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조기 대선이 열립니다. 유력 후보가 없는 국민의힘에선 출마 러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 안팎에서 거론되는 예비 후보자가 15명에 달합니다. 하도 많아서 호칭 떼고 가나다순으로 적어 보겠습니다. 김기현, 김문수, 김태흠, 나경원, 박형준, 안철수, 오세훈, 유승민, 유정복, 이장우, 이정현, 이철우, 윤상현, 한동훈, 홍준표입니다.
대선 경선은 중앙당에 돈을 내야 나갈 수 있습니다. 기탁금이 얼마가 될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3억 원 안팎이 될 전망입니다. 이 돈은 대선 후보로 확정돼도 돌려받지 못합니다. 마구잡이로 경선에 참여하는 걸 막기 위한 장치인데, 이 돈을 내고라도 나설 만한 사람이 벌써 15명입니다. 민주당처럼 절대 강자가 없어서 잘하면 대선 후보가 될 수도 있거든요.
15 대 1의 경쟁률을 뚫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기탁금 몇 억 내고 정치적 체급을 키울 기회니까요. 국민 관심이 쏟아지는 경선에서 이른바 ‘졌잘싸’를 하면 차기 당권, 차기 대권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설 수 있습니다. 또 내년 6월에는 지방 선거가 치러지는데, 경선에서 인지도를 올려 두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도 있고요.
대선 준비 기간이 짧은 것도 출마 러시의 이유입니다. 국민의힘은 5월 3일 전당 대회를 열고 최종 대선 후보를 선출합니다. 경선 후보 등록이 4월 14~15일 이틀간 진행되니까, 경선은 3주간 치러지게 됩니다. 선거 운동 기간이 길수록 돈이 많이 드는데, 경선 기간이 짧으니까 선거 비용도 적게 들죠. 후보자로선 ‘가성비’ 있는 선거입니다.
그런데 3주간 열릴 경선 레이스에 참여할 예비 후보자의 면면을 보면 광역단체장이 유독 눈에 많이 띕니다. 서울시장,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인천시장은 출마를 확정했고, 충남도지사, 부산시장, 대전시장은 출마를 고심하고 있습니다. 민주당에선 경기도지사와 전남도지사가 출마할 예정입니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9명입니다. 전국 광역단체장 17명의 절반이 넘습니다.
공직선거법상 대선에 출마하려면 지자체장은 선거 90일 전에 사퇴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처럼 대통령 궐위에 따른 선거에선 30일 전에만 사퇴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현직 신분을 유지한 채 당내 경선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경선에서 떨어지면 업무에 복귀하면 됩니다. 최종 후보가 되면 그때 가서 사퇴하면 되고요.
대선 경선은 보통 3~4개월에 걸쳐 치러집니다. 예비 후보자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토론회도 10여 차례 참여합니다. 하도 바빠서 하루 두어 끼를 이동 중에 김밥으로 해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조기 대선의 경선은 3주간 열립니다. 지난 대선에서 예비 후보자들이 서너 달 동안 했던 일을 이번 예비 후보자들은 3주간 몰아서 하게 됩니다.
경선에 참여하는 현직 지자체장은 앞으로 인생에서 가장 바쁜 3주를 보내게 될 겁니다. 지자체 업무를 볼 틈이 없죠. 그래서 그들이 택하는 방법은 긴 휴가입니다. 임기를 3년쯤 지낸 지자체장은 연차 휴가가 30~50개는 남아 있을 겁니다. 연차 20개를 몰아 써서 경선에 참여하는 거죠. 연차 소진을 두고 뭐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평범한 직장인이 3주 휴가를 내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앞으로 3주간 최대 9개 광역단체에선 행정 공백이 불가피합니다. 예를 들어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4월 8일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죠. 이 지사도 긴 휴가를 내기로 했습니다. 휴가 동안에는 행정부지사가 직무 대리를 맡고요. 그런데 지금 경북은 산불 피해 복구가 시급합니다. 10월에 경주에서 열릴 APEC 정상 회의 준비도 한창이고요. 이런 때 도지사가 집무실을 장기간 비우는 겁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에서도 현직 지자체장이 다른 공직 선거의 경선에 참여하는 걸 막지는 않습니다. 행정 연속성이 깨질 우려는 있지만, 법적으로 강제하기보다는 유권자의 평가에 맡기는 거죠. 선거 운동에 몰두하느라 행정 공백 논란이 일면 선거에서 표로 평가받는 식입니다. 저는 지금 제도 자체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번엔 현직 출마자가 너무 많아 문제죠.
정치인에게도 휴가는 필요합니다. 잘 쉬어야 일도 잘할 수 있죠. 또 정치인도 사람이잖아요. 휴가는 세계인권선언에도 등장하는 인간의 기본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광역단체장들이 대선 경선에 뛰어들기 위해 한 달 가까이 유급 휴가를 내고 선거 캠프를 꾸리는 현상은 분명 정상은 아닙니다. 지방 분권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들이 연차를 몰아 써가며 중앙 정치에 올인하는 모습도 참 고약하고요.
1903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요세미티 계곡으로 나흘간 휴가를 떠납니다. 환경 운동가 존 뮤어에게 편지를 보내 그 지역을 안내해 달라고 하죠. “나흘간 정치는 완전히 접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라고 썼습니다. 루스벨트는 수행원 없이 요세미티에서 나흘을 보냈습니다. 호텔 침대 대신 메타세쿼이아 거목 아래에 모포를 깔고 누웠죠. 존 뮤어는 모닥불 앞에서 루스벨트에게 벌목업자와 목재 밀수꾼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루스벨트는 그가 “어떤 인간 건축가도 지을 수 없는 위대한 사원”이라고 칭했던 요세미티의 숲을 연방 보호 구역으로 편입합니다. 루스벨트는 재임 중에 5개의 국립공원, 51개의 연방 조류 보호 구역, 150개의 국유림을 지정합니다. 루스벨트가 지정한 국유림의 면적은 6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합니다. 나흘 휴가가 서울 면적의 1000배에 달하는 자연 유산으로 돌아온 겁니다.
선출직 지도자의 휴가는 공백이 아니라 공공선을 위한 투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조기 대선 경선에 출마하려는 지자체장들은 장기 휴가를 내며 업무 공백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부재가 어떤 공익으로 돌아올 것인지는 말하지 못할 겁니다. 공적 성과로 증명되지 않는 장기 부재는 책임 방기입니다. 또한 그들의 말대로 그만큼 오래 자리를 비워도 공백이 없을 거라면 애초 시도지사를 왜 뽑았는지도 모르겠고요.
정치인은 휴가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냐, 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제 대답은 “네, 마음대로 쓰면 안 됩니다”입니다. 선출직 지도자라는 자리가 그렇습니다. 평범한 봉급쟁이가 아니니까요. 저 같은 사람은 휴가지에 도착하면 회사 일에 신경을 꺼도 되지만, 선출직 지도자는 장소가 바뀌어도 책임이 멈추지 않습니다. 대통령도 없고 시도지사도 없는, 혼돈의 3주가 시작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