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시대의 경영법

bkjn review

광고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장의 공식이 달라졌습니다.

저성장 시대의 경영법

2025년 4월 16일

명품 플랫폼 ‘발란’이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습니다. 돈을 벌지 못해 셀러들에게 판매 대금을 정산해 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규모가 수백억 원대입니다. 한때 ‘머트발(머스트잇, 트렌비, 발란)’로 불리며 주목받았던 스타트업이 수명을 다해갑니다.

발란의 실패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광고입니다. 아무래도 김혜수 씨가 등장했던 CF 영상이 무척 인상 깊었기 때문일 겁니다. ‘회사의 내실을 키우지 않고 사치스럽게 유명 배우를 기용한 대가를 이렇게 치른다’는 식의 시선입니다.

숫자를 보면 근거는 있습니다. 발란은 2021년에 광고선전비만 약 190억 원을 썼습니다. 2022년에는 약 385억 원을 썼고요. 곳간이 넉넉해서 돈을 쓴 것이 아닙니다. 적자를 감수하고 쓴 돈입니다. 화려한 광고와는 달리 재무상태는 악화 일로였죠.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발란의 광고는 전략이었습니다. 한때는 잘 통하는 전략이었죠. 문제는 달라진 경영의 규칙입니다.

기업 성장의 공식

20세기에 기업은 어떻게 성장했을까요. 좋은 상품을 만들어 열심히 팔았습니다. 이윤을 쌓고 은행에서 자금을 대출해 공장을 늘리고 사업 분야를 확장합니다. 그렇게 건설된 것이 삼성과 현대, LG와 SK 같은 한국식 대기업이죠.

21세기에 창업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청사진을 그릴까요. 적어도 삼성과 같은 기업을 만들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전쟁 직후의 고도 성장기는 이제 다시 오지 않습니다. 삼성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시대가 기회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죠.

이제 창업가들은 다른 방식으로 회사를 만들고 키웁니다. 스타트업은 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미션’을 강조합니다. 중고차를 구매할 때 정보 비대칭에 따른 불편함이 발생한다든지, 빨래에 신경쓸 시간이 없다든지, 중고 거래를 할 때 상대방을 믿기 힘들다든지 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이 미션을 달성해 높은 수익을 낼 것이라는 청사진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렇게 스타트업은 투자를 받습니다. 투자금은 회사의 미래 가치를 담보로 빌리는 돈 같은 것입니다. 미션 달성을 위해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는 것이죠. 그런데 적지 않은 스타트업이 투자금으로 회사의 덩치를 키웁니다. 이를 바탕으로 회사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추가 투자금이 들어옵니다. 회사의 덩치를 더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다 회사를 높은 가격에 매각합니다. 이른바 ‘엑시트’입니다. 이 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바로 ‘배달의 민족’으로 스타트업 신화를 쓴 김봉진 창업자입니다.

김혜수 씨는 잘못이 없다

발란도 비슷한 방식으로 회사를 키울 생각이었을 겁니다. 명품 수요는 늘어나는데, ‘오픈런’을 해도 샤넬 백은 구하기 어렵습니다. 커피값을 아껴서라도 명품 브랜드 스카프를 사고 싶다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인스타그램에서는 명품 언박싱이 ‘좋아요’를 받죠. 그래서 발란은 온라인으로 간편하게 명품 브랜드 제품을 구입할 수 있는 커머스 플랫폼을 만들기로 합니다.

회사가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꽤 그럴듯해 보입니다. 투자를 받아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회사의 덩치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경쟁사보다 압도적인 숫자가 필요하겠죠. 더 많은 고객 수, 더 많은 거래 건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이 바로 김혜수 씨였던 겁니다.

이런 전략은 사실 스타트업 업계에서 마치 공식처럼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네이버가 블로그 서비스로 치고 나갈 땐 전지현 씨가 있었습니다. 배달의 민족은 류승룡 씨가 있었고요. 쿠팡도 출범 초기에 전지현 씨를 모델로 기용했습니다. 초반에 압도적인 이용자를 확보해야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투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 대중적인 인지도가 부족한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스타 마케팅’이 가장 쉽고 빠른 전략이죠. 단번에 인지도와 신뢰도, 상표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요.
스타 마케팅은 전략입니다. 발란은 과감한 마케팅을 통해 회사의 가치를 단번에 끌어올릴 작정이었을 겁니다. 출처: 발란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회사를 창업해 성장시키는 공식에 균열이 발생한 겁니다. 투자를 받아 회사를 키우는 방식에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앞으로도 시장이 성장할 것이라는 전제입니다. 발란의 경우에는 명품 시장이 되겠죠. 명품이 앞으로도 잘 팔릴 것이라는 전제가 성립해야 회사의 미래가치가 더 불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투자도 더 들어옵니다. 그런데 ‘성장의 시대’가 갑자기 끝났습니다.

