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의 새로운 정의

bkjn review

땅이 꺼지는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규칙이 필요합니다.

기우의 새로운 정의

2025년 4월 14일

기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인지우(杞人之憂)라는 사자성어를 줄여 쓰는 말입니다. 옛 중국 기나라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죽을까 걱정이 되어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라는 뜻으로, 일어날 리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21세기의 도시 지역에서는 기나라 사람의 걱정이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땅이 꺼지는 일이 드문드문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2025년 3월 11일 발생한 강동구 명일동 싱크홀 사고로 한 명이 사망했습니다. 지난 4월 13일에는 부산 사상구 도시철도 공사 현장에서 싱크홀이 발생했고요. 경기 광명시에서는 지하터널 공사 현장에서 붕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왜 다른 곳도 아니고 도심지에서 자꾸만 땅이 꺼질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사람이 땅 밑을 파고드니 흙이 무너져 내리는 겁니다. 1863년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달린 이후로 도시는 지하 공간을 파고들며 성장해 왔습니다. 그로부터 162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이 꺼질 걱정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도시의 싱크홀

싱크홀은 자연적으로도 발생합니다. 땅이 물에 녹아 동굴이 생기고, 지표면이 무너져 내려 호수를 이룹니다. 석회암처럼 물에 잘 녹는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곳으로는 일본 야마구치현의 아키요시다이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완만한 구릉 사이로 곳곳에 움푹 팬 흔적이 있는 장관입니다. 다만, 이런 지형에서는 하이킹 중에도 갑자기 지하로 추락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지요.

그렇다면 석회암 지형도 아닌 도심에서는 왜 싱크홀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지하에 만들어 놓은 터널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낡은 상하수도관 같은 것입니다. 튼튼한 관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물이 흐르는 관에 균열이 발생하면 물이 새어 나와 땅을 적셨다가 수도관 수위가 낮아질 때 흙이 수도관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포장된 도로 밑으로는 뻥 뚫린 공간이 생기는 겁니다. 그 결과 땅이 꺼집니다.

하지만 최근 발생한 사고들은 상하수도관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주변에 큰 공사가 있었거든요. 명일동 싱크홀 현장을 보죠. 근처에서는 서울세종고속도로 지하 구간 공사와 지하철 9호선 연장 공사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복잡한 지반과 지하수 물길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한 채 공사를 진행했다가 일이 터진 것으로 보입니다.

도시의 해결책

지상에 건물을 올리고 도로를 내는 것도 만만찮게 어려운 일입니다. 길이 날 곳에 살고 있는 사람과 동물, 산과 천을 생각하면 계산이 간단치 않지요. 하물며 지하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원래 지하 공간은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요. 지하는 사실 돌과 물의 공간입니다. 그들의 규칙을 부수고 들어가 터널을 만들고 그 공간에 열차를 달리게 합니다. 상업 공간을 만듭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이지요.

이렇게 까다로운 일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시작한 것은 1863년 1월 10일, 영국 런던에서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운행했던 날부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상하수도 시스템이 있었지만, 물길이 아니라 사람의 길을 지하에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시점은 역시 지하철의 탄생이라고 해야겠지요.

당시의 지하철은 증기기관의 힘으로 달렸습니다. 열차에 지붕도 없었기 때문에 매캐한 연기를 그대로 다 마셔야 했죠. 이 유쾌하지 않은 탑승감에도 불구하고, 런던 지하철은 성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하에 길을 만들지 않고서는 교통체증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런던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탄생한 물건이었으니까요. 네, 1800년대에도 교통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1863년의 런던은 150만 명이 몰려 사는 대도시였거든요.

부동산의 논리

사회적 동물은 함께 살아갈수록 잘살게 되어 있습니다.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돕습니다. 금붕어도 많을수록 잘 살고 올빼미도 한 서식지 안에 많이 살아야 멸종의 위험을 피합니다. ‘앨리 효과(Allee Effect)’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도시의 인구가 2배로 늘어나면 특허 출원 수는 2.15배로 늘어난다고 하죠. 다양한 사람이 모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더 나은 결과를 내는 겁니다. 대도시는 사람과 건물이 한 곳에 집중되어 시너지를 일으키고, 그 결과 발전을 거듭합니다. 압도적인 인구 밀도를 도시가 감당하는 방법이 바로 고층 건물이며 지하 공간이죠.

그런데 도시가 점점 커질수록, 교통의 중요성을 더 강하게 인식할수록 일의 순서가 뒤바뀝니다. 사람을 모으기 위해, 그래서 장소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하 공간을 개발하는 겁니다. 도심지에 지하철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도심지와 연결할 새로운 베드타운에, 새로운 계획도시에 지하철을 건설하기 시작한 겁니다. 즉, 장소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하를 개발합니다.

