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회사를 창업해 성장시키는 공식에 균열이 발생한 겁니다. 투자를 받아 회사를 키우는 방식에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앞으로도 시장이 성장할 것이라는 전제입니다. 발란의 경우에는 명품 시장이 되겠죠. 명품이 앞으로도 잘 팔릴 것이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회사의 미래가치가 더 불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투자도 더 들어옵니다. 그런데 ‘성장의 시대’가 갑자기 끝났습니다.
변화의 시작
사실, 저성장의 시대는 예고되어 있던 것입니다. 값싼 중국의 노동력이라는 요인이 사그라들면서 세계 경제는 성장 동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나타납니다. 2019년부터 본격화한 코로나19 사태입니다.
갑자기 닥친 감염병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각국의 정부는 천문학적인 돈을 시장에 풀었습니다. 그 돈은 다시 투자 시장으로 흘러들었고요. 기업 하기 좋은 때였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돈 쓰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니 이커머스 쪽은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죠. 발란도 그런 흐름에 올라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팬데믹이 끝나고 억눌려 있던 소비 심리가 잠시 폭발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죠. 저성장의 시대가 닥친다는 전망이 고개를 들면서 기업의 미래 가치에 투자하겠다는 돈의 규모가 줄어듭니다. 특히 명품 시장의 경우에는 더욱 전망이 어두워졌습니다. 코로나19가 세계 경제 전체를 강타했던 2020년을 제외하고 개인 명품 시장은 늘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 기세가
2023년 꺾입니다. 처음으로 시장이 역성장을 경험한 겁니다.
저성장 시대의 투자법
발란은 다른 스타트업과 마찬가지로 성장을 전제로 사업을 벌여왔습니다. 이번 분기의 이윤보다 회사의 미래 가치를 키우는 데에 집중했죠. 자연스럽게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다음 투자금으로 적자를 메꾸고 더 큰 성장을 꾀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명품 시장이 불황기에 진입하면서 이 공식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란은 다른 길을 택합니다.
발란은 2023년 기업 가치를 3200억 원으로 평가받습니다.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하지만 명품 호황기가 끝나고 발란의 거래액도 급감하면서 회사의 가치는 10분의 1로 떨어지고 맙니다. 벼랑 끝에 몰렸던 지난 2025년 2월, 발란은 화장품 제조업체인 ‘실리콘투’로부터 추가 투자를 유치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때 평가받은 기업가치는
약 290억원 수준이었습니다. 투자액은 총 150억 원 규모, 지분의 50퍼센트가량을 획득하게 되면서 최종적으로는 경영권도 넘겨받게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도 회사가 기사회생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투자 유치가 독배가 되고 맙니다. 투자 조건 때문입니다. 1차로 75억 원을 우선 투자 받고, 나머지는 75억 원은 2개월 연속 월 영업이익 흑자를 달성해야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게다가 직전 2개월 연속 직매입 매출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했고요. 직매입은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입니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물론 재고 비용까지 감수해야 하죠. 또, 실력 있는 MD를 고용해야 하므로 인건비도 상승합니다.
여기에 흑자도 반드시 내야 합니다. 그러니 장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일단은 무리한 마케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달만 흑자를 내면 되니 매출은 당기고 지출은 미룹니다. 장기적으로는 재정적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죠. 75억 원의 투자금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겁니다. 실리콘투의 투자는 회사의 미래 가치를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당장 돈이 벌린다는 것을 증명해야 투자하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저성장 시대의 투자법이라 할 수 있겠네요.
승리하지 못한 플랫폼
사실, 플랫폼이라는 것은 압도적인 1위가 과점할 수밖에 없는 사업입니다. 회원 가입 외에 다른 장벽이 없기 때문에 이용자가 언제든지 서비스를 옮겨탈 수 있고, 결국 가장 편리한 서비스에 정착하게 되기 때문이죠. 한 번 시장을 과점하게 되면 서비스를 공급하는 쪽은 1위 사업자에 더 몰립니다. 이용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용자도 1위 사업자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서비스 공급자가 가장 많아 경쟁에 의한 품질 향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쿠팡이츠, 요기요, 배달의 민족이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을 했던 것도, 네이버가 다음과 네이트를 누르고 독과점 체제를 완성한 것도 플랫폼 사업의 숙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명품 플랫폼 업계도 2강 내지 3강으로 정리 수순을 밟게 될 겁니다. 이번 발란 사태는 그 시작이 될 것이고요. 발란의 경우 ‘티메프’ 사태 때보다는 비교적 조기에 회생절차 신청에 들어갔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금 셀러들은 비상이 걸린 상태입니다.
발란 사태를 두고 이커머스 업계가 정산 금액을 레버리지로 이용하는 관행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억울한 피해자가 더는 생겨서는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기업을 만들어 성장시키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에도 주목했으면 합니다. 저성장의 시대, 혹은 정체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저성장 시대의 경영법은 달라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