변화의 시작

사실, 저성장의 시대는 예고되어 있던 것입니다. 값싼 중국의 노동력이라는 요인이 사그라들면서 세계 경제는 성장 동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나타납니다. 2019년부터 본격화한 코로나19 사태입니다.

갑자기 닥친 감염병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각국의 정부는 천문학적인 돈을 시장에 풀었습니다. 그 돈은 다시 투자 시장으로 흘러들었고요. 기업 하기 좋은 때였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돈 쓰기 어려운 환경이었으니 이커머스 쪽은 호황을 누릴 수밖에 없었죠. 발란도 그런 흐름에 올라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팬데믹이 끝나고 억눌려 있던 소비 심리가 잠시 폭발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죠. 저성장의 시대가 닥친다는 전망이 고개를 들면서 기업의 미래 가치에 투자하겠다는 돈의 규모가 줄어듭니다. 특히 명품 시장의 경우에는 더욱 전망이 어두워졌습니다. 코로나19가 세계 경제 전체를 강타했던 2020년을 제외하고 개인 명품 시장은 늘 견조한 성장세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 기세가 2023년 꺾입니다. 처음으로 시장이 역성장을 경험한 겁니다. 

저성장 시대의 투자법

발란은 다른 스타트업과 마찬가지로 성장을 전제로 사업을 벌여왔습니다. 이번 분기의 이윤보다 회사의 미래 가치를 키우는 데에 집중했죠. 자연스럽게 적자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다음 투자금으로 적자를 메꾸고 더 큰 성장을 꾀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명품 시장이 불황기에 진입하면서 이 공식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란은 다른 길을 택합니다.

발란은 2023년 기업 가치를 3200억 원으로 평가받습니다. 적지 않은 금액입니다. 하지만 명품 호황기가 끝나고 발란의 거래액도 급감하면서 회사의 가치는 10분의 1로 떨어지고 맙니다. 벼랑 끝에 몰렸던 지난 2025년 2월, 발란은 화장품 제조업체인 ‘실리콘투’로부터 추가 투자를 유치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이때 평가받은 기업가치는 약 290억원 수준이었습니다. 투자액은 총 150억 원 규모, 지분의 50퍼센트가량을 획득하게 되면서 최종적으로는 경영권도 넘겨받게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도 회사가 기사회생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투자 유치가 독배가 되고 맙니다. 투자 조건 때문입니다. 1차로 75억 원을 우선 투자 받고, 나머지는 75억 원은 2개월 연속 월 영업이익 흑자를 달성해야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게다가 직전 2개월 연속 직매입 매출 비중을 절반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했고요. 직매입은 자금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입니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물론 재고 비용까지 감수해야 하죠. 또, 실력 있는 MD를 고용해야 하므로 인건비도 상승합니다.

여기에 흑자도 반드시 내야 합니다. 그러니 장부의 숫자를 맞추기 위해 일단은 무리한 마케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달만 흑자를 내면 되니 매출은 당기고 지출은 미룹니다. 장기적으로는 재정적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죠. 75억 원의 투자금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겁니다. 실리콘투의 투자는 회사의 미래 가치를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당장 돈이 벌린다는 것을 증명해야 투자하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저성장 시대의 투자법이라 할 수 있겠네요.

승리하지 못한 플랫폼

사실, 플랫폼이라는 것은 압도적인 1위가 과점할 수밖에 없는 사업입니다. 회원 가입 외에 다른 장벽이 없기 때문에 이용자가 언제든지 서비스를 옮겨탈 수 있고, 결국 가장 편리한 서비스에 정착하게 되기 때문이죠. 한 번 시장을 과점하게 되면 서비스를 공급하는 쪽은 1위 사업자에 더 몰립니다. 이용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용자도 1위 사업자를 벗어나기 힘듭니다. 서비스 공급자가 가장 많아 경쟁에 의한 품질 향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쿠팡이츠, 요기요, 배달의 민족이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을 했던 것도, 네이버가 다음과 네이트를 누르고 독과점 체제를 완성한 것도 플랫폼 사업의 숙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명품 플랫폼 업계도 2강 내지 3강으로 정리 수순을 밟게 될 겁니다. 이번 발란 사태는 그 시작이 될 것이고요. 발란의 경우 ‘티메프’ 사태 때보다는 비교적 조기에 회생절차 신청에 들어갔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금 셀러들은 비상이 걸린 상태입니다.

발란 사태를 두고 이커머스 업계가 정산 금액을 레버리지로 이용하는 관행을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억울한 피해자가 더는 생겨서는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저는 기업을 만들어 성장시키는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는 점에도 주목했으면 합니다. 저성장의 시대, 혹은 정체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저성장 시대의 경영법은 달라져야 합니다.
* bkjn review 시리즈는 월~목 오후 5시에 발행됩니다. 테크와 컬처, 국제 정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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