사람은 변하지 않았으니 이제 대형 산불은 피하기 어려운 재난이 되었습니다. 발생 가능성을 예전보다 훨씬 높게 잡고 대비해야 합니다. 철마다 대형 헬기를 빌려다 쓸 것이 아니라 전격적으로 보유를 검토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산불 진압용 소방 항공기 도입도 검토할 만합니다. 기종에 따라 헬기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을 퍼 나를 수 있습니다. 기상의 영향도 상대적으로 덜 받습니다. 소방관 출신의 오영환 전 의원이 도입을 주장했지만, 21대 국회 종료와 함께 그대로 묻혔습니다.

사실, 경상남도가 지난 2012년 캐나다의 CL-215 기종 소방 항공기를 임차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활용해 보지 못하고 방치되면서 비판이 나왔습니다. 임차료도 120일에 20억 원으로 당시로서는 큰돈이었습니다. 결국 재계약은 없었습니다.

13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러시아산 헬기가 지금까지 수많은 산림과 생명을 살렸지만, 이제는 부족합니다. 더 확실한 공중 소방 자원 확보는 물론이고, 취수 방식과 운영까지 아우르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산림청의 예산 운용을 들여다보고 효율화하는 작업부터 착수해야 하겠죠.

자연재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방재(防災)’가 아닌 ‘감재(減災)’를 강조합니다. 방재는 재난을 방지하는 일이고 감재는 재난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일입니다. 재난을 피하기 어려워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감재에도 좀 더 자원을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불을 끄기 위한 장비와 사람에 더 투자하는 것은 물론이고, 산 근처 주민들의 대피 훈련 강화, 대피 동선 확보 등도 포함해야 합니다.

이제 산불을 막을 수 있다는,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대형 산불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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