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은 비트코인의 해가 될 뻔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는 가격이 1만 달러까지 치솟았죠. 2016년 비트코인 한 개의 가격은 450달러였습니다. 10년이 채 되지 않아 가치가 2122퍼센트 상승한 존재는 역사상 드물 겁니다.
전 세계 금융 시장이 비틀거리는 가운데, 비트코인도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4월 9일 현재 7만 6883달러까지 곤두박질쳤네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돈’의 가치가 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세 부과로 인플레이션이 가시화하면 당장 쓸 수 있는 돈의 양을 늘려야 합니다. 쉽게 말해, 한 달 식비가 100만 원에서 150만 원으로 오르면 투자 목적으로 사 두었던 시골 땅이라도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비트코인에 ‘투자’를 했던 겁니다. 비트코인이 만들어진 목적을 생각해 보면 참 아이러니합니다. 비트코인은 중앙 정부와 금융 기관에 얽매여 있는 화폐에 자유를 선사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막강한 정부의 관리 없이도 안전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디지털 통화 시스템을 구축해 국경을 무력화하고 권리를 평등하게 나누어 갖자는 것이 비트코인의 창시자, 나카모토 사토시의 철학이었죠. 일종의 ‘테크노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각국 정부가 틀어쥐고 있는 달러의 힘, 엔화의 힘, 유로화의 힘을 무장 해제시킬 사명으로 태어난 비트코인은, 그러나 그 사명을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더 많은 달러를 벌기 위해, 엔화나 유로화를 벌기 위해 투자하는 ‘상품’이 되고 말았죠. 하지만, 비트코인은 원래 그럴 운명이었습니다.
범죄 리스크
만약 제가 비트코인을 한 개 갖고 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암호 ‘화폐’라고는 하지만, 비트코인 그 자체로는 라면 한 그릇 사 먹을 수 없습니다. 엘살바도르로 날아간다면 모를까요. 하지만 비트코인으로 이우환 작가의 그림 한 점은 살 수 있습니다.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주요 경매장에서 암호화폐 결제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컬렉터’가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안목도 있어야 하지만, 배짱도 있어야 하죠. 막대한 금액을 작품 하나에 걸어야 하니까요. 경매장의 숨 가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낙찰에 실패하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1만 5000달러와 2비트코인은 어감부터 다릅니다. 어딘지 모르게 ‘돈’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요. 통장을 스쳐 지나간, 숫자로만 남아버린 우리의 월급이 남기는 인상의 반대 버전쯤 될 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암호화폐로 예술품을 구입하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암호화폐에 부과하는 양도세를 피할 수도 있습니다. 세금 회피라는 점에서는 비트코인의 사명을 일부 달성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이렇게 비트코인은 거액으로 거래해야 할 때, 그리고 흔적은 덜 남기거나 세금 문제 등을 회피하고 싶을 때 화폐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가 바로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이죠.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에는 모두 일련번호가 찍혀 있습니다. 쉽진 않아도, 이 화폐가 어디서 어디로 흘러갔는지 추적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암호화폐는 이 과정이 훨씬 쉬워야 합니다. 거래 내역이 공개 블록체인에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 사용자의 암호화폐를 섞어 출처를 숨길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
크립토 믹서’ 같은 것들이죠. 즉, 암호화폐의 약속 중 ‘투명성’은 이미 시장의 필요에 의해 깨졌습니다. 추적되지 않는, 돈세탁이 가능한 화폐에 대한 수요 말입니다.
그 결과 암호화폐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전 세계의 질서가 ‘부당한’ 제재를 가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한 정권에게 암호화폐는 훔쳐 써야 할 돈이 된 겁니다.
2023년 북한 해커들은 6억 6100만 달러에 달하는 암호화폐를 훔쳤습니다. 2024년에는 절도 금액이 두 배로 늘어났죠. 전 세계의 암호화폐 도난 총액의 60퍼센트 이상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북한에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약 1퍼센트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해킹 실력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2023년 미국의 IT 기업 ‘해커어스(HackerEarth)’가 개최한 해킹 대회에서는 1위에서 4위까지 모두 북한 국적의 대학생들이 휩쓸었다고 하니까요.
조기 교육 덕분이라고 합니다. 수학에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특수 학교로 모아 가르치는 겁니다. 해커들의 성과에 생존을 걸고 있으니, 성과도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2023년 유엔 전문가 패널(
UNPE) 보고서에 따르면, 이 해커들이 전 세계에서 훔쳐 오는 돈이 북한 외화벌이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대안 화폐가 되고 싶었던 비트코인은, 정말로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숨고 싶은 존재들에게 좋은 대안이 되었습니다.
정치 리스크
게다가 비트코인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중앙 권력도 있습니다. 과격한 정치적 행보를 위해 유권자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한 권력이 보통 일을 벌입니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같은 인물 말입니다.
지난 2월 14일 밀레이 대통령은 x.com에 ‘리브라($LIBRA)’라는 암호화폐에 관해 글을 올렸습니다. 자금 지원을 암시하는 내용도 있었고요. 이 암호화폐의 가격은 21센트에서 5달러 54센트까지 치솟았다 폭락했습니다. 밀레이 대통령은 100건이 넘는 고소장을 받아야 했고요. 현재 탄핵 위기에까지 몰려 있습니다.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채택했던 엘살바도르의 경우는 비교적 성공적입니다. 엘살바도르의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독재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죠. 비트코인을 전략적 비축 자산으로 꾸준히 매입한 덕에 코인 가격이 치솟으면 엘살바도르의 국가 재정이 얼마나 나아졌는지에 관한 기사가 함께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에서도 비트코인으로 뭘 사기란 쉽지 않습니다. 정부가 나서 시스템을 보급하고, 전자 지갑을 만들면 30달러 상당의 비트코인을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문맹률이 높은 이 나라에서 새로운 기술은 갈취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신원 도용으로 돈을 챙긴 사람들이 있었고, 관광객이 비트코인으로 결제를 시도하면 에러가 났죠. 비트코인은 엘살바도르 사람들을 구해 주지 않았습니다. 독재자에게 멋진 프레임을 하나 선사했을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