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3일,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집니다. 3년 3개월 만의 대선입니다. 이제 60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어떤 인물, 어떤 공약이 최선일지 결정해야 합니다. 몇 가지 키워드가 4월과 5월, 휘몰아칠 겁니다. 이번 대선판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슈 중 하나는 바로 ‘수도 이전’입니다.
서울을 통째로 들어다 어디로 옮기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세종시로 ‘행정수도’를 이전하겠다는 얘기죠.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의지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지이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도 비슷한 구상이 있었고요.
왜 역대 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수도를 옮기고자 했을까요. 표면적인 이유는 서울 집중화 현상 완화입니다.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정부 부처 여럿과 공기업들이 세종시와 몇몇 혁신도시로 옮긴 지 오래입니다. 그렇다고 집중화가 줄어든 것은 아니죠. 여전히 국토 11.8퍼센트인 수도권에 인구 51퍼센트가 몰려 살고 있습니다.
단순히 대통령실과 국회를 세종으로 옮긴다고 서울의 권력이 지방 도시에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정치인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수도 이전은 정책이라기보다는 정치입니다. 일종의 정치적 투쟁이죠. 그래서 누군가는 반드시 이루어내고자 하고, 또 누군가는 반대합니다.
안보 투쟁
1977년 2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임시 행정수도’ 계획을 발표합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임시 행정수도를 만들어 서울의 인구를 분산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민심은 술렁였지만, 박 전 대통령은 빠르게 일을 밀어붙였습니다. 2년 동안 아무런 전제 없이, 백지상태에서 계획을 수립해 장기적으로 추진하기로 했죠. 다만, 같은 해 10월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수도 이전 계획은 사실상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동기는 ‘북한’이었습니다. 한반도 전체로 보면 서울은 한중간 즈음에 자리 잡고 있지만, 휴전선을 그려놓고 다시 보면 전방과 너무 가깝습니다. 군사분계선에서 고작 6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 전 대통령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당시 신민당 후보가 바로 이 점을 공격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강북 쪽에 인구를 600만 명 넘게 밀집시켜 둔 것은 스스로 안보 위기를 조성하는 행위”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들고나온 것이 ‘
대전 부수도론’입니다.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는 그냥 무시하고 갈 수 없는 주제였습니다.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에게 안보로 밀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박 전 대통령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에게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기초 작업을 지시합니다. 학계와 정부 각료가 참여해 충청권을 중심으로 입지 선정 작업이 진행되었죠. 점점 비대해지는 서울에 관한 문제 인식 또한 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 연구팀은 행정수도를 50만 명 규모로 단독 건설할 경우 56만 명의 서울 인구 분산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1977년 기준으로 서울 인구의 10퍼센트가량을 덜어내는 효과였죠.
정치 투쟁
이 이슈가 다시 본격적으로 부활한 것은 16대 대선에서였습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는 새로운 인물이었습니다. 돌풍을 일으키며 경선에서 승리했지만, 대선 본선의 상대는 이회창 후보입니다. 청렴한 이미지에 총리를 지낸 정치 거물이었죠. 결과는 2.3퍼센트 포인트 차이의 신승이었습니다. 한쪽으로 크게 쏠리는 일이 없던 충청권이 과반 넘는 표를 노 전 대통령에게 몰아준 겁니다.
이 승리의 배경에는 ‘충청 수도 이전 공약’이 있었습니다. 기대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서울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목격했으니까요. 과연 성사될까 싶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약속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삼김 시대(三金 時代)’의 공식적인 종말을 선언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의지도 있었고요. 2003년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합니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먼저 막아선 것은 당시 박근혜 대표가 이끌던 한나라당이었습니다. 좋은 기회였죠. 수도권 민심을 끌어올 기회 말입니다. 실제 정부가 충청권으로 이사를 가면 집값이 흔들릴 수 있다는 공포가 반대 여론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통과된 법을 최종적으로 막아선 것은 헌법재판소였습니다. 서울이 수도라는 것은 ‘관습 헌법’이며, 법이 이에 어긋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관습 헌법을 고치려면 성문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논리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