지상으로 나 있는 도로를 지하로 옮기자는 주장도 그래서 나옵니다. 지상의 공해를 줄이고 교통 체증도 완화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경부고속도로 지하화 계획은 서초 지역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부동산 호재’입니다. 반대로 짓겠다고 약속했던 지하 공간을 짓지 못하면 ‘부동산 악재’가 되죠.
명일동 싱크홀 사고 현장 근처에서는 서울세종고속도로 지하 구간 공사도 진행 중이었습니다. 새로운 도로의 건설은 부동산 시장에서 아주 중요한 이슈입니다. 모두 새로운 ‘강남’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출처: 땅짚고
집값이 내려가지 않는 이유

그래서 싱크홀 문제는 두 가지 우려가 충돌하는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첫 번째 우려는 안전 우려입니다. 내가 매일 지나던 길에 싱크홀이 발생한다면 덜컥 불안할 겁니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공사 현장도 새삼 다시 보게 될 테고요. 지자체에서 위험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알리고 있는지도 따져보게 되겠죠.

두 번째 우려는 집값 우려입니다. 싱크홀 위험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집값이 내려갈까, 걱정하는 겁니다. 안전보다 집값이 중요시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있을 수 있겠지만, 2023년 기준 우리나라 가계 자산의 절반이 집값입니다. 열심히 일해 쌓은 부의 대부분이 부동산에 물려 있으니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연구에 따르면 싱크홀 발생은 단기적으로 충격이 될 뿐, 아파트 가격 변동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2014년 송파구 석촌동 싱크홀 사건 이후 아파트 실거래 가격을 조사하여 분석한 결과입니다. 이 이야기를 뒤집어보면, 우리가 아직도 싱크홀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땅이 꺼지는 시대의 각오

서울시가 얼마 전 크게 비판받은 일이 있습니다. 지난 2024년 서대문구 연희동 싱크홀 사고 이후 ‘지반침하 안전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걸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 관계자로부터 “부동산 가격 등에 혼란을 줄 수 있다”라는 말이 흘러나오며 구설에 올랐죠.

그런데 더 상세히 들여다보니 서울시가 만들었다는 이 안전 지도가 굳이 공개하기에는 몹시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지질조사나 레이저 탐사 등도 없이 그저 지하철역, 수도관, 가스 배관 등의 지하 시설이 밀집한 곳을 표시한 정도였던 겁니다.

사실, 지난 명일동 사건 당시 인근의 주유소 운영자가 지자체에 민원을 제기했던 일이 나중에야 드러났죠. 평소에 보이지 않던 지반 균열이 있으니 조치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2024년의 연희동 싱크홀도 당시 지방의회 의원이 민원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사고 직전 자동차가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지반은 망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고를 막지 못한 것일까요. 마치 일본의 한신 대지진 때처럼, 우리나라의 행정도 체계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무원에게 민원은 정말 무서운 존재입니다. 민원의 무게는 때로 한 사람의 목숨 무게가 되기도 할 정도로 무겁습니다. 그런데 땅에 금이 간 것 ‘같다’라는 민원의 무게와 교통체증으로 못 살겠다는 민원의 무게는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공무원은 싱크홀 전조 증상 앞에서 어떤 조처를 해야 할까요.

상황이 심각해 보인다 해도 바로 조처를 할 수는 없습니다. 책임 소재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결정 권한이 있는 상부에 보고 절차를 거쳐야 하고 부서 간 칸막이도 넘어야 하죠. 하지만 싱크홀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포장된 도로 밑에 커다란 동굴이 생겨 있어야 전조증상이라는 것도 나타나는 것이니, 이상이 감지되었다면 당장 5분 후라도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복잡한 도시의 지하는 계속해서 뚫릴 겁니다. 지하공간에 대한 개발을 포기할 수 없다면 제대로 된 안전 지도부터 만들어야 하겠지요. 시간도 걸리고 교통에도 불편이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돈도 듭니다. 이걸 감당하고서라도 이 무거운 도시를 계속해서 키우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낡은 도시에 생기는 각종 안전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돌아가고 기다리겠다는 각오도 필요합니다. 땅이 몇 센티미터 부풀면, 갈라지면 바로 통제부터 한 뒤 안전을 확보하는 식으로 관리 매뉴얼을 만들어 지자체에서 사고를 사전에 막을 수 있도록 보장해 줘야 합니다. 차가 막혀 불편하다는 민원에 ‘매뉴얼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답할 수 있게 말이죠.

이제 곧 장마철이 닥칠 겁니다. 국지성 호우가 일상이 된 21세기의 서울에서는 또다시 몇 군데 크고 작은 땅 꺼짐이 발생할 겁니다. 하늘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지만, 땅은 꺼집니다. 기우가 기우가 아닌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규칙이 필요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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