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파베르의 다음 도구

bkjn review

샘 올트먼에게는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호모 파베르의 다음 도구

2025년 4월 2일

여러분도 만들어 보셨나요? ‘지브리 스타일’ 프로필 이미지 말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모습도 지브리 풍으로 그려내니 참 따뜻해 보입니다. 오픈AI가 얼마 전 GPT-4o 모델에 새로운 이미지 생성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네 컷 만화도 척척 그려내고 모든 이미지를 심슨 스타일, 픽사 스타일 등 다양한 화풍으로 변환해 냅니다.

일각에서는 창작자가 설 자리를 잃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지브리 등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저작권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죠. 그럼에도 지금 샘 올트먼 CEO는 꽤 신이 난 것처럼 보입니다. “GPU가 녹고 있다”, “우리 엔지니어 팀도 잠을 자야 한다”며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한 시간 만에 사용자가 100만 명 늘어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리스크를 감수한 이유

생성형 AI에는 무언가를 ‘생성’할 능력은 없습니다. 학습한 것을 조합하고 적용하여 최대한 그럴듯한, 정답일 확률이 높은 결과물을 내놓을 뿐입니다. 즉, 지금 챗GPT가 만들어내고 있는 어떤 ‘스타일’의 이미지는 오픈AI가 각 애니메이션을 AI 모델 학습에 사용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아직 오픈AI가 지브리는 물론이고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 저작권 계약을 맺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계약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언급 자체를 피하고 있는 겁니다. 다만, 스튜디오 지브리가 오픈AI와 사전 협의와 저작권 계약까지 했을 가능성은 꽤 낮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과거 AI를 이용해 제작한 애니메이션에 관해 “역겹다”는 표현까지 쓰면서 비판한 일이 있거든요.

사실, 화풍에 관한 저작권 적용 여부는 고민할 지점이 많습니다. 법률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 부분이죠. 스튜디오 지브리 등으로부터 AI 학습에 관해 라이선스나 승인을 받지 않았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측이 있는가 하면, 현행 저작권법상 화풍은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저작권법은 구체적인 표현 결과물을 보호할 뿐, 아이디어나 방법론을 보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논란이 있다’라는 모호한 표현이 딱 들어맞는 상황입니다.

오픈AI가 만약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이번 서비스를 내놨다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저지른 일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세 가지 있습니다. 먼저, 샘 올트먼에게는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최근 오픈AI는 GPT-4.5 모델을 선보였습니다. 그런데 평가가 별로 좋지 않았죠. 일론 머스크의 ‘그록’ 최신 모델에 밀리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왔죠. 하지만 오픈AI는 절대 밀릴 수 없습니다. 생성형 AI 업계에서 최고를 사수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돈 문제 입니다. 오픈AI는 생성형 AI를 대중의 손에 들려준 최초의 기업입니다. 실패를 거듭하며 값진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오픈AI가 개척자의 처지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는 고스란히 비용으로 남았습니다. 오픈AI의 올해 매출은 127억 달러로 예상됩니다. 작년과 비교하면 3배가 넘습니다. 폭발적인 성장세입니다. 그러나 쓰는 돈이 더 많습니다. 2024년, 오픈AI는 50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2029년까지 오픈AI가 흑자전환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즉, 오픈AI는 지속적으로 추가 투자를 유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입니다. 투자자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줘야 하죠. 그런데 후발 주자인 그록에 GPT 모델이 밀린다니,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턱밑까지 추격해 오고 있는 중국산 모델들까지 생각하면 골치가 아팠을 겁니다. 이런 최근의 부진을 단번에 만회시켜 준 것이 이번 지브리 스타일 열풍입니다. 모두 챗GPT에 열광하고, AI 서비스에 관심을 두지 않던 사람들까지 유료 구독을 시작하고 있죠.

여기에 세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생성형 AI의 학습을 둘러싼 저작권 이슈는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고, 사용한 적 없는 기술에 관해 법이 명확한 잣대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죠. 즉, 지금이 그 기준을 만들어가는 때입니다. 오픈AI는 지금까지도 일단 학습에 데이터를 사용한 뒤 문제가 되면 저작권자와 사후 합의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공정 이용’이니 괜찮다는 주장입니다. 오픈AI는 지브리와 저작권 분쟁이 발생할 때도 ‘공정 이용’을 주장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로 이끌고자 시도할 겁니다. 이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도구를 사용하고, 즐거워하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습니다.

지브리 트럼프의 파장

즐거운 놀이에 빠진 사람들 곁에는 근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생성형 AI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약점이 꽤 많이 개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만 할 수 있는 영역이 줄었다는 뜻입니다.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공포가 훨씬 가까워진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텍스트 표현입니다. 네 컷 만화를 그린다고 가정하면 말풍선 안에 대사를 적어야겠죠. 지금까지 이미지 생성 AI는 제대로 된 글자를 잘 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업데이트로 영어는 거의 완벽하게, 한글은 꽤 개선된 수준으로 이미지 안에서 구현합니다. 당장 인스타툰 작가들부터 큰일 났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연히 누군가에게는 타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까지만 해도 저는 이런 콘텐츠를 절대 만들 수 없었으니까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을 설명하는 카드 뉴스를 만들어 줘. 삽입된 그림은 지브리 풍으로, 독자는 초등학생을 상정하고 만들어 줘.” 이 프롬프트의 결과물입니다. 그림체가 별로 지브리 스타일은 아니네요.
하지만, 이 상황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능이 좋은 붓, 그러니까 엄청난 도구를 하나 갖게 되었다는 관점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저작 《창조적 진화》에서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컨대, 지능이란 본래의 의미에서 인공물, 특히 도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며, 그 제조 방식을 무한히 다양화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전환점마다 혁신을 만든 도구가 놓여있었죠. GPT-4o 모델의 새로운 이미지 생성 기능은 인류가 새롭게 창조해 낸 도구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습니다. 따라 그릴 수도 있고, 베껴 그릴 수도 있겠죠. 그렇게 그려진 이미지의 옳고 그름을 별개의 문제로 둔다면, 이번 모델은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이 도구는 어떠한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 수 있을까요.

몇 가지 변화를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술이 엘리트의 소유물에서 모두의 표현 수단으로 변화합니다. 관객의 자리에서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감상했던 누군가도 예술에 참여(participation)할 수 있게 됩니다. 이용자들이 쏟아내고 있는 각양각색의 이미지가 이를 증명하고 있죠. 한편, 참여의 증가는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현하고 싶은 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정치인의 대명사, 트럼프 대통령을 주제로 한 밈 이미지가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 것이 무관하지 않겠지요.

표현 수단을 가졌다고 누구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될 수는 없겠죠. 인간과 세계에 관한 진심 어린 고찰 없이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같은 작품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유튜브 플랫폼이 증명했듯 인간은 콘텐츠를 만드는 것보다 소비하는 쪽에 더 재능이 있습니다. 다만 ‘잘 그린다’라는 행위가 품었던 아우라는 사라질 겁니다. 이제 사람들은 잘 그리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민하게 되겠지요. 그림체를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가치를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제작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기술 복제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1935년에 이야기했던 사회가 2025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다만, 이 새로운 도구가 인간의 창의력을 먹고 성장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생성형 AI가 ‘학습’이라는 과정을 필요로 하는 한, 이 기술의 탄생에는 인류 전체가 기여한 것이나 다름없죠. 그중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특별히 더 크게 기여한 축에 들 겁니다. 그렇다고 샘 올트먼 CEO가 미야자키 감독으로부터 챗GPT 구독료를 안 받지는 않을 것이고요.

낡은 저작권법의 틀에 매여 논의할 것이 아니라 생성형 AI가 갖는 ‘공공재’로서의 특성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구의 발명이 착취가 아니라 혁신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이 독점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생성형 AI는 구글이나 오픈AI, xAI 같은 회사만의 것일 수 없습니다. 인터넷 공간에 무언가를 적고 표현했다면 여러분에게도 지분이 있습니다. 이 도구가 현실적인 쓰임새를 갖출 만큼 발전했으니 이제 우리의 지분에 관해서도 논의해야 할 때 아닐까요.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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